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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과 모리스 엘조그/ 백인섭

gnbook 2018. 9. 11. 11:23

노산 이은상과 모리스 엘조그

 

백인섭 산악인, 아주대 명예교수

 

 

 

지난겨울 오랜만에 여유를 찾아 산악잡지들과 산악활동 관련 인터넷 사이트들을 뚜렷한 목표 없이 이리저리 항해하다가 뜻밖의 두 가지 사건에 슬며시 빨려 들었다. 그 첫 번째는 월간 마운틴20132월호에 실린 원로 산악인 이용대 님이 노산 이은상을 그리는 글 해오라기 나는 산, 그 그림자를 돌아본다이고, 두 번째는 뉴욕타임스 유럽판에 실린 세계적 등반가 모리스 엘조그의 사망 소식이었다. 93세의 엘조그가 그의 집 침대에서 잠을 깨지 않고 편안하게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이었다.

노산 이은상과 모리스 엘조그. 나는 이 두 사람과 각별한 인연, 그것도 서로 맥락이 이어지는 인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지와 오만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그냥 스쳐 지나는 만남만을 가졌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흘러 그분들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서 나와의 각별한 인연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생전에 남긴 매우 감동적인 사진을 보면서 두 분의 심오한 등반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1969년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훈련대 설악산 눈사태 사고 후 현장으로 가고 있는 노산(1903~1982)의 모습이다(사진 안광옥). 그의 표정에서 등에 진 짐보다 더 무거운 걱정과 고뇌를 품고 있음을, 그리고 그의 힘찬 걸음 동작에서 등반가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

엘조그의 사진에서 또한 나는 최고의 감동을 느낀다. 문드러져 걸레처럼 되어버린 그 두 손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결연한 등반의지를 보았고,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애수 어린 표정에서 성취한 영광에 대한 환희와 참을 수 없는 현재의 육체적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해서 미래에 올라야 할 또 다른 안나푸르나에서 겪을 수밖에 없을 부자유에 대한 두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먼발치에서 본 노산 선생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부처님 귀였다. 세상에 실제로 부처님 귀를 가진 사람이 있음에 나는 놀랐고, 따라서 이분이 범상치 않은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선생에 대한 나의 추억 전부였다. 단 한마디 대화도, 단 한 번의 손잡음도 없이.

나는 온 국민이 애창하는 가곡 가고파, 성불사의 밤, 바위고개, 사우, 봄처녀, 고향 생각, 옛 동산에 올라등의 가사가 선생께서 만드신 것인 줄 그때는 몰랐다. 더구나 가고파와 바위고개는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는데도 그것을 누가 언제 만든 것인지 알고 있기는커녕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노산 선생과의 첫 번째 어긋나기는 노산의 한국산악회 회장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고에서다. 19692월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등반훈련대가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당한 국내 최초의 눈사태 사고. 이 사고로 10명의 젊은 대원이 눈 속에 매몰된 채 최후를 맞았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고 구조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일었으며, 산악회는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열정적으로 회무를 집행해 온 그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고, 조직의 책임자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했지만 2년 후 그는 회장직에 재추대된다.

나도 당시 등반훈련대의 주전멤버 대상이었지만 그 훈련등반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전혀 다른 곳에서 나만의 개척등반을 감행하고 있었다(동계적설기 한라산 99골 개척등반). 나의 기나긴 학창시절을 마감하는 해였기에 나는 훈련등반보다는 나만의 어렵고 위험한 개척등반을 택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그때 한라산 개척등반 대신 설악산 훈련등반을 선택했다면 필경 열 명의 동지들과 함께 노루목에 내 영혼의 깃을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나는 한라산 99골 개척등반 중이라 설악산 훈련사고를 수습하는 구조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훈련등반에 참여했든지 아니면 구조활동에라도 참여했다면 분명 노산 선생과 좀 더 가까운 만남을 가졌을 터인데, 이렇게 해서 나와 노산 선생과의 첫 번째 만남은 어긋나버린 것이다.

두 번째는 1971년 한국산악회의 샤모니 등산학교 파견훈련 때다. 당초 이 계획은 노산이 회장 재임 시 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일이 무산되자 이민재 회장에게로 뜻이 이어져 결실을 본 것이다. 오늘날 각급 등산교육기관에서 빙벽 기초기술로 활용하고 있는 프렌치 테크닉이 그 당시 도입된 기술이다. 나는 바로 이 파견교육에 주전멤버로 참여했다.

그런데 당시 나는 납북된 부친 때문에 해외출국이 금지된 상태였고 또한 몸담고 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분위기상 장기휴가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따라서 한국산악회 회장단이 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 하필이면 그때 노산 선생의 한국산악회 회장으로서의 공백기였기에 대신 당시 한국산악회 이민재 회장과 조선일보 방 회장 두 분이 애를 쓰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와 노산 선생과의 만남은 또다시 엇나간 것이다.

세 번째는 노산의 한국산악회 회장 재취임(1973~1982) 기간에 일어났다. 나는 ENSA(프랑스 국립 등산·스키학교) 파견훈련 중 우리네 산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알프스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리고 세계적 등반가들을 직접 만나면서 나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귀국 후 프로등반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산으로서 컴퓨터 전문가의 길로 매진하기 위해서 탈바꿈을 했다. 당장에 새로 설립되는 한국과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어려운 입시준비에 매진해야 했다(1972). 합격 후에는 컴퓨터 학문이라는 광활한 미지의 세계에 매혹되어 혼신의 힘을 바쳤다(1973~1975). 그리고 과학원 졸업 후 그 분야의 정상, 즉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 프랑스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1976~1983).

이렇게 해서 나는 산악활동을 멀리하게 되었고, 따라서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직으로 돌아온 노산 선생을 또다시 비껴가게 된 것이다.

월간 (201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