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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천 시인의 사향(思鄕)의 진수(眞髓)

-시집 고향 가는 길에서를 중심으로

 

오하룡(시인)

 

 

 

 

 

 

시인에 대하여

 

도리천 시인은 스님이다.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참선 정진할 때 방석 하나가 다 떨어질 정도로 공부에 탐닉하기도 한(수필 눈 속에 핀 칡꽃 3) 골수 스님이다. 이런 인연으로 하여 10여 년 전 쌍계사 주지로 발령이 난 일이 있었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고 지금의 약수암에서 그대로 칩거를 고집하는 사실을 필자는 알고 있다.

이런 그가 최근 펴낸 시집(섬 초롱꽃, 꽃처럼 향기처럼)에서는 겸손하면서도 스님임을 내세우는 것을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의외로 생각 했다. 자랑스러운 <불교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사실도 약력에서 표시하는 것을 사양하는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자신의 거처지인 약수암의 표시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작품은 범종교적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폭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칫 자신의 종교가 독자들에게 불편을 주거나 부담이 되지 않아야 하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승려(스님)’를 내세우고 불교신문 신춘문예, 특정 종교신문 당선 등을 내세우는 것은 작가 스스로에게는 긍지이고 신념일지 모르나 종교가 다른 독자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이질감 혹은 거부감을 줄 수 있다. 이로 하여 자신의 작품이 오히려 외면 받게 되거나 기피되는 빌미가 된다면 그것은 전혀 작가의 본의와는 다름을 잘 알기 때문으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 상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어, 필자가 쓰는 분야는 아동문학의 한 부분으로 동시 분야로 한정하나, 그는 폭넓은 작품 세계를 갖고 있다. 앞의 작가의 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에는 동시창작에 전적으로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스님은 필자에게 초기의 아동문학 서적은 작품 목록에 넣지 말도록 요망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다소 불만이 남는 수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스님의 작품세계의 한 부분을 정리하는 집필자로서 이미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치된 자료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다소 미숙(?)하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창작 당시 작가의 감성의 중요성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 같아서 수록을 고집한다.)

 

첫 작품집인 1987년의 <초록빛 풍선>을 시작으로 2000년 간행의 <고향 가는 길에서>까지 13년 동안 펴낸 10권의 책은 동시집혹은 시집이라는 표시를 하였으나 통틀어 거의 동시계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만큼 동심 영역인 아동문학, 즉 아동대상 작품에 집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집중 조명 예정인, 시집 제목이면서 작품인 <고향 가는 길에서>는 어디 한 군데 종교적인 색채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특정종교와 상관없는 유연하면서도 포괄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사유와 순수한 자연과의 관류(貫流)를 통한 깊은 사색을 바탕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1993년에, 앞서 발표했던 작품들을 선별하여 코스모스 꽃씨를 받으며(도서출판 경남)라는 제목의 선집을 펴낸다. 그는 이 선집의 머리글에서 동시 167, 동요 시 26, 동시조 199, 시조 15, 자유시 16, 수필 27편 총 450편을 한 곳에 모아 한 눈으로 눈여겨 볼 수 있게 꾸몄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다. 수필 27편이 함께 담긴 것이다. 그러니까 동시(동시조, 동요 포함), 시조, 자유시에 수필까지 쓰고 있으니 그의 문학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작가는 시조는 물론 자유시담시(譚詩-기이한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창작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따라서 도리천 작가를 제대로 집중조명하려면 이처럼 그의 문학 전 장르가 포함되는 것이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고향 가는 길에서>의 의미

 

언젠가는 그의 문학에 관심을 가진 여러 평자에 의해 그럴 기회가 자연스럽게 오리라 믿는다. 작품 <고향 가는 길에서>에는 시조적인 요소와 동시 동요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장르의 성격에서 이것이다동시, ‘시조다 라고 단정적으로 규정짓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필자가 아동문학 영역의 동시<고향 가는 길에서>를 언급하는 자세를 취해도, 내용에서 보면 어른의 동심이 쓴, 어른이 화자(話者)가 되는 동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보다 분명함을 욕심 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건 독자뿐만 아니라 도리천 시인 자신도 못 마땅할 수 있으리라는 염려를 갖는다.

