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근 평론집 <언어의 정수 그 주술력>
│차례│
제1부
압축파일, 그 염결의 미학 - 이호우 시조론
절제된 감정과 초월의 시학 - 리진 시조론
자연과 혼융된 무원시조의 묘미 - 김기호 시조론
순수 지향과 무위의 동양시학 - 전기수 시론·1
자연서정과 생명의지의 향연 - 전기수 시론·2
우리말 우리글 우리 시조로 지워낸 식민의 피 - 박재두 시조론
아픔과 어둠을 풍류하는 설엽미학 - 서우승 시조론
삶의 진정성과 물의 시학 - 조종만 시조론
제2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시조미학 - 김교한 시조론
모천회귀와 자아성찰의 내면적 고백 - 이영성 시조론
자연이 내린 시의 개성과 품격 - 김창완 시론
남성성의 체험적 기록, 그 야성의 미학 - 배대균 수필론
초록 숲에 들고 싶은 청맹과니의 노래 - 윤정란 시조론
순수, 그 자성의 미학 - 김재황 시조론
부드러움과 단단함의 미학적 접근 - 하영 시론
이별의 정한, 그 치유를 위한 시적 발화 - 이영자 시론
아이 눈으로 사물의 마음 읽기 - 이희규 동시론
제3부
소통을 갈구하는 겸손과 균형의 미감 - 우홍순 시조론
꽃으로 현현顯現한 어머니의 초상 - 조현술 시조론
발로 그린 유목주의자의 감성적 체험 - 이동배 시조론
심미적 자아와 순수 미감의 발현 - 김봉근 시조론
자연에 동화된 삶, 혹은 詩내림의 지경 - 손국복 시론
정제精製 다의多意의 언어미학 - 석성환 시조론
묘사, 그 객관화의 내면적 사유 - 엄미경 시조론
일상 체험의 결 고운 감성과 시적 승화 - 곽향련 시론
멈추면 보이는 것, 혹은 쉬어가는 연습 - 양창호 시론
│머리글│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 방에서 생활했다. 새벽에 잠을 깨면 할머니께서는 머리맡에 찬물과 소금, 볏짚을 올려놓고, 연신 절을 하면서 주문을 외곤 하셨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할머니의 표정은 엄숙하고 경건하여 신비롭기까지 했다. 주문을 들어보면 손자의 건강과 무병장수, 가족의 안녕을 비는 내용이 주류다.
유가적인 가풍과 신문물을 받아들인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은 비교적 일찍 개명하였지만, 집안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남아 있었다. 동지 팥죽을 끓여 먹기도 하고, 부엌과 고방, 대문간에 불을 켜놓고, 팥죽을 뿌리면서 잡귀를 물리치기도 했다. 맑은 물과 소금, 볏짚은 주술의 도구이며, 불과 팥죽은 정화를 염원하는 주술의 상징이다. 할머니의 주문은 가족에 대한 염원을 언어화한 것이다. 동지가 지나고, 내 생일이 있는 사월이 올 때까지 할머니의 주문은 계속됐다. 이월 초하루가 되면 어머니는 머리에 음식을 이고, 강가에 나가 용왕을 먹이기도 했다. 우리 집안의 토속적 정화작업은 우주만물의 재생과 안녕을 기구하며, 마무리와 새로움을 더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의례였다. 어둠은 빛으로, 더러움은 깨끗함으로, 닫힘은 열림으로 삶의 고비와 전환점에서 안정과 평화를 염원하는 비손을 하게 되고, 팥죽을 끓여 먹거나 뿌리는 행위로 나타났다.
글쓴이의 개인사를 머리에 서술한 것은 고도의 정신력을 요구하는 문학작품이 아이러니하게도 원시 신앙과 닿아 있음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주술은 미신적이며, 비합리적인 행위로 볼 수도 있다. 할머니의 주문이 손자의 건강이나 가족의 안녕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주술 행위 또한 원인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어렵고, 믿음에 대한 인간의 내면적 상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이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다루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의미 있는 작용을 하고 있음을 본다.
비손을 하면서 외는 주문은 소박하지만, 한 편의 짧은 수필이며, 말로 쓴 시와 시조일 수 있다. 인간은 말과 글을 사용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새롭고 낯선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 세계화한다. 대상의 속성과 가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고, 소통하는 도구로 활용하게 된다.
