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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필문학회 <석필> 3호 꽃들의 출근시간 주요내용

 

서문-

 

  한반도 평화의 물결이 지난 봄날 꽃으로 펴서 단풍처럼 물들어가는 멋진 가을이다. 이 멋진 가을을 껴안고 석필 3집 『꽃들의 출근시간』을 낸다.

 

  이번 동인지 기획 방향은 ‘99색의 아름다운 동행’이다. 다른 개성을 지닌 아홉 시인의 출근길을 돕는 시정詩情이 독자들을 따뜻하게 했으면 좋겠다.

 

  문학적 깊이를 갖추신 공광규 선생님의 따사로운 해설과 초대시를 흔쾌히 주신 박기섭, 오승철, 서숙희, 고영, 김승강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석필동인 3집 『꽃들의 출근시간』이 널리 사랑받기를 희망한다.

 

2018. 평화의 가을

 

석필동인 일동 

 

 

초대시

박기섭- 설장구 휘모리, 너 나의 버들이라

 

오승철- 3일 평화, 아스

 

서숙희- 바람꽃, 꼴

 

고영-  백지, 풀리지  않는 자서

 

김승강- 청담동, 장미의 기억

 

회원시

김용권

아, 홈

병의 다클라마칸

왜가리

증명사진

물금

가마 무사

김해 천문대

 

우원곤

애기똥풀

스콜

어느 마중

레전드

용지호수 25시

오동꽃

달개비꽃

새벽

 

김주경

즐거운 파동

잔도공

ㅋㅋㅋ의 배후

연(煙)꽃이 핀다

물숨

임플란트

커튼콜

포스트잇

 

서성자

돌을 얹다

드라이플라워

고사목

겹겹

여행가는 날

일몰

드문드문 제비꽃

 

성정현

어머니

오늘도 2

성주사

간절곶

단상

 

손영희

오해

시래기 엮음가(歌)

그 겨울, 변산반도

바다로 간 노인

가을볕

택호

옥천사

 

이분헌

안부 한 접시

찬밥

비빔밥 대화

망초꽃

능소화

빈집 피다

글꽃 방

 

임성구

꽃이 핀다

시간을 열람하다

눈 내리는 궁항에서

문화동 비둘기

혈색이 돌아왔다

거울

꽃들의 출근 시간

 

황영숙

바랭이

안국사

회산다리 근처

경화역

회원북로

쪽물 들던 날

칸나꽃 편지

 

<해설>

 

구인 구색의 아름다운 동행

공광규(시인)

 

석필 동인 아홉 분이 모여 동인지 꽃들의 출근시간을 낸다. 동인은 2003년에 결성하였고, 시를 쓰는 두 분과 시조를 쓰는 일곱 분이 모였다고 한다. 동인 결성 15년째인데 3집 째 낸다니 속도가 더디고 부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딘 것은 아무런 흠이 안 된다. 작품 수준과 더딘 것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단 한 권 동인지로 끝나는 동인들도 무수히 봐왔고, 동인지 한 권 못 내고 유야무야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인을 15년이라는 세월동안 끌어왔다니 어떤 측면에서는 대단한 것이다. 이번에는 김용권, 우원곤, 김주경, 서성자, 성정현, 손영희, 이분헌, 임성구, 황영숙 시인이 시와 시조 각 7편씩 들고 동인지에 참여하고 있다. 잡지나 다른 지면에서 한번 이상은 눈에 익은 이름들이니 동인의 면면에 신뢰가 간다. 발표되는 시의 수준도 거의 알고 있다. 필자가 시를 읽어가면서 배우는 면이 많았으니, 여기에 실린 시들이 어느 동인지의 작품들보다 떨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보내온 원고를 보니까, 동인지 편집 체제는 이름 가나다순이다. 등단 순도 나이순도 아니다. 그냥 평등하게 작품만 보자는 동인들의 함의가 담긴 합의일 것이다. 편집의 맨 앞자리에 와 있는 김용권의 시부터 시작해야겠다. 김용권 시의 특징은 세밀하고 광대한 상상력이다. 그는 한 알의 모래와 한 송이 꽃에서 세계를 본다. 물론 블레이크 시에 있는 얘기다. 블레이크가 화엄경에서 배워갔듯 김용권도 불교를 잘 안다. 아래 첫 시 <, >이 그렇다.

