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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이상용 희곡집 <고모령에 달 지고>

 

 

마산에서 활동하는 연극인 이상용 작가가 희곡집 <고모령에 달은 지고>를 상재하였다. 이 작가는 이미 에세이집 <내 인생을 연극이다>, 마산연극제 25년사 <부활>, 마산 야사 <창동영화> 등을 펴낸바 있다. 이번 책은 최초의 이 작가의 희곡모음 집이다. 이 작가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경남대 영어교육과를 나와 영남대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훼얼리 디킨스대학에 수학하였다. 1971년 연극에 입문하여 직접 '울타리' '부부' '불모지' 등에 출연하였으며 '공모살인'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황제 존스' '노병' 등을 연출하였다. 1989년부터 전국 최초의 국제연극제인 '마산국제연극제'를 지금까지 개최해 왔다. 1985년부터 '극단 마산' 대표를 맡아 33년간 129회의 공연을 이끌었다. 1993부터 10여년간 일본 중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한바도 있다. 한국연극협회 이사, 전국연극인협의회 회장, 경남연극협회 회장, 마산예총회장, 경남대문화콘테츠학부 겸임교수를 지냈다. 전국연극제 희곡상, 한국연극예술상, KNN문화대상, 경상남도문화상,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2, 문화관광부장관상 1, 경남연극제 대상 7회 등을 수상하였다.

 

저자 이상용 연극인

 

책의 내용

 

*삼각파도

*진주성

*아, 315 그날

*흔들리는 항구

*징소리

*고모령에 달은 지고

 

 

추천의 글

지역 연극의 든든한 버팀목

 

경남 연극의 희망 이상용에 대하여

유민영(단국대 명예교수)

 

 

 

가뜩이나 가난했던 나라가 동족 전쟁으로 더욱 황폐화됨으로써 연극이라는 놀이문화가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던 1970년대 중반에 국호까지 붙인 대한민국연극제 시행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연극 진흥책이었다. 그런데 몇 년간 진행되는 동안 지방 연극단체는 대구에서 온 단 한 극단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대한민국연극제가 아니고 서울연극제가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지방 연극의 육성책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연극제를 서울과 지방으로 이원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힘을 얻게 되어 1983년부터 전국지방연극제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연극제의 이원화를 강력히 주창했던 필자가 제1회 부산대회부터 참가하여 10년 이상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심사를 해보았기 때문에 지방연극의 실정과 발전과정을 소상히 알 수가 있었다. 솔직히 필자는 심사를 다니는 동안 처음에는 너무나 열악한 조건의 지방에서 연극이라는 놀이문화가 싹이 터서 자라날 수 있을까를 회의했었다. 왜냐하면 연극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인적 물적 인프라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즉 변변한 공연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연극인도 관객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호사취미로 연극을 부업으로 해보겠다는 몇몇 딜레탕트들과 아마추어 극단이 대·중 도시에 몇 개 있기는 했었다.

그래서 지방연극제 초창기에는 도와 시를 대표하는 급조된 단체들이 마지못해 경연에 참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정치·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인구의 도시집중화와 대학들의 급팽창 등으로 인하여 어엿한 공연장들이 세워지고 연극인들도 많이 배출됨으로써 인적·물적 인프라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령 지방연극제가 시행 35년 만에 서울연극제와 통합하고 대한민국연극제로 되돌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지방 연극이 성장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지방 연극이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가는 전국연극제에 참가하기 위해서 각 광역시·도마다 치열한 예선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만큼 한 극단도 없었던 시·도마다 십여 개에 가까운 단체들이 생겨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웬만한 소도시에도 극단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수준 또한 괄목할 만큼 향상되어 연극제 통합 이후에 대상을 지방단체들이 가져갔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하겠다.

지방 연극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 견인牽引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반드시 존재했다. 가령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볼 때, 부산의 전성환 형제를 비롯하여 경북 포항의 김삼일, 대구의 이필동·이국희, 경주의 이애자, 경남 통영의 장창석 형제, 마산의 이상용, 거창의 이종일, 광주의 박윤모·정철, 목포의 김창일, 전북의 문치상, 인천의 김종원·윤조병, 경기의 이재인, 강원 춘천의 최지순, 속초의 장규호·신원하 등이 기억된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훌쩍 자란 지역 연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지역 연극의 선구자들인 이들의 공통점으로서는 인적·물적 자원이 없었던 지역에서 연기, 연출, 극작, 무대미술, 거기다가 마케팅까지 담당하는 1인 다역多役을 했거나 지금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산의 이상용李相龍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는 배우로 시작하여 연출, 극작, 마케팅 그리고 아카이브까지 전담하고 있는 연극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 여러 해 동안 써온 30여 편의 작품 중에서 6편만을 골라 첫 번째 희곡집을 상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용을 모르는 지역연극인은 별로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중앙에 와서 연극을 해도 손색없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장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고집불통의 지역 연극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외에도 애향심이 강한 지역 연극인들은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의 지역 지킴은 별다르다. 그가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극단 명칭부터 마산이고 그가 쓴 희곡의 상당수도 마산의 역사와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근자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고학력 시대에 맞춰서 상당수가 Ph. D.(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뛰는 배우나 연출가들은 솔직히 그런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현장 연극인들 대부분은 그런 학위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용은 지역 연극인으로서는 드물게 배우로 시작하여 연출, 극작, 연극운동가로 활동하면서도 Ph. D. 학위 소지자다. 그는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올 정도로 부지런하고 맹렬한 학구파 연극인이라는 점에서 돋보인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임에도 그의 독서량은 만만치 않다.

