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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선생을 만나다/ 공영해

gnbook 2018. 9. 11. 12:54

노산 선생을 만나다

 

 

공영해 시조시인, 전 창원문인협회장

 

 

 

노산 이은상 선생은 한국 현대사에서 큰 자취를 남긴 시조문학의 대가이다. 그가 남긴 저술에는 한결 나라사랑의 얼이 깃들어 있다. 그는 나라사랑의 정신을 수필과 시조로 보급, 수많은 청소년들이 그의 글을 통해 조국애가 어떠한 것인지 가슴 깊이 깨닫게 하였다. 글 속에서 우리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거의 신앙적 집념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노산의 행적은 국학자로서 높이 숭앙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노산을 만난 것은 가곡 가고파를 통해서였다.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고등학생 신분의 나는, 노랫말에 담긴 반복적 어휘에 의한 그리움의 정서에 빠지고 만다. 언제 나도 먼 이역에 가서 이 노래를 멋지게 불러 보리라 다짐도 하였었다. 아직 바다 구경조차 하지 못한 나에게 노래 속의 바다는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고향 바다물새가 날고 가재 거이랑 달음질치는 모래판이 있고 별을 헤다 잠드는 뱃장이 있는 고향 바다가 마침내 전방 근무를 하게 되면서 입속에서 낮게 절절히 노래로 풀려 나오곤 했다. 1·21사태 직후 입대한 초병이 겪는 전방 근무는 매일이 살벌하였다. 초병 근무시 가고파10절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 번을 외면 한 시간이 금방이었다. 그 시절 가고파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노산은 또 우리들에게 피어린 육백리를 통해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 주기도 하였다. 강건, 화려체로 뜨겁게 토하는 그 울분의 문장 앞에 우리는 숙연히 옷깃을 여며야 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는 일이었다.

 

푸른 동햇가에 푸른 민족이 살고 있다.

태양같이 다시 솟는 영원한 불사신不死身이다.

고난을 박차고 일어서라. 빛나는 내일이 증언證言하리라.

산 첩첩 물 겹겹, 아름답다, 내 나라여!

자유와 정의와 사랑 위에 오래거라, 내 역사여!

가슴에 손 얹고 비는 말씀, 내 겨레 잘 살게 하옵소서.

—〈피어린 육백리에서

 

내 겨레 잘 살게 하려는 정신을 일개 초병인들 어찌 모르리. 인용시야말로 노산의 민족애, 국토애가 그대로 드러난 시 아닌가. 조국애의 확장을 위한 파월이 좌절되었지만 나는 불사신이 되고자 한 적도 있었다. 나의 청년시절 노산은 내 감성의 한 축을 벼려 준 스승이었다.

오랫동안 노산을 잊고 지내다가 나는 다시 노산을 아주 가까이서 만나게 된다.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노산의 고향, 가고파의 무대인 예향 마산에서 교편을 잡게 되고 그토록 그리던 바다를 곁에 두게 된다. 또 뒤늦으나마 시조에 입문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노산의 문학 세계를 접하게 되고 그의 논저를 통해 정신세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노산은 마산이 낳은 시조문학계의 태두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은 누구도 노산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몇 년 전 마산역은 열차가 도착하면 가곡 가고파로 관광객들을 맞았다. 어느 항구도시에서 이런 환대를 하랴. 정겨운 가락에 걸음도 가뿐하였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노산의 가사라 하여 역장을 찾아가 항의를 하는 바람에 유감스럽게도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다. 마산을 사랑하는 단체인 로터리클럽에서 마산역 광장에 가고파노래비를 세우자 비문을 페인트로 황칠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또한 노산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에 의한 소행이었다. 페인트를 지우며 나는 정말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당시의 심정을 나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열차가 닿을 때마다 반갑다 손을 잡던

가고파 정겨운 가락 걸음도 가뿐했거늘

내 고향 남쪽 바다의 역사 지금 앓고 있다.

 

찬 얼음 센 바람 속 우리 얼을 지켜 오신

오로지 나라 사랑 큰 나무로 사셨던 분

그분 뜻 페인트 뿌려 이리 누가 황칠했나.

 

역사는 알고 있다, 노래비를 세운 광장

만행의 얼룩 결국 시민들을 비웃음

울면서 지워낸 자국, 물소리를 담는다.

 

하여 한데 얼려 알몸으로 살아도 좋을

그리움 노를 젓는 보고픈 물새 나라

가고파 노래의 고향 이곳이 마산이매.

졸시 가고파 노래비를 닦으며전문

 

나는 40년 이상을 창원에 살며 누구보다 창원을, 마산을 사랑해 왔다. 노산의 고향, ‘가고파의 고향!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늦었지만, 우리의 숙원 사업이던 노산문학상을 지난해 제정하여 첫 수상자를 내게 된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노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그의 문학과 정신을 올바르게 정립하여 이보다 더 큰 사업을 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