 

법주사 석등을 머리에 올린

사자 두 마리

암사자가 하고 입을 열면 숫사자는

입을 다문다

 

, 흠은 범어의 시작과 끝

염원과 완성의 단계라는데

 

구름의 걸음이 빨라지고

가사를 껴입은 어둠이 중마당을 뛰어들면

피가 나도록 둘의 가슴을 문지르고 있다

- <, > 부분

 

김용권의 상상력은 대상의 관찰에서 온다. 필자도 법주사에서 자기도 하고 석등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이런 관찰과 상상을 한 적은 없다. 석등 너머를 봐야하는데, 석등 너머를 못 본 것이다. 김용권은 석등 너머를 볼 줄 안다. 관찰과 투시의 결과다. 필자는 이 시를 읽고서야 아, 맞다! 무릎을 쳤다. 범어의 시작과 끝은 에서 까지인가. 그건 모르겠다. 부처님의 밝은 법을 상징하는 등을 머리에 인 암사자는 입을 벌리고 숫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3구름의 걸음이 빨라지고/ 가사를 껴입은 어둠이 중마당을 뛰어들면/ 피가 나도록 둘의 가슴을 문지르고 있다는 동적 심상의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 시는 여기서 끝나도 대 만족이다. 시인은 <병의 타칼라마칸>에서 광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모래사장에 몸 절반을 묻은 채 박혀 있는 푸른 병을 보고 저건 필시 태산을 옮기던 소주병이었을 거야라고 상상한다. 소주병이 태산을 옮기다니. 시인의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모래사장을 타칼라마칸으로 상상하는 것도 그렇다. 감동의 크기는 공간과 시간의 거리와 비례한다. 작은 모래사장에서 타칼라마칸의 거리, 작은 소주병과 태산의 거리가 시 읽기의 쾌감을 준다.

<물금>은 시의 결이 세밀하다. 시인은 지리적 공간이자 지명인 물금을 통해 삶의 결을 읽어낸다. 물금은 필자도 십대 때 경부선으로 지나면서 내리고 싶었던 궁금한 지명이다. ‘물금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시인은 분명 물의 몸에는 결이 있지/ 영원으로 흐르는 살이 있어라고 한다. 화자는 석양에 팔랑 팔랑 건너오는 금빛물결은/ 생의 가장 빠른 질주 같았다고 고백한다. 물금은 지워도 또 새기는 금이며 깨어져도, 부서져도 금이 가지 않는/ 물의 금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발견이다.

김용권은 오토바이족을 비유한 시 <기마무사>에서도 분산성 아래,/ 동문 푸른 벽에는/ 표창에 찔린 흔적이 수북하다는 현재와 과거, 시간적 공간을 왕복하는 상상력의 확대와 <김해천문대>에서 천장에 고인 밤하늘 문장은 장엄하백만 송이/ 등불을 걸어두었다는 광대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의 시를 읽으면 왠지 머리가 탁 트여 시원하다는 느낌을 얻는다. 상상력 따라잡기의 즐거움을 주는 시이다.

 

우원곤은 시적 대상인 식물에서 상상력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오래된, 전통적인 창작방식이다. 안전한 방식이고 많은 시인들이 방황을 하다 결국은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애기똥풀>은 애기똥풀에서 발상한 시다. 화자는 노란 꽃이 예쁜 애기똥풀을 보고는 삶이 괴로울 때/ 어머니는 똥트림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똥에 관한 여러 가지 사건과 경험 정보를 진술한다. 식물을 통해 기억을 확장시키는 방식이다.

<스콜>은 싱가포르 관광여행 중에 비나무에서 상상이 시작된다. “난이는 비나무를 좋아했다/ 백석을 사모했다는이라며 백석의 시 <통영>의 내용을 생각해낸다. 난이와 백석을 생각해낸 것은 통영 출신 현지 여자가이드 때문이다. 시는 도로 옆 비나무들이 일제히 잎을 오모리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국의 삶도 녹녹치 않다는/ 그녀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비나무와 통영출신의 그녀, 장대비와 눈물이 서로 호응하면서 시가 깊고 슬퍼진다.

