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경남 게시판

노산의 인간성에 머리 숙이며/ 홍진기

gnbook 2018. 9. 11. 11:36

노산의 인간성에 머리 숙이며

 

홍진기  시조시인, 전 경남시조시인협회장

 

사람 되고 시 쓰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내 허물 덮고 남의 흉보는 참 우습고 가소로운 말머리다. 그러나 그 말만 떼어놓고 본다면 조금도 틀린 말이라고 밀어붙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그 글엔 그 사람됨이 배어 있기 마련이니.

노산 선생의 시를 읽다가 선생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자는 생각을 한다. 무애 양주동 선생께서 강의 시간을 한 쪽 떼어내어 노산 선생과의 인연을 열강(?)하신 내용을 되짚어 선생의 저서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에 기대면서, 그로나마 생전에 뵙지 못한 애석을 풀어가며 큰 어른들의 도타운 우정에만 떨리는 붓대를 꽂을 생각이다.

 

題詞 五首

―〈노산 시조선에 부쳐

 

東都 旅舍에 한 이불 밑 잠들었고,

 

세 끼니 밥 한 상을 둘이 갈라 먹었도다,

지금에 어느 우정이 이만하다 할쏘냐.

 

동갑, 그대와 나와 뉘야 더욱 재주런고?

 

한 걸음 앞섰다고 노상 위라 뽐내다가,

오요요 구름 부른 날 내 못 및다 하니라.

1·2

 

및다 : 미치다의 준말.

 

동경 하숙집에서 밥 한 그릇으로 둘이 나눠먹던 배고프던 시절에 얽힌 도타운 우정을 잊을 수가 없었던 무애 선생이 노산 선생을 회억하는 시다. 이 하나만으로 나는 노산 선생의 인간성을 다 읽었다고 생각한다. 해동 천재로 자부하시던 무애 선생이지만 노산 선생의 시조 구름을 읽고 오불급야吾不及也(내가 도저히 따를 수가 없구나)’라 칭탄하며 시재를 인가印可한다는 두 분의 일화 또한 가슴 따뜻한 사람 냄새 풍겨옴을 금치 못한 바이거니와 노산 선생의 삶에 대한 체온은 무론毋論 시조의 경지 또한 아득함을 더해주고도 남는 바 있다.

이야기를 천재 두 어른의 젊었던 시절로 돌려보자. 거기서 거듭 노산 선생의 사람다운 사람의 따습한 가슴 한 쪽만이라도 들여다보고 나가자.

두 분이 처음 만난 곳은 조선문단사 춘해 방인근 집에서라 했다. 이후, 동경에서 재회했을 때 무애 선생은 학자금에 궁하여 숙식이 난처해, 노산 선생의 하숙에 곁들어 지내게 되었다. 그때 노산은 역사서를 탐독하는 중이었다고 무애 선생은 회고하셨다. 둘이 숙식을 몇 달 동안 같이했다면 간단히 들릴는지 모르지만, 거기엔 우스운 장면과 감격의 사연이 있다.

 

방세를 낸 하숙에 친구가 같이 자는 것쯤은 문제가 없었으나, 식사는? 식사는 처음 거리의 식당에 가서 따로 사 먹었는데, 식비 40전에 궁한 때가 있어, 하루에 1·2식쯤 한상을 둘이 갈라 먹기로 하였는데, 일본의 식량이 워낙 적기 때문에 한 그릇의 밥이 1인분으로도 부족한 터이나, 요행 노산의 식량이 그리 크지 않아, 둘이 반 그릇씩을 먹어도 과히 시장치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었다. 이 일을 하숙 주인이 알면 무료 식객인 나를 백안시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조선 유학생 두 사람의 체면을 손(떨어뜨림)이 클 것 같아, 그래 우리는 밥 한 상의 분식을 그들에게 숨겨 비식으로 하기로 작정했다. 하녀가 밥상을 들고 층계로 올라오면, 나는 슬그머니 미리 준비하여 둔 저로 대기한다. 그녀가 밥상을 놓고 내려간 뒤에 우리는 재빨리 분식을 실천한다. 그런데 어렵슈, 중간에 하녀가 차인가 뭔가를 날라 오느라고 또 층계를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쿵쿵 울려오지 않는가! 나는 일단 저를 수습하고 입안의 지체물을 얼른 처리하고 나서, 밥상에서 약간 떨어진 채 몸을 직각으로 돌려 남향좌南向坐, 열린 창을 향하여 무릎을 안고 느닷없이 미음微吟(중얼중얼 시를 읊음)한다.

노산과의 몇 달 동거는 이 밖에도 몇 가지 우스운 회상을 짝한다. 첫째는 그의 아호. 그의 처음 호는 이공耳公(춘원이 지음)이라 했는데, 그 단구 풍모에 귀가 유난히 두텁고 컸다. 내가 그 호를 야유적이라 하여 쓰지 말라 하였더니, 대신 지어 달라 하기로, 그의 고향 뒷산 노비산鷺飛山에 좇아 노산이 어떠냐 했더니, 그 뒤로 그가 줄곧 이 호를 써왔다.

 

이로써 나는 노산 선생의 범상에서 벗어난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천성의 티 없고 얼 하나 없는 순수와, 맑으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와 우정 깊음과, 인간적 체온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음을…….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