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수 시론/ 회억, 무위자연의 흐름미학 -석성환
회억, 무위자연의 흐름미학
—김만수 론
석성환(石成煥)/문학박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시조(時調) 혹은 시조(詩調)는 자유 속의 질서를 추구하면서 시적 틀을 견지하는 장르이다. 시조시형이 견지하는 질서란 곧 자유로부터의 정형이며 자연적 서정의 미학이다. 시적 정형성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수용이며, 살아있는 질서를 지향한다. 김만수는 이러한 무위적 시각화에 의한 시적 지향성을 추구하는 시인이다. 그는 이 세계에 머무는 모든 자연적 존재와 담론에 대해 새로운 서정이 있는 흐름미학의 사고(思考)를 멈추지 않는다. 이는 그가 무려 30년 동안이나 청소년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친 일과 무관하지 않으며, 대학원에서 ‘정지용 시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학구파 시인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시집 「흐름 속의 노래」는 김만수 시인이 여러 잡지에 발표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만남, 흔적, 자연(꽃), 신앙 등”의 작품을 한데 모은 정형시집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이 시조집이 우리 고유의 문학인 시조의 저변확대와 그 영토를 넓히는데 이바지하고, 시조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길라잡이가 되길”바라고 있다.
흐름 속의 흐름
가도 가도 만나는 길 아득한 태백 줄기
굽이치는 골골 마다 푸른 등 켠 그림자들
아낙네 애잔한 정한 서럽도록 그립다.
작은 가슴 무거운 세상 가볍게 놓고서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비바람 몰아쳐도
흰 햇살 고개 넘듯이 아라리 넘어 가다.
시름 한 사발 들이켜고 목청껏 불러보다
매운 아라리 한 가락 흐름 속 흘러가는
간이역 열차 길 따라 풀려나고 싶어지다.
산골짝 벌어진 틈새 언 듯 언 듯 보이는 달
이 물 따라 서면은 정선 가서 젖어드는
강물 위 동백꽃 사랑 아리아리 아라리요.
―「강원도 정선(旌善) 별곡」 전문
위 시조시편은 지나버린 세월을 지금 시대로 현재화한 작품이다. 이러한 시적 발현은 시인의 무위자연에 닿은 흐름의식으로부터의 시적 산물이다. 위 시편의 첫 수(首)에서, “가도 가도 만나는 길”은 “굽이치는 골골”에 닿아 ‘서럽도록 그리운’ 감정을 살려준다는 점에서 흐름이 있는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둘째 수와 셋째 수에서, “아라리”는 “무거운 세상”을 들어올리며 “흐름 속 흘러가는” “간이역 열차 길”이 된다. 시인은 “언 듯 언 듯 보이는 달”과 동행하며 아우라지 “강물 위 동백꽃 사랑”을 세월에 되감아 “아리아리 아라리”라는 무위적 가락으로 풀어낸다. 여기서 ‘아라리’는 곧 ‘정선아리랑’ 그 자체임은 물론이다. 이는 정선아리랑을 ‘아라리타령’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아라리’가 ‘아리랑’의 어원이라는 점으로부터 정선아리랑의 기원을 더듬을 수 있다.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이다. 정선아리랑은 ‘아라리’ 또는 ‘아라리타령’이라고 불러진다는 점에서 ‘아라리’는 곧 “아리아리 아라리”에서처럼 흐름 속을 흐르는 가락이다. “흰 햇살 고개 넘듯”이 넘어가는 ‘아라리’야말로 “흐름 속 흘러가는” 세월의 노래로 각인된다. “가도 가도 만나는 길”을 흐름 속의 흐름으로 인식하는 시인의 시적 안목이야말로 아라리의 가락마냥 순수하다. 이런 점에서 “아리아리 아라리”는 김만수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무한적 세월을 노래하는 흐름 속의 흐름으로 상승한다.
눈물 머금은 사랑이 이슬로 젖어 있는
에이는 깊은 가슴 절벽에 가로 놓인
이 한 밤 달 바라보는 상사화로 피어나다.