 

팽나무 고목 한 그루

가히 수백 년 됨직한 모습은

조선의 선비처럼 강직한 뿌리로

하늘을 받들고 있다

- <어느 마중> 부분

 

당항포 구내식당에 점심 먹으러 가던 길

길섶에 떨어진 연보랏빛 오동꽃을 보니

시집보내려는 딸이 떠올라

- <오동꽃> 부분

 

<어느 마중>의 상상력 매개는 팽나무다. 출퇴근 시간에 낙동강을 건너다보며 만나는 나무다. 화자는 단단하고 오래 사는 팽나무 고목 한 그루를 보고 수백 년 전 조선의 강직한 선비를 떠올린다. <오동꽃>의 매개는 오동꽃이다. 화자는 오동꽃을 보고 혼기에 찬 딸을 떠올리며 근심에 차 있는데, 동행하던 여직원이 라이락꽃인가요?” 엉뚱한 말을 하면서 근심에 찬 상황을 뒤집어버린다.

 

읍사무소에 벌채신고서를 들고 왔다

물색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

어디 사시오

좁은 골목길을 돌아 봉창 하나 있는 문간방

불빛에 푸르고 슬퍼 보이는 달개비꽃, 푸른 나비

가끔 삶이 지칠 때

서성거렸던 골목

아침 이슬과 함께 노란 웃음이 가득한 나비

- <달개비꽃> 부분

 

화자는 읍사무소 여직원이 어디에 사냐고 묻자 좁은 골목길을 돌아 봉창 하나가 있는 문간방에 산다고 한다. 푸르고 슬퍼 보이는 달개비꽃이 푸른 나비처럼 피어있는 곳이다. 여직원의 질문에 식물의 이름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식물에 눈을 주고 마음을 주는 시인의 친 자연적 삶이 시에 오롯이 드러난다.

김주경은 인생을 이해하고 삶의 질곡을 잘 잡아내는 시인이다. <잔도공>, <물숨> <커튼콜>같은 시들이 그렇다. 이런 시에서 우리는 핍진한 삶의 깊이를 본다. 이를테면 일반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가파른 절벽에 길을 만드는 노동자인 잔도공을 형상한 시 <잔도공>을 읽어가다 보면, 늘 생업을 위해 전장터에 서있고 두려움에 떨면서 건너가는 우리 생의 서늘함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매일 매일 위태로운 잔도공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득한 저 하늘이 전장이고 침실이다

그림자도 오지 않는 적막한 허공에서

믿을 건 겹겹이 엎드린 바람과 구름뿐

흔들리는 삶은 늘 벼랑 쪽으로 기울고

발아래엔 무성하게 자라나는 크레바스

가난은 두려움을 건너는 유일한 징검돌이다

- <잔도공> 부분

 

바위 벼랑에 선반모양의 길을 내고 있는 잔도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인생은 벼랑에 만든 잔도를 가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 속의 잔도공 일상은 아득한 하늘이 일터이고 침실이다. 허공에 매달려 있으니 그림자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림자조차 없는 허공이니 적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다 믿을 건 겹겹의 바람과 구름뿐이라니. 이것 자체가 살아내기 어려운 인생을 비유한다.

가난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을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잔도공의 벼랑 쪽으로 기우는 흔들리는 삶의 이면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크레바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서 낸 잔도 아래는 한번 떨어지면 지상에서 끝나는 바위가 사납게 솟아 있는 협곡이거나 물결이 거친 계곡이다. 가난한 삶을 건넌다는 것이 잔도에 길을 내며 건너는 것과 같다. 가난은 죽음 위를 두렵게 건너가는 것이다.

 

거꾸로 서야만 닿는

바다 속 푸른 텃밭

수초처럼 흔들리며 갈퀴의 날을 세워

한 톨의 알곡을 줍듯

바닥을 건져 올리네

- <물숨> 부분

 

물숨은 해녀들이 물속에서 하는 호흡이다. 해녀들의 직업병인 이명이 해녀들은 괴롭힌다. 이명을 뇌신으로 다스리며 납덩이에 매달려 자맥질을 해야 살아 갈 수가 있다. “거꾸로 서야만” “바닷속 푸른 텃밭에서 생계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물숨의 길이는 정해져 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늘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바닷속에서 손을 뻗으면 전복이나 소라가 잡힐 듯해도 포기해야한다. 욕심을 부리면 순식간에 물숨이 덮쳐와 죽게 된다. 그래서 물숨은 형체 없는 킬로틴, 형체 없는 단두대다. 삶의 비유다.