문학적 형상화는 대상의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며, 대상에 대한 미적 감동과 설득을 위해 작용하는 것이다. 작가가 보이고자 하는 문학 속의 진리와 진실은 작가와 독자가 텍스트 속에서 쌍방향으로 교감하는 체험적 산물이다. 작가가 사용하는 문학 언어는 생활어에서 산문으로, 산문에서 시어로, 시어에서 시조어로 정예화되면서 정제된 언어로 정수精髓된다. 작가는 언어의 자의성과 소통구조를 활용하여 언어의 품격과 생명력을 고양시킨다. 자의적 표현은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창조와 개성, 다의적인 표현의 길을 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언어로 구축된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술력이 생기게 되고,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 텍스트에 의해 상호작용을 하면서 문맥 속에 함의된 의미를 제공하고, 추론하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자의적 표현에 의한 의미 만들기는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소통에 제한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 평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평론評論·Review은 작품에 대한 평가와 비평을 기본으로 하는 작업이지만, 작가의 의도와 청자의 독해에 대한 간극을 메우는데도 필요하다.
이 평론집은 열여섯 편의 시조론과 여덟 편의 시론, 한 편의 수필론, 한 편의 동시론으로 구성되어 총 스물여섯 편의 평론을 수록하고 있다. 탄신 100주년 기념 『펜문학』 특집에서 강고한 시조정신을 보여준 이호우 시조인, 모스크바 해외문학 심포지엄에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떠돌이 별로 다루어진 리진 시조인, 무원기념사업회 창립 세미나에서 자연과 혼융된 작풍을 보여준 김기호 시조인에 대한 삶과 사유체계를 살폈다. 고등학교 은사이신 전기수 시인의 서정시와 박재두·서우승·조종만 시조인이 보여준 강골 기질의 시조, 아흔이 넘는 연치에도 시조를 읊조리는 김교한 시조인과 시의 개성과 품격을 보여준 김창완 시인, 야성의 미학을 보여준 배대균 수필가의 작품세계도 살펴보았다. 대자연의 순수함을 노래한 윤정란·김재황 시조인, 부드러운 듯 단단한 하영·이영자 시인, 아이 눈으로 사물을 읽는 이희규 시인의 동시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영성·우홍순·조현술·이동배·김봉근·석성환·엄미경 시조인과 손국복·곽향련·양창호 시인의 작품을 살피면서 내일의 문학에 대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
글쓴이는 오래전 할머니가 비손하면서 사용한 주문이 지금도 뇌리를 스치며, 의미 있게 작용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언어 중에서도 가장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다. 할머니가 외는 소박한 주문이 위력을 가진다면 언어의 정수로 발화된 문학 작품이 가지는 주술력은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시인 작가에 의해 정려된 예지적 산물로서의 결과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부족하지만, 관심 있는 독자들과 대화하고 싶은 욕구에 의해 어렵게 시도한 작업이다. 제현의 질정을 기대한다.
격려해준 가족과 동료, 도서출판 경남의 편집진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咏悟齋 골방에서
2020년 5월
水下 김복근
│저자 소개│
김복근(金卜根)
•경남 의령에서 태어남. 아호 수하(水下)
•창원대학교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5년 《시조문학》 천료, 1997년 《월간문학》, 《시문학》 문학평론 발표
•시조집 《인과율》(1985, 나라), 《비상을 위하여》(1992, 백상), 《클릭! 텃새 한 마리》(2002, 태학사), 《는개, 몸속을 지나가다》(2010, 시학), 《새들의 생존법칙》(2015, 경남). 《비포리 매화》(2019, 황금알). 평론집 《노산시조론》(2008, 경남), 《생태주의 시조론》(2009, 경남). 《언어의 정수, 그 주술력》(2020, 경남). 동시집 《손이 큰 아이》(2012, 아동문예). 괘관문집 《바람을 안고 살다》(2012, 경남). 산문집 《별나게 부는 바람》(2019, 황금알), 교육도서 《창조하는 힘을 길러주는 방법》(1991, 현대교육출판) 등 펴냄
•마산시문화상(1994), 한국시조문학상(1998), 성파시조문학상(2000), 경남시조문학상(2005), 산해원문화상(2008), 경상남도문화상(2009), 한국문협작가상(2010), 경남아동문학상(2012), 유심작품상(2015), 김달진창원문학상(2015), 국제펜송운문학상(2015), 경남문학상(2016), 삼봉문학상(2020), 한국시조시인협회본상(2020) 등 수상. 2015 세종도서문학나눔과 2019 아로코문학나눔에 선정. 모범공무원(1990), 대통령 표창(2000), 황조근정훈장(2012) 수훈
•의령충혼탑 헌시, 헌사 헌정(2013)
•경상남도문인협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오늘의시조시인회의 부의장, 노산탄신100주년기념사업회장, 창원대·진주교대 국문과 강사, 거제교육장 등 지냄
•현재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경남문협 고문, 《화중련》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