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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은 친일 인사가 아니다 -반일운동가였다/ 이달균

gnbook 2018. 9. 13. 09:44

노산鷺山은 친일인사가 아니라

반일운동가였다

 

 

이달균 시인, 전 마산문인협회장

 

 

 

마산의 `‘은상이 샘노산 이은상이 마시고 자랐다는 샘을 마산의 한 시민단체가 굴삭기로 파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기에 이제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다. 어이가 없는 것은 그들이 은상이 샘을 파묻어야 한다는 이유가 사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들의 주장은 노산이 친일한 혐의가 있다.”는 전제하에 근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폄훼운동을 해왔고, 그 일환으로 이 샘을 굴삭기로 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밝혀진 사실은 일제의 부역이 아니라 조선독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진력하는 위험한 인물, 즉 반일운동가였음이 명명백백 드러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일제 말 노산은 총독부의 사상범 검거에 따라 광양 백운산 자락에 몸을 피해 있었고, 결국 일경에 검거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다. 1938년 조선일보를 사직한 뒤 해방 때까지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신황, 지랑 등 백운산 자락의 마을과 광양읍 칠성리에서도 상당기간 은거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조시인 김교한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이곳을 직접 찾아다녔고, 결국 이 사실을 밝혀내었다. 실제 1983년에 발간된 광양군지노산이 광양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잘못된 혐의유포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친일 행적이 허위로 밝혀지자 이후부턴 독재의 부역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진정한 시민운동단체라면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에 대한 양심선언을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왜곡에 대한 반성이고 시민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일반 국민과 마산시민 대부분은 노산을 친일인사로 알고 있다. 자신들은 혐의라고 했지 결코 친일로 단정하지 않았다고 피해간다면 비겁한 짓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혐의를 곧바로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의 문인 중에도 친일 글을 남겼거나 행적이 있는 이들은 많다. 친일문학을 일찍 연구한 임종국의 저서 `친일문학론에는 수천 명 문인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만 노산의 이름은 없다. 그런데도 굳이 노산을 표적 삼는다. 처음엔 친일혐의로 시위를 당겼다가 여의치 않으니 독재정권의 부역자로 과녁을 겨눈다.

몇 해 전 제주의 성산 일출봉을 올라간 적이 있다. 그곳엔 백발의 노인들 여남은 분이 모여 감회에 젖고 있었다. 그리고는 목청껏 가고파를 불렀다. 그들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에 나가 사는데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와 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이미 가고파는 마산의 노래가 아니라 민족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이렇듯 타국에 사는 이들에게 고국의 향수를 달래는 시를 지은 노산은 시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였다.

해마다 은상이 샘을 파묻어 버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가고파, 옛 동산에 올라, 그 집 앞, 성불사의 밤, 봄 처녀등을 부르며 자랐을 것이다. 노산은 이들 작품으로 힘겨운 시대의 질곡을 지나온 국민들에게 모국어의 아름다움으로 정서 순화에 큰 보탬을 주었다. 그 사실마저 굴삭기로 덮을 수는 없다. 우물을 덮어 흔적마저 없애겠다는 것은 아예 역사에 이름을 지우겠다는 발상이 아닌가. 더 이상 노산의 무덤에 삽을 꽂지 마라. 영광이든 부끄러움이든 묻어서 없애버리기보다 살려서 후대에 전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역사의 기록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공과를 분명히 해야 한다. 노비산에 노산문학관이 세워지지 못했지만 만약 세워졌다면 이런 표지석을 세워 교훈으로 삼을 수도 있었으리라.

노산 이은상은 민족의 전통시인 시조 창작을 통해 한국현대문학을 융성 발전시켰다. 사향의 시 `가고파를 써서 마산을 `가고파의 도시로 불리게 했다. 일제 땐 투옥과 구금이 되는 등 독립을 위해 애썼다. 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 숭모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9년엔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자유당 때 강연을 다녔고, 군사정권에 일정부분 부역한 것은 오점으로 남아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억하는 후대가 되었으면 한다.

2007. 4.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