 

절제가 돋보이는 서성자의 문장은 유려하고 수려하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가며 문맥을 형성해가는 수법이 자연스러워 물이 결을 이루며 흘러가는 듯하다. 시조 읽기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여행가는 날>에는 아름다운 절제가 보인다. 돌아가신 엄마를 화장하러 가는 언덕은 초가을 산벚나무 그늘/ 적당히 슬픈 곳이다. “구석으로 치워둔 엄마의 몇 계절갓 잠 깬 날짐승처럼/ 따뜻하다 아무 일 없다고 한다.

이렇게 사용하는 언어방식은 초가을이고, “적당히 슬픈 곳이고, “갓 잠 깬 날짐승이고, “따뜻하다 아무 일 없다이며, “그럴만한 사유가 없이이고, “뱉지 못한 말들이다. 서성자는 언어를 만개시키지 않고 꽃봉오리인 째로 남겨 놓는다. 확 피워버리거나 까버리지 않는다. 반절의 내보임이고, 나가다 멈추는 절제다. 독자가 시를 더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도록 한다. 시인의 표현 전술이다. <드문드문 제비꽃>도 그렇다.

 

봉분도 없는데 제비꽃이 피었다

누구의 기척일까 낮은 바람 속에

옮겨온 이삿짐 같이 드문드문 앉은 꽃

- <드문드문 제비꽃> 부분

 

봉분도 없으며, “낮은 바람이고 드문드문 앉은 꽃이다. 대상을 부정하고 작고 성근 결핍의 수식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잡아둔다. 표현기교다. 필자의 눈높이이기는 하지만, 서성자가 내놓은 시 가운데 수작은 아마 <일몰>일 것이다.

 

좋아죽겠는 사랑 하나

만들지 못하고

깨물고픈 마음 하나

돼주지 못하고

 

간다고

서둘러 붉다가

못 본 척

빙 돌다가

- <일몰> 전문

 

일몰을 바라보고 있으면 빈 저녁 하늘에 많은 여운이 남듯, 인생으로 비유되는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여운이 남는 시다. 삶이라는 게 마음과 달리 제대로 된 사랑 하나 만들지 못하거나 남에게 깨물고 싶은 마음 하나 돼주지 못하고 일몰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겹겹>에서 보여주듯 겹꽃보다 홑잎의 짙은 향이 슬퍼서/ 둘인 듯 홀로 가야할 생의 시린 발목으로 걸어가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성정현의 시는 단정한 외형과 형식이 특징이다. 그 안에 어머니를 담은 시편이 네 편이다. 역시 어머니는 모든 시인의 주요 제재다. <>에서 화자는 아직도/ 편히 안길 수 있는/ 어머니 내 어머니라고 어머니가 본원적으로 편안함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한다. <오늘도2>에서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어머니의 걸어온 말씀을 들으며// 천천히 흐르는 물에/ 커피잔 씻으며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그의 주제나 표현들은 사뭇 고전적이다. 안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낌없이 주어버려

출입마저 불편하신

어느새 칠순 넘어

가지만 남은 단감나무

오늘도

문 잠그는 소리에

밥은 묵고 다니나

- <> 전문

 

칠순이 넘은 화자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와 같이 전 생애를 아낌없이 자식들에게 주어버리고, 지금은 출입마저 불편한 몸이다. 이런 어머니는 가지만 남은 단감나무로 비유된다. 단물을 모두 자식들에게 주었으니, 지금은 단감이 열리지 않는 고목이 된 것이다. 자식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화자가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듣고 밥은 먹고 다니는지 묻는다. 산다는 건 별게 아니다. 무얼 하든지 밥을 굶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원초적인 문제를 엄마를 통해 들려준다. 이런 어머니를 위해 시인은 아래와 같이 기도한다.

 

이제야 기도합니다

등 굽은 당신을 위해

 

돌려드리지 못하는

당신의 생을 위해

 

날마다

정화수 한 그릇

가슴에 품습니다.