앞으로 다른 각도에서 어떤 이는 시조로 접근하기도 할 것이며 혹은 동요, 동시로 어떤 이는 현대시의 정형시로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평자에 따라서는 개별 작품별로 작품으로서의 질적 평가를 벌이려고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편의상 필자 나름의 자의적 시각으로 내용(의미) 위주의 동시로 접근하는 것에 이해되기를 바라는 마음임을 밝힌다.

동시라고 규정짓는 것도 간단하지 않음을 안다. 아이가 천심으로 쓰는 시, 어른이 동심으로 아동을 대상으로 쓰는 것일 수도 있고, 어른이 아동과 어른을 대상으로 폭넓은 독자를 의식하여 쓸 수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시를 동시(더욱 유아시라 부르는 장르도 나타나고 있다) ‘자유시니 세분화하는 나라도 일본과 우리나라뿐이라는 세평인 것을 감안한다면 굳이 고정된 틀에 매여 작품을 보는 족쇄를 우리 스스로 차는 어리석음에서 과감히 탈피하는 노력도 시도해 봄직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고향 가는 길에서를 읽다보면 특히 이 작품을 굳이 시조니, 동시조니, 정형시니, 동시니 하고 분리하여 보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필자로서는 이것저것 잡념을 떠나 그냥 얌전하게 동시로 잣대를 대보는 것이다. 동심의 아이들로서는 다소 작중의 투박한 어른화자의 목소리에 거부감이 있으리라는 짐작도 든다. 다만 고향이 어른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미리 곁눈질 해보는 것으로도 미래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발언해 보고 싶다.

 

시집 고향 가는 길에서2000년 처음 문성사 판으로 발간된다. 이 시집은 필자가 구해보지 못해 몇 편이 실렸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93년의 선집 코스모스 꽃씨를 받으며에 실린 고향 가는 길에서편에 동시조로 분리되어 199편이 담겼던 것을 생각하면, 이를 포함하여 적어도 300여 편은 넘게 담기지 않았을까 짐작이 된다. 같은 제목으로 2002년에 나온 도서출판 경남 판의 고향 가는 길에서426편을 담고 있어 이것이 이때까지 쓴 고향 가는 길에서의 결정판인 동시에 전집 성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시집에서 작가 스스로 머리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향 가는 길에서의 이 시는 3행 시조로서 가능한 쉽게 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십년 명상 속에서 찾아낸 내 영혼 426가지의 빛깔의 모습인 것이다. 아울러 어린이들의 이해 능력에 맞도록 형태와 내용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시를 짓다보니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지어진 부분도 다소 있긴 하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읽든 성인들이 읽든 누가 읽든 간에 시로서의 모양이 갖춰져 있다면 괜찮다고 보아진다.’

 

라고 부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동심을 담은 어린이를 염두에 둔 동시영역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반응이 경직될 것 같지는 않아 안심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고향 가는 길에서를 쓴 계기를 역시 이 머리글에서 간추려 놓고 있다.

 

우리들의 고향은 예부터 농어촌 시골과 두메산골이다. 농어촌 시골과 두메산골 옛 고향을 떠나 새로이 타향에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고향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고향에는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인정과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정겨운 이야기가 있다. 도시 생활의 고달픈 삶의 끈을 풀어놓고 모처럼 고향에 돌아오면 마음의 평화와 몸의 자유를 얻어 큰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고향은 있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울까. 오늘 그분들과 함께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시를 지어 이 시집을 펴내게 되었다.’

 

어린 시절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출가하여 승가에 입적한 스님의 경우, 그들의 고향은 일반인이 의식하는 고향과는 또 다른 고향일 수 있다. 그들의 이향(離鄕)은 일단 정든 가족과의 절연(絶緣)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고향이다. 그러나 수도(修道)를 목적으로 출가한 스님은 스님이 되어서도 그립다고 갈 수 있는 고향이 아니다.

스님들의 고향은 더 절실하고 애틋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리천 스님의 고향 가는 길에서의 중요성이 돋보이고 더 관심을 갖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지금은 고향의식이 재편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국민의 70~80퍼센트가 도시권에서 출생해서 성장하고 그 도시에 주저앉아 평생을 보낸다. 그렇게 보면 도리천 시인의 고향 가는 길에서는 고향 없는 세대 내지는 고향을 잃어버린 세대의 책으로 만나는 고전으로 평가되리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 각별한 의미의 책이 될 것이다.