따라서 그의 희곡도 아마추어리즘의 지역 작가들과는 많이 다르다. 상당수 작가들이 무대를 모르고 희곡을 쓰기 때문에 문학성은 있어도 연극성이 떨어져서 공연할 때는 손을 많이 보아야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곧바로 무대에 올려도 괜찮다. 그는 희곡이야말로 움직이는 문학양식으로서 무대에서 완성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작품을 쓰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대학시절에 셰익스피어 연구로 명성이 높은 배덕환 교수로부터 연극의 기초를 제대로 배운 데 따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그동안 자기 고장의 역사와 인물들을 작품의 제재로 삼아왔기 때문에 독특한 방언을 적절히 활용하지만 매우 세련되게 언어를 조탁彫琢하여 서정적 시어詩語로 만들어내는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평생 모델로 삼고 있는 유진 오닐의 영향을 받아 인생의 덧없음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령 고모령에 달지고같은 작품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가 해안가에 살고 있는 만큼 연륜이 더해 갈수록 자연과 인생에 대한 성숙된 작품을 쓸 것 같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유진 오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첫 번째 희곡집 상재를 축하한다.

2019  2

 

 

작가의 글

연극으로의 긴 여로

 

이상용

 

 

나는 사석에서 종종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 “아무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또 아무 영문도 모르고 연극을 시작했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데, 사실 그 말은 나의 진담이랄 수 있다. 19713, 뚜렷한 목표도 없이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난생처음 연극을 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나의 운명적인 연극으로의 긴 여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험난한 연극으로의 가시밭길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계산해 보니 올해로 48년이란 기간이다

나를 이렇게 돈 안 되는 연극판으로 이끈 장본인은 대학 은사였던 배덕환과 한기환 두 분 교수였고, 전공은 각각 셰익스피어와 영미희곡이었다. 나는 무슨 거창한 목표를 세워놓고 연극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한두 번 해 본 연극 때문에 연극판에 발을 담근 후 지금까지 평생 동안 연극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참으로 세상물정 모르는 놈이다. 처음엔 배우로, 다음엔 연출로, 그 다음엔 극단 대표와 제작자로, 또 때로는 연극운동가와 희곡작가로, 질곡의 연극판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해 온 세월이 어느덧 반세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연극 활동을 해 오면서 조금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연극에만 매진해 왔기에 아직도 연극인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듣기 좋은 말로 연극인으로서 사는 모습이 부럽다고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참으로 바보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만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내가 처음 연극을 시작했던 곳이 마산이고, 현재 나의 활동무대도 마산이다. 그리고 내가 대표로 있는 극단 이름도 극단 마산이다. 그만큼 마산을 아낀다는 의미도 되겠다. 주지하다시피 마산은 자타가 인정하는 예향이랄 수 있다. 문학의 이은상, 무용의 김해랑, 음악의 조두남, 미술의 문신, 연극의 이광래·배덕환 등등 기라성 같은 예인藝人들이 마산 출신이거나 마산을 무대로 활동한 분들이다. 그런 예향에서 연극을 한다는 자부심은 처음부터 들었던 것은 아니고 나이가 한참 들고 난 후에야 들었음을 고백한다

이 희곡집을 내기까지에는 제법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무슨 유명 작가도 아니요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도 않았음은 물론 내가 희곡집을 낼 만한 자격이 있나 하는 의구심이 항상 뇌리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 지인들의 권고도 있었거니와 그동안 내가 써놓은 희곡이 30여 편쯤 되며, 그중에서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 5편이나 되기에, 이미 공연된 희곡을 책으로 묶어 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첫 희곡집을 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이 희곡집에 실린 작품 중에서 삼각파도진주성으로는 전국연극제에서 각각 희곡상을 받았고, 나머지는 경상남도연극제에서 공연되었던 작품들이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혼자서 원고지와 씨름하기보다는 연극현장에서 공연을 위주로 하는 작업을 더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극작보다는 배우와 연출 그리고 극단 대표로서 활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또한 한국 연극의 지평을 외국으로 확대시키는 작업에도 남들보다 앞장섰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마산에서 국제연극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이 연극제가 올해로 30여 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며, 우리 극단이 지난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일본 순회공연과 중국 공연을 가진 점, 그리고 아시아 최초로 이아타aita/ iata 세계연극제를 개최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 희곡집의 추천사를 흔쾌히 써 주신 한국연극학계의 대석학 유민영 박사님과 내가 졸저拙著를 낼 때마다 거액의 출판비를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 주신 양제兩弟, 경남신문사 최광주 회장님과 김동구 변호사님께 만시지탄이지만 이 지면을 빌려 깊은 감사를 드리며, ‘도서출판 경남에도 감사를 드린다

201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