- <어머니> 부분

 

불교 제재를 시로 쓴 <성주사>에서 돌부처는 절을 받고/ 돌계단은 발을 받는다는 표현이 참신하다. 화자는 절을 받고 전생을 부처님께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이 대답한다. 마음이 받은 것인지, 돌이 받은 것인지? 물음에 물음을 목탁소리가 대신 답을 한다. 그리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도 조응하여 웃는다.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주고 받는 이심전심이다.

 

손영희 시의 상상력은 활달하다. 동적 심상과 위트, 잠언적 경구가 시 읽는 즐거움을 준다. 그의 시를 읽으면 인류가 시라는 물건을 잘 발명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시는 인류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물건이다. 시인은 <가을볕>에서 이렇게 감각화 한다. “들깨 더미에/ 콩 줄기에/ 늙은 부모처럼// 야위어가는/ 쭉정이와/ 알곡이/ 서로 슬픈 듯/ 어루만지는//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마루 끝에/ 고즈녘하다”(<가을볕> 전문)고 의인화다.

가을볕이 이렇다는 것이다. 가을볕이 늙은 부모처럼 야위어간단다. 가을볕이 쭉정이와 알곡이 서로 슬픈 듯 어루만지고 있단다. 가을볕이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마루 끝에 고즈녘하단다. <바다로 간 노인>에서는 몸이 기운 노인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다로 가는데 물에 담그면 곧게 펴지기라도 하는 걸까라며, “몸이 기운다는 건 허물을 벗는다는 것이라는 잠언적 경구적 상상을 한다.

 

안성디야, 영감이 아무래도 힘들 것다

그러게 말이여, 비야 오거나 말거나지

정자리 귀 먼 할매들이

부슬부슬

휘적휘적

- <오해> 전문

 

속세에 그냥 있으면 감옥 갈 일 있다 하더이다. 그래서 산에 들었소만

이 장삼이 또 감옥이라오

참 곱소

저 여인 좀 보시게

법문이 다

잡소리제

- <옥천사> 전문

 

<오해>는 귀가 어두운 노파 둘이가 동문서답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떠올라 폭소를 자아낸다. 한 노파가 자기 영감이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하는데, 다른 노파는 귀가 정확히 안 들리니까 자기가 필요한 말을 대답으로 한다.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으니 비와 관련한 얘기일 것이니 대강 짐작하고 비야 오거나 말거나걸어가자고 한다. 동문서답하며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선하다.

<옥천사> 역시 웃음을 폭발시킨다. 화자는 스님의 입을 빌려 진술하고 있다. 속세에 있으면 감옥 갈 일이 있다고 해서 절에 들어왔지만 스님들이 입는 옷인 장삼이 또 감옥이 되는 것이다. 어디에 사나 마음이 중요한 것이고 사람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절에 들어간다고 사람 본래 성품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님은 일갈한다. “참 곱소/ 저 여인 좀 보시게/ 법문이 다/ 잡소리제라고. 아무리 좋은 법문도 실제보다 못하다. 법문은 설명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게 또 시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분헌은 비물질을 물질화해서 보여준다. 관념을 사물화 하는 능력이 있다. 관념 A를 사물 B로 전환하는 시의 기본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안부 한 접시>가 모범적이 사례다. 안부는 접시에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안부라는 관념을 접시에 담아 보여주는 게 이분헌이다. 그는 화자의 입을 빌어 오랫동안 저장해 둔 살붙이 짠한 속정/ 따스한 등불 밝혀 오붓한 안부를 풀면/ 겨워라/ 눈빛 반짝이며/ 귀를 여는 환한 식탁이라고 한다.

<비빔밥 대화>는 겉도는 말의 알갱이들이나 말 비린내를 날려 보내고 눈빛 말 빛 고루 섞어/ 소담하게 담아낸// 감칠맛/ 돌솥비빔밥 같은/ 대화 한 술 뜨고 싶다고 한다. 비빔밥처럼 눈빛도 섞고 말 빛도 섞어서 소담한 밥상처럼 차려서 담아내겠다는 것이다. 감칠맛이 도는 비빔밥 같은 대화를 한 술 뜨고 싶다는 것이다. 눈빛 말 빛을 섞는다는 것도 그렇고, 소담하게 담아낸다는 것도 그렇고, 대화를 한 술 뜨고 싶다는 것도 다 사물화이고 감각화다.