싸리 골 동백꽃이 다 떨어져 쌓이다
타서 한 줌 재로 남아 물길 곱게 어려서다
강물 다 불러서 모아 ‘아라리’를 부르다.
―「처녀 상 앞에서-정선 나루터」 전문
이 시조시편에서 ‘아라리’는 “상사화”와 “동백꽃”에 의해 피고 지는 무위적 흐름의 국면을 띤다. “달 바라보는 상사화로 피어나”고 “싸리 골 동백꽃이 다 떨어져 쌓이”는 흐름 속에 ‘아라리’는 무위적 의미와 새로운 서정으로 반영된다. 이렇듯 ‘아라리’는 무위자연의 흐름 인식을 통해 “불러서 모아”가는 “강물”로 승화된다. 정선 나루터는 총각과 처녀의 사이 혹은 강과 강이거나 강과 강물의 사이에서 흐름 그 자체의 미학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곳에서 양지마을 처녀가 “강물 다 불러 모아” 부르는 “아라리”를 감상한다. 시인의 감상은 “이슬로 젖어 있는” 둘의 사랑이 “상사화로 피어”나 “이 한 밤 달 바라보는” 국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렇다. 정선아리랑의 노랫말은 사랑과 연정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노랫말은 무려 700~800여수나 된다고 한다. 특히 정선아리랑은 다른 아리랑과 달리 노랫말의 공유가 많다고 한다. 둘째 수 초장의 “싸리 골 동백꽃이 다 떨어져 쌓이”는 “어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라는 노랫말의 차용에서도 나타난다. 쌓이고 쌓인 동백꽃이 다 “타서 한 줌 재로 남아 물길 곱게 어려서”니 이 어찌 그 강물이 오늘까지 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 시조시편은 시인의 무위자연이 있는 흐름 인식이 정선 나루터에서 삶을 회억(回憶)하는 타령으로 둥실거린다.
태백산 물줄기 양수 ‘송천’ 음수 ‘골지 천’
어우러져 서로 만남 뗏목 띄우던 그 날
물길로 ‘정선 아리랑’ 굽이굽이 흘렀지.
흰 옷 뱃사공 붉게 맨 아픔 어루만지어
그리운 장고소리 무시로 두 둥, 두 둥
아득히 꽂힌 바람결 물길이 끌고 갔지.
강물깊이 사랑 깁던 무심한 여울이
흘러내려 세월 엮은 한 사랑 반추이다
동백꽃 붉게 탄 꽃 심 강물 위 짚어 봤지.
―「정선 아우라지」 전문
주지하다시피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에 있는 ‘아우라지’ 나루터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민요이다. ‘아우라지’는 합수목, 즉 사전적 의미로 두 갈래 이상의 물길이 한데 모이는 물목을 일컫는다. 첫 수에서 ‘어우러진다’라는 뜻을 가진 ‘아우라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날 수 없는 총각과 처녀의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노랫말이다. 정선 아우라지는 “태백산 물줄기”가 “뗏목”에 의해 서로 만나는 날에 “굽이굽이 흘”러온 ‘흐름 속의 노래’를 간직하고 있다. ‘아우라지’는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아우라지 물결이 “아득히 꽂힌 바람결”을 끌고 가는 풍경에서 시인의 무위적 흐름 의식은 ‘아라리’로 승화된다. 여울이 깊은 강물에서 사랑을 깁는 일이나 “강물 위 짚어”가는 “동백꽃 붉게 탄” 그 심정이 어찌 다를 수 있겠는가. 시인은 ‘정선 아우라지’를 통해 한 많은 우리 민족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리하여 흘러간 강물만큼이나 앞으로 흘러갈 강물에 “한 사랑 반추”를 띄우고 있다. 궁극적으로 위 시편에서 시인은 “물길이 끌고”가는 “바람결”처럼 흐름이 있는 흐름을 찾아 ‘아우라지’에 서 있다.