 

 

작품 고향 가는 길에서의 기승전결(起承轉結)식 접근

 

작품 고향 가는 길에서는 올해 두 번째로 나온 시집 꽃처럼 향기처럼에서도 126편이 담길 정도로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어디가 시작이며 끝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아니 굳이 분간할 필요도 없다. 작품 한편 한편이 분명한 자신의 역할 빛깔을 선명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작자도 굳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고향을 찾으며 고향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만() 사람을 대신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만 사람이 각자 고향을 생각하고 찾으면서 하는 감상의 푸념이며 노래이다. 거기 어디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겠는가. 그러나 미련하게도 필자는 첫머리에 해당하는 내용을 만나려고 조금 뒤적이는 수고를 해본다. 그럴수록 그것이 얼마나 무망하고 허망한 짓인 줄 깨달으면서. 말하자면 다음 몇 편으로 기() , 시작으로 삼아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길이 많아 어딜 가나 길을 가네

사람마다 삶을 위해 숱한 길 오가지만

고향에 가는 길보다 더 좋은 길 아예 없네

 

대표작 1의 작품이다. 세상에는 길이 참으로 많다. 삶의 길이니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는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길이 고향의 길이라고 못 박는다. 고향을 떠나 살아 본 사람만이 알고 느끼는 사실이다. 도시 사람들이야 설사 떠나 살더라도 도시에서 도시로의 떠나 사는 삶에 서는 도저히 감조차 잡히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 동시다운 내용으로 접근하기 위해 지금의 시조 형식을 바꿔보는 시도를 해 보는 것도 이 작품을 보다 재미있게 보는 방법이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다시 조립해 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길이 많아

어딜 가나 길을 가네

사람마다 삶을 위해

숱한 길 오가지만

고향에 가는 길보다

더 좋은 길 아예 없네

 

이렇게 4.4조 가락의 정형시로 조립하면 영 새 맛이 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다만 이런 형식 바꾸기는 작자의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므로 여기서는 필자의 자의적인 시도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군소리가 되겠지만 요즘 현대시조라는 이름의 일부 시조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전통 시조형식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에 기를 쓰는 것 같은 경향을 볼 수 있다. 자수만 맞추면 형식은 어떻게 해도 된다는 식으로 파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유시와 구분이 안 될 정도이다. 그럴 바에는 왜 시조를 쓰는지 회의가 될 정도인 것이다.

다음의 예문도 마찬가지로 앞의 작품 1같이 대하면 될 것이다.

 

고향 가는 길에서는 푸른 하늘 보며 가자

하늘보다 더 높고 하늘보다 더 넓은

부모님 드높은 은혜 우러르며 고향 가자

 

대표작 2이다. 고향 중에도 시골 고향사람만이 느끼는 내용이다. 시골 중에서도 산골 고향을 둔 사람들에게 더 절실한 내용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부모님의 은혜가 더 간절히 체감된다. 어찌 고향 가는 길이 그냥 무심한 걸음일 수 있는가. 푸른 하늘같은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며 고향을 찾자고 작중 화자는 속삭인다. 그냥 고향을 찾는 게 아니다. 효심 가득한 인간의 도리를 깨닫자는 것이고 그래서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효심을 기리는 길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읊고 있는 것이다.

 

내 고향 산골마을 누가 여기 터 잡았을까

냇물 좋고 경치 좋고 농지 좋아 살기도 좋은

태초에 우리 선조님이 여기 터 잡으셨네

 

대표작 3이다. 고향을 찾다보니 새삼 고향이 자리한 터전 생각이 난다. 누가 이런 잊지 못할 좋은 위치에 고향을 마련했는가. 고향을 돌아보니 고향 앞을 흐르는 냇물도 예사 냇물이 아니고 농사를 짓는 농토도 보니 예사 농토가 아니다. 생각할수록 이런 위치에 고향을 자리 잡게 하신 조상님들이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사람마다의 고향이 다 좋은 위치 좋은 농토로서 짜여질 수는 없다. 실상 그런 완벽한 고향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떠나 사는 출향인의 눈에는 그 고향의 어떤 것도 다 좋아 보이는 그 심리적 환치 현상이 이렇게 읊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낳은 엄마는 비록 미인이 아니어도 아름답게 인식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고향 가는 길에서는 시 한 수 쓰며 가자