 

낮익은 풍경이야, 때때로 그래왔던

주방 한 켠 앉으려니 성가신 장식이래

목덜미 덜컥 잡혀선

냉장실로 처박히는

 

꽉 닫힌 뚜껑 안에 숨조차 쉴 수 없다

창백한 얼굴빛은 누룩으로 떠버리고

실직한 어느 골방에선

식어서도 꽃인 것을

- <찬밥> 전문

 

1연은 찬밥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여주는 낯익은 풍경이다. 찬밥은 주방 한 쪽에 두어다가 냉장실이나 냉동실로 들여놓는다. 의인화된 찬밥의 입장에서는 목덜미를 덜컥 잡혀” “냉장실로 처박히는신세다. 이런 찬밥은 꽉 닫힌 뚜껑 안에 숨조차 쉴 수 없으며, 그러다가 누룩으로 떠버린다. 시인이 의도한 내용은 2연 후반부에 나온다. 이런 찬밥일지언정 실직한 어느 골방에선/ 식어서도 꽃이다. 찬밥이 꽃으로 전환된다.

 

곱게 물든 담장 위로 눈 감으면 환한 칠월

한 송이 다홍 입술 꽃 속에 활짝 피어

참아도 미어진 가슴 그 여름처럼 뜨겁다

- <능소화> 전문

 

<능소화>는 여름에 피는 꽃이다. 더위 속에서도 유독 선홍색의 꽃을 나무나 벽을 감고 올라가 피운다. 화자는 가을까지 남아 피어있는 능소화를 보고 있다. 가을 저녁나절이 되자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진다. 생각해보니 능소화가 한창이던 때 가 떠난 것이다. 지금은 사랑이 끝났다. 끝난 사랑이지만 꽃잎 떨군 잎새마다사랑했던 붉은 마음이 겹겹이 번져가고, 고요 속에서도 일렁인다.

 

임성구의 서정은 이미 문단에 정평이 나 있다. 대상을 서정화시키는 능력이 곧 시를 쓰는 능력이다. 이를테면 <꽃이 핀다>에서 시인은 음력 이월 초파일 어머니 다녀가시면/ 산에 들에 모유 냄새 뭉클한 꽃이 핀다/ 꽃이 피어서라도 젖 물리고픈 내 어머니라고 한다. 모유냄새인 후각, 뭉클하다는 촉각, 꽃으로 피어난다는 시각을 한 문장 속에 조밀하게 설계 배치할 줄 아는 장인이다.

돌아가시고 없는 어머니는 화자에게 꽃으로 피어서라도 젖을 물리고 싶어서 봄에 모유냄새가 나는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꽃을 모유냄새로 감각한 시인의 상상력이 참신하다. 어머니는 어린 새가 슬픔에 잠길까봐 어느 능선이나 절벽에 매달려서 꽃을 피워 젖을 물린다. 심지어 겨울에는 눈꽃을 피워서라도. 시인의 최종적인 의도는 후반부에 어머니, 그 꽃만 할까/ 우주를 덮는/ 향기만발에 있다. 어머니와 꽃을 등치시키고 있다. 어머니는 죽어서도 죽은 것이 아닌 것이다.

 

채송화의 출근시간은

햇살 쨍쨍한 낮 12

 

분꽃들의 출근시간은

햇살 시들한 늦은 5

 

건넛집 노래방 여잔

햇살 잠든 밤 8시쯤

 

저들은 누굴 위해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는 모습 다르지만

그 생은 또, 최선의 선택

- <꽃들의 출근시간> 부분

 

식물이 꽃을 피우는 시간은 다르다. 일조량에 따라 자기를 열고 닫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꽃을 피우는 시간이 다르면 꽃잎을 시든 듯 오므린다. 채송화는 한낮 12시쯤 피는 모양이다. 분꽃은 햇살이 시들한 오후 5시쯤에 피고. 임성구는 꽃이 피는 시간이 꽃들의 출근시간이라고 한다. 사람도 직업에 따라서 출근시간이 달라진다. 대개 아침이 출근시간이다. 시 속에 나오는 노래방 여자는 출근시간이 밤 8시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꽃을 피우는 시간과 출근시간이 다르다. 다르다고 해서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모두 최선을 선택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만물은 뿌리가 같고, 원천이 같다. 임성구의 만물에 대한 평등심이 시를 통해 발휘되고 있다. <문화동 비둘기>에서는 비둘기가 아침마다 모이 쪼며 구구구 시를쓰고, 합평을 하자고 조른다니, 의인화이기는 하지만 그의 만물 평등관은 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황영숙은 기억 속에 있는 자신의 체험적 사실과 진실을 유려한 문장으로 진술해 나간다. 진해에 있는 경화역은 운행이 폐지된 역이다. <경화역>에 섰던 열차는 현재 서지 않는다. 시인은 열차를 마술사로 비유한다. 열차가 안다니니까 경화역은 멧새와 마른 풀들이 철길을 채우고 있다. 기억이 없다면 그 사람의 과거가 없다. 그 사람의 역사가 없다. 기억은 그 사람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기억을 잘 갈무리하여 기술하고 진술하는 자다.