세월, 흐름의 미학
이 시집의 제목 ‘흐름 속의 노래’에서도 나타나듯 김만수의 시적 추구는 무위적 미학을 쫒아 우주와 동행하는 흐름의 섭리에 닿아있다. 그는 ‘흐름’에 대해 “우주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른다. 시간이 사람을 따라 흐르는지, 사람이 시간을 따라 흐르는지 세상에는 쉼이 없다.”라며 무위적 흐름의식을 부여하기 위한 사고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무위자연이 흐름으로 시각화된 우주관을 시적 장치로 흡인한다. 그는 시간이 사람을 따라 흐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시간을 따라가고 있음을 사고함으로써 흐름의 섭리라는 새로운 서정으로 나아간다. 그는 무위적 흐름으로 견지되는 시간적 흐름을 공간적 경계로 회억함으로써 새로운 서정이 있는 미학으로 시작(詩作)한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이고도 젖는
남천
졸졸졸
그 소리 않고
세월은 흘러가는
어쩌랴,
한 시대 돌아
그 이름 지우고 있다.
* 창원공단으로 흐르는 내천
―「지금, 남천(南川)은」 전문
시인의 말과 같이 위 시조시편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남겨진 흔적을 “졸졸졸” “남천”에 새겨놓은 작품이다. 이러한 시적 새김은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이고도 젖는”에서처럼 풍경의 의식이 교차되는 새로운 서정적 대상으로 제시된다. “어쩌랴,”라는 진술은 “한 시대”를 “돌아”흐르며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풍경에 반추된다. 지금 이 시대에 흐르는 남천(南川)은 졸졸졸/그 소리마저 숨죽인 채 세월과 동행하고 있는 풍경이다. 초장에서 제시된 “남천”이라는 시적 대상에 대해 중장에서는 '흘러가는 세월‘과 의미적 관계성으로 이어진다. 중장에서 구체화된 의미적 관계는 종장의 “어쩌랴,”에서 화자의 흐름의식과 무위자연에 대한 시심으로 확장된다. 초장의 “이고도 젖는/남천”은 자연적 섭리와 인간적 고뇌에 이르러 비로소 시공간적 차이성을 갖는 의미로 귀결된다. 시인은 “한 시대 돌아/그 이름 지우고 있”는 흐름의 미학을 유년시절에 뛰놀던 강가에 서서 새로운 서정으로 담아내고 있다.
무학산 둘레 길로 귀 맑히고 눈 맑히며
휘날린 옷자락이 산허리 감아드는
골마다 녹음 풀고서
그늘 숲 꺼내 펴다.
산새들 울음 깔아 눈 감고 귀 열 면은
여름 비 지난 자리 눅눅한 산 내음이
꽂히는 여름 햇살에
걸음마다 가볍다.
신발 끈 묻어오는 산 덮은 향기로움
수평선 돌아 온 무학 빽빽이 높이 솟아
저 봐라,
맴도는 하늘
흰 혼 불 반짝인다.
(진사산악회 산행길에서 2015년 4)
―「무학산을 오르며」 전문
인용한 시조시편은 “그늘 숲 꺼내 펴다”처럼 시인의 무위적 삶에서 “둘레길”로 환기하는 국면을 띠고 있다. 시인은 “귀 맑히고 눈 맑히는”는 정화된 삶을 살아오면서 언제나 흐름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잃지 않는다. 시제 ‘무학산을 오르며’는 시인 스스로가 “휘날린 옷자락이 산허리 감아드”는 국면을 견인하며 골골이 녹음을 풀어내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시편은 ‘무학산’이라는 무위적 자연을 통해 “산 내음”이 있는 풍경으로 반영된다. 화자는 눈 감고서 귀 열며 가벼운 걸음으로 흐름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러한 의식적 풍경에 닿아가기 위해 그동안 살아온 무수한 세월을 “무학산”에 투시하고 있다. 시인의 무위적 흐름 의식은 “산새들 울음 깔아 눈 감고 귀 열”어 산을 오르는 “걸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무학산’의 ‘학(鶴)’이 고고함을 상징하고, 선비의 곧은 성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저 봐라,/맴도는 하늘/흰 혼 불 반짝”이는 시인의 의식을 읽을 수 있다.
갇혔던 봄바람이 빗장 풀고 나오면
달천계곡 실실이 녹아 온 산을 깨우더니
진달래 꽃 방울 열고
하늘 보며 활짝 웃다.
