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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의 양장시조를 다시 생각한다/장성진

gnbook 2018. 9. 11. 12:21

노산의 양장시조를 다시 생각한다

 

장성진 문학평론가 창원대국문과 교수

 

 

노산 이은상(1903~1982)의 시조를 전체로서 다루는 이들이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면서도 정면으로 쟁점화하기는 은근히 꺼리는 문제가 양장시조론과 그 작품에 대한 해명이다. 가령 노산은 왜 양장시조를 들고 나왔을까, “양장시조는 시조인가 아닌가, 시조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설문이 불가피한데, 그다지 간여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양장시조를 긍정하고 나면 작가도 비평가도 부담이 엄청나게 커진다. 작가들은 자기의 작품이 고시조의 형식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현대화를 다양하게 추구해왔다는 의의를 강조하는데, 양장시조에 비하면 그 정도는 미약한 탈피에 불과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비평가들은 묵시적이든 명시적이든 시조가 삼장이라는 전제 아래 시조론과 작품 분석을 진행해 왔는데, 양장시조를 받아들이고 나면 시조의 정체성을 새로 규명해야 한다.

노산은 양장시조의 정립과 창작에 상당히 힘을 기울였다. 지나가는 길에 한번 시도해 본 정도는 아니다. 왜 그랬으며, 실제는 어떠했을까?

시조부흥론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노산도 현대시조가 더 이상 노래로서의 가곡창歌曲唱과는 무관하게 읽는 시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음악적 분류를 무시하고 시형詩型으로서 단형短型과 간형間型과 장형長型을 설정하였다. 그중에서 간형을 설명하면서 4장시조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고서, 4장시조가 가능하다면 양장시조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노산은 4장시조와 양장시조에 대해서 가능성을 함께 인정하면서도 가치는 전혀 다르게 설명하였다.

4장시조를 단순히 행의 길이로 분류한 형식은 아니다. 고시조를 검토하면서, 초장이나 중장의 길이가 단형 한 장의 두 배쯤 되면서, 길어진 장이 짝對偶를 이루는 작품을 가려서 4장시조라고 하였다. 기존의 시조 중에는 한시의 7언율시에 현토한 작품도 여기에 속하며, 그 외에도 더러 있다는 예를 들었다. 이렇게 확인은 하면서도, 도리어 이 4장시조를 창작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하였다. 그 이유는 4장시조를 창작하면 그것이 4행시와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시조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데 대한 우려가 숨어 있다. 고시조에는 있지만 창작은 하지 말자는 주장이다.

이에 비해서 양장시조는 당연히 고시조에서 찾아볼 수 없다. 가곡창이나 시조창으로 실현되는 고시조에 3장은 절대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산은 양장시조를 창작도 하고 권장도 하였다. 그 계기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3장에서 하나를 더한 4장시조가 가능하다면 반대로 하나를 줄인 양장시조도 가능하다는 논리의 연장이고, 하나는 고시조 중에서 두 장을 하나로 압축하면 더욱 좋은 시가 된다는 미적 감각의 표출이다. 거기에 더해 양장시조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몇몇 시인들 사이에 논의와 시도가 있었다고도 하였다. 단수의 작품을 보자.

 

뵈오려 못 뵈는 님 눈 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되어지이다.

—〈소경되어지이다(1931. 10. 20)

 

노산의 양장시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양장시조에 대한 원래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3행까지 불필요해서양장으로 짓는다고 하였으니, 양장은 3장의 축약이다. 그렇지만 줄이기 전의 시 곧 가상의 3행시를 떠올리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애초에 2장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눈감다두 단어의 활용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은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이미 정해진 상대이며, “소경되다도 눈감는 행위와 동의어이다. 이 짧은 시에서 첫 행의 후반부와 둘째 행의 전반부는 사실상 겹친다. 의미만 보면 뵈오려 못 뵈는 님 눈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되어지이다.”라고 해서 안 될 게 없다. 이는 시로서 더 성공적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라, 3장을 2장으로 줄이는 게 더 낫다고 하면서 예로 든 작품들에 가해진 축약 방식을 적용해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비틀어서 한 행으로 가정해 본 것이, 앞의 두 행짜리 원작품과 동일할 수 없다는 이치를 생각하면, 노산의 2행시는 시조의 축약이 아니라 애당초 2행으로 이루어진 시 작품이다. 고시조의 3장 사이에 필연적으로 전제된 논리적 구성 방식과는 다른, 그보다 훨씬 압축된 감성을 담을 그릇으로서 2행을 선택한 것이다. 굳이 시조의 한 하위 갈래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겠다.