 

물씬, 풀 비린내가 예초기가 지나간 날

치골만 남겨진 채 지워진 오장육부

늦깎이 합평 때처럼 죄목이 낭자하네

- <바랭이> 부분

 

바랭이 풀이 있다. 생명력이 강하다. 예초기가 지나가자 풀비린내를 물씬 풍긴다. 잎들은 다 잘려나가고 아래 뿌리에 가까운 부분만 치골처럼 남았다. 마치 시창작교실에서 가졌던, 많은 표현들이 잘려나간 합평 결과와 같다. 바랭이는 시인 자신의 창작 욕망처럼 자란다. 이 시는 시 창작 과정을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예초기가 지나가는 바랭이처럼 쓴 글이 잘리고 다시 뿌리에서 시작을 반복하는 육필의 업연들흙 한 줌 바람 한 줌 문질러 시를쓴다.

상처도 곱게 아문 툇마루 골을 따라

다 닳은 승복 한 벌 허물처럼 벗어놓고

스님은 어디로 가셨나

반쯤 열린 적막 한 채

 

기다림이 발효지요, 발효가 곧 성불이지요

그 말씀 그 뜻대로 익어가는 골짜기

해종일 장독만 닦는

불두화가 사는 집

- <안국사> 전문

 

오래전 여름 필자도 가본 적이 있는 안국사가 시로 피어났다. 오래된 튓마루는 상처도 곱게 아물었나 보다. 이 골진 마루에 승복을 벗어놓고 스님은 외출중이거나 밭일을 하러 나갔을 것이다. 이를 반쯤 열린 적막 한 채라고 표현한다. 적막이 한 채라니, 그것도 반쯤 열린. 적요와 결핍이 아름답게 충돌하고 조화한다. 화자는 스님의 말을 기억해낸다. 기다림이 발효이고, 발효가 성불이라는 것을. 시적 현재에서 안국사 풍경이 그렇다. “해종일 장독만 닦는/ 불두화가 사는 집이라는 표현이 압권이다.

 

지금까지 황영숙, 임성구, 이분헌, 손영희, 성정현, 서성자, 김주경, 우원곤, 김용권의 시를 거칠게 조망하였다. 이들 시의 공통점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뭉친 동인들이어서 그런지 시의 지리적 공간으로 시인들이 거주하는 경남지역 지명이 자주 노출된다. 그리고 여러분의 시에서 불교적 제재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들은 친자연적 서정을 추구하고 있었다.

김용권은 <물금> <김해천문대>, 우원곤은 <스콜>에서 통영과 <어느 마중>에서 낙동강, <레전드>에서 봉하마을, <용지호수 25>, <오동꽃>에서 당항포, 성정현은 <간절곶>, 손영희는 <택호><오해>에서 정자리, 임성구는 <문화동 비둘기>, 황영숙은 <경화역> <회원북로> <쪽물들던 날>에서 안국사, <회산다리> 등이다. 시가 생활경험의 반영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다음에는 불교적 제재를 수용한 시들이 몇 명의 동인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도 특이한 현상일 수 있다. 김용권의 <,>, 성정현의 <성주사>, 손영희의 <옥천사> 황영숙의 <안국사> 등인데 이 부분에서 모두 높은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는 대부분 친자연적 서정을 열심히 구가하고 있다. 화초와 수목의 생태적 특성에 인사를 투영하는 방식은 오래된 창작방법 중에 하나다. 동인지를 통해 나름의 시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석필문학회 동인들의 발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