잎 새 보다 먼저 나와 알몸이 나울대더니
겨우내 다듬고 쓴 연서마저 내던지고
봄 처녀 시집가라고
펑-펑 꽃송이 터졌다.
눈 부시는 꽃길 따라 살랑살랑 옷자락이
짙은 향내 붉은 살결 둘러 퍼지는 정겨운
봄 햇살 꽃 등불 다는
분홍빛 향연이다.
산객들 살진 땀방울 이슬처럼 안기는 산
젖가슴 같은 산허리 앉은 진달래 군락
흥겨운 돌림 꽃노래
등 실 등 실 춤추다.
―「진달래-창원 천주산」 전문
위 시조시편의 첫 수 초장에서 “진달래”는 “봄바람”의 흐름을 따라 “온 산을 깨우”는 국면이다. “온 산을 깨우”는 국면에서 “진달래”는 비로소 “꽃 방울 열”어 “하늘”을 지향한다. 하늘을 지향하며 흐름을 추구하는 생명이 있는 삶의 풍경은 “빗장 풀고 나오”는 “봄바람”처럼 단호하다. 이렇듯 세월의 흐름은 무위적 눈금을 새기며 새로운 서정의 “연서”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연서”마저도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어 보인다. “펑-펑” 터지는 “진달래 꽃 방울”은 “봄 처녀 시집가”는 풍경을 연출하며 무위적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시인에게 천주산 진달래는 여기까지 올라온 세월의 흐름을 “펑-펑” 터지는 “꽃송이”의 모습으로 반영된다. 시인에게 진달래 피어난 천주산은 “등 실 등 실 춤추”는 자신의 삶과 둘이 아니다. 시인에게 ‘흐름 속의 노래’는 다름 아닌 천주산 진달래의 “꽃노래”인 셈이다. 시인은 천주산에 올라 흘러온 시간을 내려다보며 흔적마다 무위적 눈금을 새긴다.
흔적, 무위적 눈금
육.이.오 그 즈음 공비 떼 소굴인 불모 산
소탕작전 날 온 산이 불기둥으로 치솟은
불꽃이 뱀의 바닥 같이 휘감아 돌았지.
어느 날 땀방울 등에 업은 무거운 그 짐 무게
구석구석 부러진 타다 나은 검은 잡목
어깨에 파란 피멍이 상처처럼 베었지.
그 지게 얹어진 엷은 햇살이 떨어지는
삼정자동 마애불상 엷은 미소 앞에 놓고
땀방울 범벅된 얼굴 자꾸만 안긴 눈물이.
아버지와 나 동반자 난我 지게 뒷 따라가며
가쁜 숨 몰아쉬며 끙끙대는 땀 냄새도
내 집에 지게도 없다 새 가훈家訓만 새겨 놓다.
―「지게」 전문
위 시편은 시인의 삶을 송두리째 투영한 국면으로 읽힌다. 여기서 투영(投影)이란 흐름 속으로 스며든 시간과 공간의 함수로 작용한 시간적 눈금이다. “아버지와 나”를 동반자로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지게’이다. 그 ‘지게’를 따르는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의 삶으로 투영하며 살아오고 있다. 그 아들은 “내 집에 지게도 없다”며 아버지의 삶이 투영된 “새 가훈(家訓)”을 새겨놓고 있다. 첫 수에서는 ‘불모산’을 대상으로 제시하며 “불기둥”이 된 시대적 아픔의 흔적을 구체화한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유년시절로 회억되는 자리에 휘감아 도는 “불꽃”을 놓아간다. ‘지게’는 멍에의 운명을 뒤바꾸며 미소와 눈물로 교차시키는 도구이다. 셋째 수와 마지막 수에서는 다시 ‘지게’를 업고서 산을 오르내리던 풍경이 클로즈업된다. ‘지게’는 선인들의 모습과 둘이 아니며 역사 혹은 흐름의 흔적으로 각인된다. 불모산은 무학산을 오르는 길과 천주산 진달래 길과는 다른 풍경에 있다. 동족상잔을 맞이한 “삼정자동 마애불상” 옆에서 바라본 불모산의 그날은 실로 “불기둥” 그 자체였으리라.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다시금 새겨놓은 “가훈(家訓)”으로 성큼 다가선다.
