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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에서 뒤늦게 문학에 입문하여 열심히 시를 쓰고 있는 윤윤석 시인의 첫 시집 <내 인생 내 지게에 지고>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는 윤시인의 고단한 입지전적인 인생이야기가 담긴 시 177편이 5부로 나누어 담겨있다. 다음은 시인의 고향 <새거제 신문>이 소개한 글이다./오하룡

 

“좋은 곳은 곳곳이 찾아다니며/ 높은 산 깊은 골짜기/ 큰 동네 작은 동네 구경 다하고/ 간신히 손을 떼어 흘러갑니다”
이 시(詩)는 1951년 가을 열여덟 늦깎이 중학생이 둔덕면과 장승포 100리길을 통학하며 쓴 ‘시냇물과 산길’의 한 구절이다. 그리고 이 청년은 65년이 지난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첫 시집을 출간하게 된다.

오늘의 주인공은 최근 5부에 걸쳐 177편의 시를 수록한 ‘내 인생 내 지게에 지고’란 시집을 발표한 윤윤석(84) 시인이다. 
이 시집은 시인이 1951년 장승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최근까지 60여 년 동안 창작하고 간직해온 시편을 담고 있다.

시집을 받아보고 가장 먼저 손끝이 멈춘 곳은 시집에 수록된 시인의 창작노트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를 창작하게 된 배경을 풀이한 창작 노트를 보면서 시인 개인의 인생사는 물론 근·현대 거제 서민의 삶과 애환까지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1933년 둔덕면 거림리에서 출생했다.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시인은 늘 배움에 목말라 했다.
하지만 시인은 초등학교 교육만 마치고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당시 둔덕면에 중등교육 기관이 없기도 했지만 가정형편까지 녹록치 못한 탓에 적잖은 수업료를 내야했던 중학교 진학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1년 시인의 나이 열여덟이 되던 해 친척 중 한분이 장승포에 있는 중학교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해 가을부터 거제중학교에 입학해 중학교를 다니게 된다.

둔덕면에서 장승포까지 100여리(40km 남짓), 맨몸으로 통학을 해도 힘들었을 거리를 시인은 매주 월사금(수업료)을 대신한 쌀을 지게에 지고 다녀야 했다.

이듬해 한국전쟁을 피해 학교를 임시로 옮기게 된 서울대광중학교가 둔덕면 문을 열기까지 한 학기 정도 다녔던 추억이지만 아직도 시인의 뇌리엔 어제 일처럼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한국전쟁으로 거제도는 거의 전 지역이 포로수용소 구역이 되면서 큰길은 미군 트럭의 통행 탓에 일반인에겐 위험하고 흙먼지가 잦아 불편했단다.

그래서 시인은 고향인 둔덕면 큰장갓재-동부면 베리목-지세포 밤싱이재-장승포 앞길 등 주로 산길을 이용해 학교를 다녀야했다.

그래도 그 시절 지금은 구천댐 건설로 사라진 구천계곡을 비롯해 거제의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산천의 풍광을 걸었던 등굣길의 기억은 65년 넘도록 시인의 창작 욕구를 부채질하며 펜을 놓지 않게 한 원동력이 됐다.

중학교 졸업 후에도 학업을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시인은 낮에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으로 배움을 이어가며 대학교 졸업까지 마친다. 그리고 1969년엔 마침내 교사 임용시험까지 합격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늘 배움이 그리웠던 열여덟 소년이 오랜 배움 끝에 이제는 배움을 나누는 교사가 된 것이다. 

시인의 첫 발령지는 지금은 폐교가 돼 수련시설로 사용되고 있는 장목면 옛 대금초등학교, 당시 첫 월급은 1만 8200원으로 시인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교사 월급만으로 생계유지가 힘들었던 시인은 첫 발령 이후 3년 뒤 고향인 둔덕면 지역의 초등학교에 전근을 신청한다. 낮에는 학생을 가르치고 방과 후와 주말엔 농사를 짓기 위해서였다. 시인은 1998년 평교사로 퇴직할 때 까지 둔덕면 지역의 3개 초등학교에서만 근무했다. 그런 탓에 웬만한 둔덕면민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시인은 고향에 대한 애착도 많다. 특히 유년 시절 어렵게 학업을 했던 이력 때문인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몇 년 전까지 둔덕중학교의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교사정년퇴임 이후 시인의 인생 1막은 끝난 셈이었다. 시집의 머리말에 “정년을 마친 사람으로 남는 시간과 건강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고 밝힌 것처럼 퇴임 이후 무료한 인생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생 제2막을 위해 또 다른 배움에 도전한다. 그동안 틈틈이 창작했던 시를 더욱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정년퇴임 후 10년 만에 시사문단 시부문 신인상과 제45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에 입상을 시작으로 왕성한 문학 활동 이어가고 있다.

요즘 시인은 매주 월요일이면 거제문인협회가 주관하고 있는 ‘무료 시창작 교실’에 수강생으로 거제시청소년수련관을 찾는다. 30여명의 수강생 중에 윤시인 보다 나이 많은 수강생은 없다.

더구나 그동안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커 아직까지 지각이나 결석 단 한 번도 없는 모범생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열여덟 나이에 첫 중학교 생활, 서른 중반 첫 교사생활, 여든이 넘어서야 첫 시집을 낸 시인의 인생엔 늘 ‘늦깎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했을 법하다.

하지만 이제 시인의 인생에 더 이상 늦깎이 인생은 없다. 시인으로 시작한 인생 제2막부터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백세시대를 이끄는 선구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새거제신문 2016.6.17. 최대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