산꽃 향기 들꽃 향기 풀잎 내음 그리고

흙 내음 물씬 풍기는 그런 시를 쓰며 가자

 

대표작 4이다. 시인은 그냥 고향 그리움에 매몰되지만은 않는다. 여기에 이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냉철한 의식이 드러난다. 그리운 고향일수록 그냥 무모한 인정적 만남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고향은 돌아서면 금방 잊혀지는 고향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품으로 써야 한다. 시인의 고향 가는 길에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고향 가는 길에서느끼는 벅찬 이 감동을 자신만이 누려서는 안 되겠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지금의 자신과 같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러니 작품으로 남기자라는 발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소 무리인줄 알지만 승()과 전()으로 여기는 부분으로 넘어가 보자. 대표작 9~36까지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억지를 부려본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5~8의 내용에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고향에 가는 날은 기차를 타고 가자

철길 따라 펼쳐지는 산과 바다 그리고

고운 손 흔들어 주는 아이들을 보며 가자

 

대표작 5이다. 지금은 아무리 벽지 고향이라도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어느 지점까지는 이런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 다음부터는 산을 넘고 내를 건널지언정 얼마나 그리운 교통편이던가. 여기서 굳이 기차를 들먹이는 건, 고향에 가고 싶긴 하나 가지는 못하고 멀리 오가는 기차를 보면서, 그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그 그리움을 해소하던 말 못할 안타까움이 있어서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에겐 얼마나 절실히 다가가던 덜컥대는 기차소리며 기적소리던가. 그러니 기차를 타고 가자고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그리움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천천히 음미해보며 고향에 가자는 것이다. 아이들이 기차를 보며 철없이 반가움을 표하는 그런 동심의 정경에 잠시 잠겨 보자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석탄을 태워 증기 힘으로 달리던 칙칙폭폭하는 기차가 사라지고 지금은 전기 혹은 기름엔진으로 움직이는 첨단 열차가 달리고 있다. 기차의 정서는 열차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내 고향 산마을이 왜 저리 고요로울까

사람이나 초목이나 산과 들 바위들이

모두 다 명상에 잠겨 깊은 적막 감도네

 

대표작 6이다. 고향이 다 활기 넘치고 오랜만에 고향 찾는 사람에게 살갑게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더욱 지금의 농촌 고향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대부분 농촌의 벽지인 고향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잘사는 도시로 사람들이 떠나고 보니 고향은 텅 비어 가는 것이다. 고향을 감싸고 있는 자연까지도 명상에 잠긴 듯 썰렁하다. 일부이긴 하나 그것이 고향의 한 정경임을 그리고 있다.

 

고향 길 걸어가면 누가 나를 반겨줄까?

풀숲에 풀벌레가 풀꽃 깃발을 들고

길 따라 고향 집까지 꽃노래 불러준다.

 

대표작 7이다. 고향이라야 집이나 덩그렇게 남아 있고 거기 살던 사람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부모들은 세상을 다 떠나고 형제들은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진 지 오래다. 옛날 고향일 리가 없다. 그런 고향에선 풀꽃이나 풀벌레만 보일 뿐이다. 이런 미물들이 어찌 고향 찾는 사람에게 반가움을 표하기나 할 것인가. 작중 화자는 억지로 자신을 이들 자연이 반갑게 맞아준다고 위안을 삼는다. 이것이 시심(詩心)이고 문학의 문심(文心)이 아니랴.

 

고향은 자석이요 나는 한 조각 쇠붙이

타향에서 오래도록 정 붙여 살고 있어도

마음은 늘 고향으로 스르르 이끌려 간다

 

대표작 8이다. 고향을 왜 찾는가. 무엇이 못 견디게 고향을 의식하게 하고 찾게 하는가. 알고 보니 고향은 자석 같은 것이다. 그리고 라는 나는 고향을 떠난 존재로 자석이 끌어가기를 바라는 쇠붙이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고향이라면, 이처럼 못 견딜 정도의 상대적 상호 연대를 기질 수 있는가. 따라서 이 작품은 고향 존재의 중요성을 잘 상징하는 절편(節篇)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결()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더듬어보자.

