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아름답고 쓸쓸한 회상의 노래들

 

 

이우걸

 

 

1

 

어느 늦가을 오후 등의자에 앉아 저무는 하늘의 주홍빛 노을을 바라보며 세월의 빠름을 새삼 느끼고 아쉬웠던 과거를 잠시나마 회상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이 시집은 그런 생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김용복 시인은 팔순에 접어들었다. 그의 삶은 소박하고 정갈했으며 그의 언어들은 담백하고 정제되어 있어서 여기 실린 노래들은 고요하고 깊고 아름답다. 그의 생애가 언론인으로 일관한 것에 비해서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너무나 다른 인상을 준다. 시어를 찾기 어려워 시를 많이 못썼고 문단추천 절차마저도 스스로 찾지 않았다고 하는 시인의 자세는 이 작품들의 순백하고 깊고 아름다운 품격 때문에 한결 고결한 개성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인가,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생에서 어떤 것들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그립게 하는가. 이 시집의 작품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쓰인 시들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때로는 은유적인 답변을 조심스레 보여준다.

 

2

 

부부간의 생활을 다룬 작품으로 해로(偕老)가 있다.

 

당신은 난시

나는 원시

뜰에 핀 꽃을 보는데도

초점이 달랐다

 

당신 오지랖의 단추는 왼쪽

나는 바른쪽

가슴을 파고드는 바람을 막는데도

쓰는 손이 달랐다.

 

해가 져 마주 앉으면

달라서 생긴 틈새

눈썹 밑이 흐려도

삶이 무거워 잠이 먼저 들었다

 

달라서 다른 것을

알게 해주는 세월......

 

틈새를 메운

이끼 같은 정

 

갈대머리 마주 앉아

창밖을 보면

부질없이 지나가는

떨어진 잎새들.

해로(偕老)전편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지게 되는 느낌은 다양할 것이다. 먼저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보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부간의 모습을 이렇게 읽히게 그릴 수 있는 능력에 대해 감동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평범한 시상을 시화詩化해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시각의 새로움이나 수사의 뛰어남 이 두 가지 능력으로 읽을 만한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해로偕老는 제재 그 자체가 평범하다. 그리고 이런 류의 작품으로 성공한 시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부부생활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꼭 한번은 써보고 싶어진다. 다만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워서 머뭇거릴 뿐이다. 그런 제재로 차이의 발견과 그 틈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읽히는 시를 만들어 내어 놓았다. ‘난시원시’ ‘왼쪽바른쪽’ ‘이끼 같은 정’,적확한 비유와 묘사들이 몇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게 이해와 관용 그리고 사랑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생의 여수旅愁를 담담히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강가에서가 있다.

 

강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기슭에

지금 나는 서 있는가

 

갈대는 갈대끼리 부비며 살고

질경이는 질경이끼리 보살피며 사는

이 강가에

 

누구와 부딪히며, 기대며

나는 왔는가.

 

생각하면

가슴에 얼비치는 햇무리 같은 것

한번쯤 소리 내어 부르고 싶은 이름도 있지.

 

나는 갈대이던가

질경이 풀이던가

엎디어 몸을 잠근 조약돌이던가

 

산그늘 짙어가는

강가에서

어딘가로 흘러가는 나를 본다

강가에서전편

 

 

 

회고의 정서, 관조의 태도로 그려진 가작이다. 물은 정화의 이미지, 생산의 이미지, 유랑의 이미지, 질서의 이미지 등 다양한 색깔을 담고 있다. 에서 다시 강물이 되면 농경사회 속에서 유년을 보낸 노년의 독자에겐 포근한 고향의 이미지를 환기시켜 준다. 그러면서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유랑의 이미지를 띄고 있는 듯도 하다. 강가에 사는 갈대나 질경이나 혹은 조약돌로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기대기도 하는 삶속에서 따스한 이름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우리 삶은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한 생을 반추하고 추억하고 또 때로는 성찰하게 되는 노시인의 모습이 있는가’‘왔는가’‘이던가와 같은 종결어미가 빚어내는 유려한 리듬감과 함께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운문성의 극대화와 절제의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겨울 소나타가 있다.