공단으로 생활 터전 잃은 늘 허탈감이
때로는 갈가리 찢은 아픔이 돋아나는
장독대 햇살이 삭힌
묵은 세월 누워 있다.
곱게도 단장된 울타리 핀 선홍빛 봉선화
보리 고개 한 시름 뱉어 내신 어머니
장독대 농익은 향기
손맛이 묻어 있다.
메주콩 동 동 뜨고 흰 구름 같이 뜨고
지금, 옛 이야기로 기억 속 한 점 하나
장독대 손때 절어진
어머니 얼굴 있다.
사향의 조각조각 흰 고무신 걸어오는
옹기종기 둘러 앉아 조알조알 웃는 얼굴
장독대 담겨진 회억
도라지꽃이 파랗다.
―「장독대」 전문
세월을 추억하는 도구로는 “장독대”를 비길만한 게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아마도 시인이 어렸을 적에는 집집마다 “장독대”가 명당자리를 차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장독대에 “허탈감”과 “아픔”에 의해 “묵은 세월 누워 있”던 때를 회억한다. 그 장독대와 어머니의 손맛이 머물던 그 자리에는 산업화의 깃발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시편은 장독대와 어머니의 모습을 교차시킴으로써 흐름의식으로 이미지화된다. 이러한 흐름이 있는 이미지화에서 장독대에 둘러 선 “울타리”에는 어김없이 “선홍빛 봉선화”가 어머니의 모습으로 피어있다. 어머니의 걸음은 늘 장독대로 향하고 그곳에는 “어머니 얼굴”이 고향의 모습으로 서 있다. 장독대엔 늘 “어머니”의 “손맛”과 “시름”이 “농익은 향기”로 “묻어 있”다. 시인에겐 ‘흐름 속의 노래’로 남아있는 어릴 적 그 장독대에 “흰 구름 같이 뜨”는 “어머니의 얼굴”이 있다. 장독대에 담겨진 ‘흐름 속의 노래’는 한여름 연보랏빛이 도는 “도라지꽃”마냥 “파랗”게 들려온다. 위 시조시편은 무위적 자연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시인의 꿈과 화목했던 가정의 모습이 그려진다.
(1)
흰 감꽃
활짝
피어
하늘 펴는
저
천심天心
염원은
빨갛게 읽어
베풀어 줄
보시布施로
한겨울
홍시 사르다
가지 끝
까치밥.
(2)
고뇌苦惱도
익어지면
피로
익는 것일까
몸 삭히는
저 뜨거움
따사로운 햇빛
익히고
다시 익히다
서리 안고
영글다.
―「감」 전문
주지하다시피 시조 양식은 역사성을 지닌 우리 민족의 시적 장르이다. 이에 시조(時調) 고유의 미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서정을 지향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위 시조시편은 김만수 시인이 지향하는 새로운 서정의 시적 의식을 잘 보여준다. 위 시편은 각 장마다 차분한 어조와 정적 미감을 갖는 구조이다. 특히 분행과 분연에 있어 새로운 서정적 구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첫 수 초장에서는 자연적 서정미를 인위적 자리로 탈바꿈시키는 시적 감각으로 나타난다. “흰 감꽃/활짝/피어”라는 자연적 서정미는 곧이어 “하늘 펴는/저/천심(天心)”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렇듯 묘사와 진술이 가볍게 교차되는 시적 국면은 시인의 심성을 있는 그대로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추구는 시인의 빼어난 상상력이 참신성을 더함으로써 새로운 서정의 지향성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고뇌(苦惱)”로 익어가는 “가지 끝 까치밥”을 “보시(布施)”의 이타심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비로소 “서리”와 몸을 섞으면서 “다시 익히”기 시작하는 그 세월의 흐름의식은 곧 시인의 살아온 시간과 살아가야할 남은 시간의 연속된 흔적이다. 위 시편은 시조시형이 갖는 미의식의 추구와 새로운 서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김만수 시인의 최근 시작(詩作)의 각도를 감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