 

어젯밤 내 꿈속에 어머니 오시었네

저승에서 여기까지 저리가 아득히 먼데

이곳을 어찌 아시고 내 처소에 오셨을까

 

대표작 37이다. 고향의 절정의 순간을 장식하는 존재는 단연 부모님이다. 부모 중에서는 단연 어머니다. 이미 흙 되신 지 오래된 어머니는 아무리 그리워도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애태우며 그리게 된다. 이제 고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세월이 오래 흐르면 어떤 고향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것이 사람의 세계다. 어쩌다 꿈속에서 만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고향 그리움을 해소할 뿐이다. 그리운 어머니라서 그런 어머니는 장소불문 시간불문 그리울 때는 아무데서나 환영처럼이라도 나타나면 좋으련만, 꿈속에서만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가 나타나면 그 어머니가 어디서 오셨는지 안다. 그 먼 저승에서다. 사실 저승이 있는지 영혼이 있는지 그것은 지극히 미지의 세계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믿고 싶고 있다고 믿으니 위로가 되고 있다. 그러니 더 안타깝고 반갑다. 꿈속의 어머니지만 어머니가 나타나면 그곳이 고향이 되는 것이다.

 

오실 때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는데

가실 때는 온몸에 눈물이 젖어 있었네

그래요 꿈이나 생시나 이별은 슬픈 거지요

 

대표작 38이다. 생사를 초월한 신 같은 존재()로 저승에서 오셨으니 그까짓 이별 혹은 슬픔 같은 감정이 생기거나 거추장스럽게 무슨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을 것인가. 이승과는 다른, 아예 감정 따위 같은 것이 없는 무념무상의 만남이고 이별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여라. 저승으로 떠나는 어머님과의 이별도 이별은 이별이다. 눈물이 나고 슬픈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은 어쩌지 못한다.

 

예전엔 길을 가다 내 이름 부른 이 있어

누가 나 부르는 가 뒤돌아서 보았더니

이웃집 할머니께서 나는 알고 불러주셨네

 

대표작 39이다. 삶이란 이웃과의 교류이고 존재의 확인이다. 아는 척하고 인사 나누고 부르면 돌아보고 하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꼭 남다른 특별한 만남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상적이고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만의 지속적인 만남이면 좋으련만 삶은 지극히 평범에서 시작되고 평범의 나날이고 아무도 부르지 않으면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다.

 

요즘은 시내 거리 나 혼자 걸어가도

아무도 부르는 이 없어 돌아볼 일이 없네

마지막 그날도 나는 부른 이 없이 그냥 가겠네

 

대표작 40이다. 아무도 부르는 사람 없고 돌아볼 일 없으면 각오를 해야 한다. 죽는 날까지 주변에 사람들이 북적거릴 거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 , 하는 사이 혼자 저승길로 떠나는 것이다. 쓸쓸하고 외로워도 그것이 인생의 길인 것이다. 시인은 뻔히 아는 인생이지만 이처럼 반추하여 깨달음의 깊이를 사유하고 있다.

 

시인 도리천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점점 관심이 멀어지는 고향 가는 길에서를 통해 고향의 진면목을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정겹고 색다른 고향으로 부각시켜 삭막한 인생에서 보다 맛깔스런 고향이 되게 할까에 집념으로 솔선 진력해 온 것이다.

도리천 시인에게 고향은 고향만의 고향이 아닌 인생의 길인 것이다. 그 인생의 길을 고향 가는 길에서자신의 말대로 영혼의 빛깔로 채색하며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근 1,000편 가까이 고향 가는 길에서를 창작하였으니 1,000가지의 영혼의 빛깔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고향 이야기가 천 가지만 있으랴. 도리천 시인의 이 글쓰기 작업은 앞으로 누구든 함부로 넘보기 어려운 그만의 엄중한 문학적 업적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인생에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란 존재가 어떤 것인가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흔치 않는 지침서가 될 것은 불문가지인 것이다. 또한 고향 가는 길에서란 말만으로도 요즘 말로 삶에 힐링이 되는 기능을 하게 되리란 기대를 하며, 후세 평자들에게는 고향 의식의 세분화 혹은 전문화 영역으로까지 확장 되게 하는 귀중하고 각별한 소재의 대상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