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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지 <시향> 초대 오하룡 대표시 5

 

 

진땀

 

어둡고 삭막한 길을 걸어왔다

딴 길을 걷고도 아는 길을 걸은 척 했다

멀리 두르고 둘렀는데도

지름길로 온 척 했다

손해를 보고도 오히려 이득을 본 척 했다

마음에 없으면서 있는 척 다소곳이

예라고 대답한 적 있다 아니 많다

그 말로 내가 아닌 내가 되게 했다

지금도 내가 아닌 나를

나라고 생각하면 진땀 난다

 

삼색 볼펜 한 자루의 명상

 

누가 삼색 볼펜 한 자루를 주었다 볼펜 하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끌쩍대길 좋아하는 나에게 이보다 기분 좋은 선물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볼펜은 쓰는 것이 숙명이니 쓸 수밖에 없다

많이 쓰는 검정색이 먼저 종명하고 다음으로 청색이 불려나오나

그도 제한된 수명이니 곧 종명 한다 남은 것은 빨간색, 그는 검정이나

청색처럼 아무데나 쓰면 질색인 그 성깔 덕분에 수명이 연장되는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도 볼펜인 이상 종명은 운명이다

나는 연민으로 볼펜의 종명을 챙기나 지금 나를 쓰고 있는 사용주는

종명이 가까운 나를 볼펜처럼이나 여길는지 쓰레기통에 던지기 직전의

내 지금 가냘프게 떨리는 순간이여

 

사모곡思母曲

 

창원군 웅남면 외동리 성산부락 들먹이면 금방 가슴 절여오느니 예닐곱 살 무렵 그 동네 이름 개천 이름 들판이름 정자나무 이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먹먹해 지느니 스물 몇 젊은 여자 아들 하나 어찌되던 키우려고 벽촌 중 벽촌 한 호부라비에게 재취 가던 날 그 여자 어떤 표정이었을지 멀찍이 그 여자에 비친 어린 아들은 어떻고 그 아들에 비친 여자는 어떻고 아무리 쥐어짜도 상상 닿지 않을 뿐이나니 그리하여 그 아들 열 몇 살 되어 넓은 세상 나서던 날 어두운 새벽 찬바람 부는 상남역 저쯤에서 여자 얼굴 점점 더 작아지느니 그 얼굴에 비치는 아들 얼굴은 어떻고 그 아들에 겹치는 그 여자는 어떤지 그 모습 지금도 어른거려 아련해 지느니 지금 그 아들 칠순 넘었어도 그 여자 생각하면 이리 눈물 마르지 않느니

 

 

김경윤

그는 김경윤입니다 그와 어머니는 서른 살 차이고 나와는 쉰 살 차이였습니다 나이 따위 세상을 알고 난 후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나이가 걸리적거리던지 두 분 사이 어색히 여긴 일 지금도 사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떻든 이승의 한 갈래 길에서 어머니는 그의 팔을 잡게 되고 나도 그냥 그의 한쪽 팔을 잡고 동행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시원하게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른 해를 한참씩 딴 길을 가다간 다시 합류하고 딴 길을 가다간 합류하다가 그는 여든다섯에 이승을 떠나고 어머니도 그로부터 열두 해를 더 보내고 예순아홉에 떠났습니다 지금 호젓이 그와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그들과 동행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되새겨 보고 있습니다 나와 동행이어서 그의 발걸음이 허둥거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환생

-불두화

 

친가도 외가도 없는 나에게

어릴 적 덤정 할머니는

외할머니고 친 할머니였네

 

덤정고개* 넘어 먼 길

할머니 찾아가면

앵두도 따주고,

고구마 감자도 캐어 삶아주고

사랑 받았네

 

철이 들어 그 할머니가

27살 내 어머니 57살 홀아비에게

자식 낳아주라고 개가시킨 사실

눈치 챘지요

 

발길 끊어버렸지요

최근 통도사로 문학기행 간 길에

우연히 숲속에서

한 그루 불두화로 핀 할머니를 만났지요

 

어찌나 미안하고 반갑던지

그날 아무 말 않고 고개 숙인 채

할머니와 놀다 돌아왔지요

 

 

*지금 창원 가음정이 옛 덤정으로, 성산마을에서 가음정으로 갈 때 못안 마을을 거쳐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음. 그 고개를 덤정고개라 불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