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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지음 <피어린 육백리>/ 이처기

gnbook 2018. 9. 11. 11:31

노산 이은상 지음 <피어린 육백리>

휴전선을 붙들고

 

이처기 시조시인, 전 봉덕여중 교장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현충일과 6·25가 들어 있는 6월을 맞이하면서 이달에 읽어 볼 명수필 노산 이은상의 피어린 육백 리를 추천해 본다. 이양하의 신록예찬, 정비석의 산정무한, 피천득의 인연등 유명한 명수필도 있지만 국토분단의 아픔을 지닌 우리 민족으로서 우리 강산 휴전선 육백 리를 순례한 이 기행수필은 꼭 읽어볼 명작이다.

피어린 육백 리나라사랑 국토순례 기행의 글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1953년 휴전 이후 3·8선으로 갈라진 남북 분단의 현장을 종주해 달라는 조선일보사의 제안으로 그 기록을 조선일보에 게재하기를 원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노산은 이를 수락하고 1962625일을 전후하여 10일간의 일정으로 휴전선 답파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강화도의 서쪽 섬이 교동섬이요, 거기서 또 다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 끝섬인데 노산의 피어린 600리의 시작은 이 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일정을 보면 제1일 서해 끝섬에서 교동읍까지, 2일 교동읍에서 강화 전등사까지, 3일 전등사에서 갑곶·김포읍까지, 4일 김포읍에서 판문점·율곡묘지까지, 5일 율곡묘지에서 설마령·전곡까지, 6일 전곡에서 한탄강·포천 장암리까지, 7일 장암리에서 철원·금화 신술리까지, 8일 신술리에서 대성산·화천읍까지, 9일 화천읍에서 양구·인제 원통리까지, 10일 원통리에서 향로봉·동해안 명호리까지이다.

매우 타이트한 일정을 60세의 나이에 오직 나라 사랑의 일념으로 답파하였던 것이다.

그가 친히 쓴 피어린 육백 리서문을 읽어 보자.

 

조국의 국토가 38선으로써 허리를 잘린 지 어느덧 17년이요 그리고 6·25동란이 일어난 지 12년 다시 또 휴전선이 그어진 지도 벌써 9년이 지나도록 이 원한의 선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통분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글은 휴전선을 통곡하는 노제문이요 통일의 신께 바치는 치성문이기도 한 것이다. 중략 나는 이 기행문을 통하여 글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 뜻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며 이 글을 계기로 동포들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한번 더 불붙는다면 그것이 진실로 나의 원하는 바다.

그리고 이 글 때문에 통일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본원이 국제간까지 알려질 수 있다면 더욱더 본외의 영광으로 여길 따름이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본문 부분 부분을 살펴보자.

 

오늘은 휴전선 행각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지금 동부 전선에서도 가장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는 향로봉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여기는 바로 설악산 한계령으로부터 흘러오는 한계의 시냇가 발길은 북쪽을 향하여 눈엔 연방 설악산 들어가는 동쪽 골짜기를 바라본다. 30년 만에 다시 보아도 밝은 빛 맑은 기운이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가슴속의 티끌을 대번에 씻어주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시원하냐! 그래 이런데서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겼더란 말이냐!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이런 산수 속에서 더구나 지난날 전투 속에서도 가장 처참했던 곳이 설악산과 향로봉 싸움이었다니 왜 그렇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고개를 넘으면 내림길 얼마 아니하여 진부령에 이른다. 마을이었던 터만 남았고 집도 사람도 없다. 다만 길가에 비석 두개가 서 있다. 하나는 향로봉 지구 전적비요, 다른 하나는 설화 학생 순국 충혼비다. 피발린 비석이요 눈물 어린 비석이다. 전적비에는 195157일부터 69일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군이 영웅적으로 공산군과 싸워 마침내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는 사적을 새겼다. 중략 나는 비석 앞에 서서 두손 모아 명복을 빌곤 다시 차를 몰아 서북 향로봉을 향하여 오른다. 중략 동해의 푸른 물결이 옆구리에 와 부딪는다. 명호리 폐허를 향하여 북을 달려간다. 휴전선 마지막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금단의 최종 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십여 명의 수비군들이 무슨 큰일이나 난 듯이 뒤를 따른다.

나는 질벅이는 숲속으로 신 젖은 줄도 모르고 미친 듯 달려 들어가 마지막 남쪽 한계선에 쳐놓은 철조망을 덥석 붙들자 무슨 강한 전류에 감전이나 된 듯이 손발과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끝없이 철썩거리는 동해의 물결 백사장 가에 박아놓은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이냐! 내가 이 마지막 쇠말뚝을 하나 잡아보려고 육백 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다네 더 못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노산의 피어린 육백 리는 나라사랑과 분단의 아픔을 한탄하는 그 감정이 그대로 읽는 사람에게 전이됨을 느끼게 된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더욱 빛나며 그의 기행문에서 가장 우뚝 서는 작품이다.

—《경남시조33(2016)

 

당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