 

 

여린 잎에

단풍이 먼저 드네

 

마음이 여린

너는

어떤 빛깔로 졌나.

 

떨어진 잎은

바람이 쓸어 가네

 

빈 언덕에

혼자 남아 서 있는 나무

 

시린 가지에

내리는 서리

겨울 소나타전문

 

 

 

가곡의 작곡을 위해 의도적으로 쓴 시 같다. 쓸쓸한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모습은 견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언어들은 운문성을 살리면서도 극히 절제된 모습이다. 이런 시를 읽으면 다변스럽고 혼돈에 빠진 최근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이 자꾸 오버랩 된다. 비어있는 듯 한 작품인데 만상이 가득한 전통 서정시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별의 정조를 아름답게 그린 작품으로 바람이 있다.

 

네가 떠나간

그 자리에

처음 바람을 보았다

 

네가 앉았던 아랫목

너의 분홍치마가 걸려있던 옷걸이에서

나를 흔들고 일어나는

바람을......

때로는 세상을 다 비우고

때로는 세상의 의미를 다 지우는

그 바람은

 

회오리 같은 그리움이 되었다가

허허한 쓸쓸함이 되기도 하고

가이없는 슬픔이 되기도 한다

 

네가 남기고 간

그 바람은

내 발자국 소리에서도 일어나고

창가의 달빛에서도 일어난다

바람전문

 

 

 

바람의 변주곡이다. 그러나 그 바람의 정조는 오로지 이별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 없는 그리움으로 쓸쓸함으로 가이없는 슬픔으로’ ‘바람은 분다. 이별을 주제로 한 시를 이만큼 절절하고 처연하고 아름답게 써내기란 쉽지 않다. 앞서 논한 바람과는 또 다르게 사랑의 정조를 시화한 심도 있는 작품이 있다.

 

 

너에게만 하고 싶은 말

오직 너에게만 주고 싶은

하나 밖에 없는 말

 

혼자서 가슴에 닿아

되뇌다가 망설이며 태우다가

쏟고 싶은 말

 

때로는 붉은 다알리아처럼

때로는 세상의 향기를 다 쓸어 담고

때로는 저녁노을처럼 하염없기도 한말,

 

언젠가

세상을 가득 채워

충만한 것으로

너에게 주고 싶은 말

 

끝내는 내가 받고 싶은 말

받고서 불꽃이 되고 싶은 말

전문

 

 

 

 

말의 철학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인식론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이 시는 격조 높은 연애시다. 또 다르게는 작자의 시론이다. 연애시로 읽을 때는 꽃은 애인이 되지만 시론으로 읽을 때 은 시가 될 수 있다. 이런 작품들을 살펴보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시인의 안목을 발견할 수 있고 사실상 익명의 아마추어 시인으로 살아왔지만 얼마나 끊임없이 좋은 시 쓰기에 정진해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해 직접 발언한 듯 한 작품으로는 일기가 있다.

 

섬으로 살고 싶어

섬에 왔는데

먼저 와 맞이하는

살아온 편린

 

파도는

떠나라고 아우성 치고

 

애가 단 동백은

송이채 진다

 

섬에도

섬은

없는가 보다

일기전문

 

 

 

 

 

제목으로 섬에 왔는데라고 하지 않고 왜 일기라고 했을까? 그 의문이 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여기서 섬은 꼭 섬이 아니라도 좋다. 이 세상 어디에도 편안히 안거할 곳이면 그 곳이 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섬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이 일상적인 일이라고 제목 일기는 말해준다.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현대인에게 정보와 교통, 통신기술의 발달은 그런 고요한 장소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3

 

생을 어떻게 영위하느냐 하는 문제는 비교의 대상도 아니고 평가의 대상도 아닌 오로지 그 사람의 철학에 기인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삶이 있고 또 그 숫자만큼의 행복과 불행이 있을 수 있다. 시인으로 사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명세와 관계없이 홀로 내실을 다지며 자족하는 사람도 있고 이름에 급급해서 온갖 수단 방법으로 능력보다 더 높은 명예를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다. 김용복 시인은 전자의 삶을 살아온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김용복 시인의 개성을 몇 가지 항목으로 간추려 본다면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싶다.