 

안개 싸인 산을 헤치고 올라선 제

새소리 들리건마는 새는 아니 보이오.

 

안개 걷고 나니 울던 새 인 곳 없고

이슬만 잎사귀마다 방울방울 맺혔소.

—〈산 위에 올라1931. 9. 2

 

노산의 양장시조 중에서는 각 수 사이의 긴밀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선은 두 수짜리 양장 연시조라고 해 두자. 여기서 두 의 무게로 하는 방식에 주목할 만하다.

전통적으로 연시조는 독립된 각수各首가 모여서 한 편을 이룬다. 사계절이나 지리적 위치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소재의 연결, 오륜처럼 정해진 항목 등이 각수의 소재가 되며, 그 수 사이에는 주제적 통일 이외의 필연성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을 초월하는 독립성을 가진다. 그렇지만 위의 작품에서 는 충실히 의 역할을 하면서 연 이상의 독립성을 가지지 않고, 둘이 해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성을 드러낸다.

첫 수의 초장은 분명한 초장이다. 산을 오르는 화자의 행위는 이 시의 출발이 되며, 이 행을 제외하고 화자는 끝까지 숨어버린다. 말하자면 사람은 자연의 경계에까지만 인도하는 안내자에 그친다. 둘째 행은 중장이나 종장 중 하나라고 할 만한데 율격은 종장이다. 그렇지만 한 수를 종결하는 종장은 될 수 없다. ‘들리는 소리보이지 않는 모습에 안긴 문장으로 구성되어서는 시의의 종결을 보여주기에는 어색하다. 그래서 이 두 행은 하나의 연으로서 전체의 부분을 이룬다.

둘째 수는 율격에 구애되지 않고 보면 초중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중종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앞수와 같이 초장에 화자의 행위를 배치해도, 종장에 다시 화자의 행위를 배치해도 구조적 완성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마지막 행은 종장이다. 시제가 산 위에 올라이다. 일상의 장소인 산 아래를 떠난 산 위의 공간은 이미 사람의 세상이 아닌 자연이 주인이다. 잎사귀마다 맺힌 이슬은 그 자체로서 완성이지, 더 이상 아쉽다거나 위태롭다는 등 사람의 판단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종장으로서 이 시 전체의 종결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왜 형식을 삼장이 아닌 양장으로 압축했는지 생각해 볼 만하다. 그것은 감각과 이미지의 놀라운 집중이다. 이 시의 작품 외적 시간과 공간은 상당히 길고 넓다. 안개에 싸일 정도로 높은 산, 그 산을 오르고 머무르는 긴 시간, 그 시공간에서 겪는 많은 일과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시간을 안개가 쌌다가 걷는모습으로 보여주었으며, 사물은 새소리와 이슬방울로 단순화시켰다. 시행의 최소화는 이러한 생략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잘 드러낸다. 이렇게 극적으로 축약된 세계를 나타내는 데 고시조의 3장이 가지는 논리적 구성은 너무 속도가 느리다.

그렇다고 해도 끝내 눌러둘 수만은 없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렇게 그 자체로 완결된 양식을 왜 굳이 시조라고 하는가? 시조의 세 단위가 두 단위로 축약된 게 아니라 원래 두 단위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시조이기 때문에 뒷장의 율격을 조정했는가, 율격이 그러니 시조라고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은 대작가가 명명한 것이니 묵수해야 한다든지, 현대시조는 고시조와 어떻게든 달라야 한다든지 하는 무비판적인 태도로는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프로문학가들로부터 시조가 무차별적 공격을 받던 당시의 상황과, 그에 대응하여 시조가 결코 고답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 했던 시조부흥론자들의 고뇌도 참작해서 그 정체성을 살펴야 한다. 굳이 시조의 범주에서 어색하게 다룰 일만이 아니라, 시조보다 더 압축된 하나의 정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계승의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