첫 번째로 앞 서 읽어 본 시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읽히는 시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시들은 비교적 쉬운 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쉬운 시라는 표현은 담백하고 맑고 가독성 있는 시라는 의미일 뿐 가벼운 시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비교적 정적인 분위기의 시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은 저널리스트로서의 삶이었다. 그런 삶을 살아온 시인의 시는 길고 현실 비판적이며 자신의 주장이 분명한 경우가 많다. 일상의 일이 그런 영향을 준다. 그런데 김 시인의 시들은 의외로 군더더기가 없고 단아하다. 그래서 여운이 길고 깊다. 대사회 메시지가 강한 우리 시단 풍토에서 순수서정시를 지향하는 그의 그런 시작태도는 인상적이다. 세 번째로 그는 쓸쓸하고 허무주의적 여운이 감도는 시를 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들 중 대부분이 이런 시들이다. 가령 앞 서 인용했던 겨울 소나타강가에서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분위기가 시적 정취를 고조시켜 독자를 끄는 마력이 되고 있다. 허무주의(nihilism)란 무(,nihil)만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허무라는 인식은 자신이 인식하고 추구해온 가치들이 더 이상 자신의 삶과 일치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찾아온다. 이러한 의식이 존재방식의 쇄신을 동반한다. 이 시인의 경우 그런 계기를 마련할 만큼 치열한 경우는 아니다.

네 번째는 과거지향의 시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팔순을 지나고 있는 노시인에게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잘 표현해낸 가을풍경은 그의 시적개성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가꾸었던 것들을

거두어 가고 있습니다

 

금관악기의 맑은 소리가

빈자리를

메워가고 있습니다

 

키 큰 미루나무 하나

초병으로 서 있습니다

쭉정이 같은

남자 하나

거두어 가지 않는 이삭으로

남아

 

스산한 바람 속을

서성대고 있습니다

가을풍경전문

 

 

아름답고 쓸쓸한 풍경이다. 노시인은 자신의 자화상을 담백한 언어로 이렇게 스케치해놓고 있다. 일종의 노년시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2000년대에 이르러 65세 이상의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7%를 넘어서는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2026년이면 한국사회의 노인인구가 전체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물론 노인성문학의 범주에서 분석해볼 수 있겠지만 그런 의식 없이 바라봐도 서정시로서 많은 여운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시다.

마지막으로 김용복 시인의 개성을 하나 더 든다면 운문적인 시를 쓴다는 것이다. 이 덕목은 경우에 따라 부질없는 열거라고 할 수도 있다. 시는 운문이라는 기존 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시가 많이 창작된다는 사실도 사실이지만 운문시라고 쓰인 시들도 리듬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요즘의 추세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명시들은 명징하고 여운이 있고 율감律感이 있는 시들이다. 김 시인의 시들은 어느 작품이라도 쉽게 외울 수 있을 만큼 리듬이 살아있다. 이 시집이 김용복 시인에겐 첫 시집이다. 창작연대가 쓰이지 않은 작품들이라 작자의 연령에 따른 변화나 시대에 관한 반응을 분석하지 못했다. 그런 반응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모범적인 서정시를 써 온 분이다. 결국 이 모든 시들은 김 시인이 남겨놓고 싶은 인생에 대한 그의 시적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쉽고 정갈하고 아름다운 모국어의 잔치 앞에서 해설은 부질없는 관행일 뿐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아울러 김 시인의 건강과 문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