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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잊을 수 없는 씨름 행로

천하장사 김성률, 이만기, 강호동의 발굴비화

 

김성수 전 경남대학교 씨름감독, 현 창원시문화상수상자회 회장

 

 

 

초여름 어수선한 저녁 무렵 제법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사촌형 손잡고 성호초등학교 운동장 서편 가에 있는 씨름도 하고 넓이 뛰기도 하고 철봉, 턱걸이도 할 수 있는 모래판으로 갔다.

그때 여덟 살 많은 사촌형이 가르쳐 준 씨름기술인 왼배지기, 옆무릎치기를 가르쳐 준 씨름기술은 팔십이 다 된 지금도 나와 같이 동행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 엄마젖이 늦게 나와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밥물을 먹고 자란 관계로 발육성장이 늦은데다 여위고 키가 작았으나 몸은 민첩하고 빨랐다. 달리기, 턱걸이 등 각종 운동을 많이 했고, 학교에서는 머리가 명석해서 분단장도 맡아 또래에서는 당할 아이가 없었다. 나를 날다람쥐 같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외동아들을 강하게 키운다고 부모님께 칭찬을 많이 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1952년 국가고시로 상위 점수를 받아 1차로 마산동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무렵 기억에 남는 것은, 2학년 때 서원곡 정자나무 쪽으로 소풍을 갔는데 다른 반의 김중근이란 학생과 씨름을 했다. 20여 분을 하여도 승부가 나지 않아 무승부로 끝을 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지금 서성동 네거리 근처 마산노인복지관 자리이지만, 거기서 옛날에는 매립지라 마산씨름협회가 주최하는 씨름대회가 열렸는데 중학생 부문에 출전하여 연필과 공책을 부상으로 받은 기억이 난다.

본격적인 씨름 입문은 1955년도 마산상업학교(용마고 전신)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처음 복싱부에 가입했더니 코치가 정상돌(서양화가,1931-1991) 선배였다. 너무 열심히 하고 과로했든지 아니면 당시 주변의 위생 상태가 불량해서인지 장티푸스 전염병에 걸려서 20일 정도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마산상업학교는 1946년도 즉, 해방 이듬해 열린 전국체육대회 중학단체전에서 우승한 씨름명문학교였다. 6.25동란을 겪으면서 후배 양성의 기회를 놓쳐 연계가 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선수는 필자와 김한식, 박일룡(호박장군), 작년에 작고하신 이판기, 이종석 안영준 등이 있었다. 8년의 공백을 거치고 한 해 위인 강삼중과 김상권, 김상렬, 변재일, 나 김성수가 모여 재창단의 길에 나서 다시 씨름호 버스가 출발하였다. 우리는 인내와 열성으로 서로가 등을 두드리면서 씨름부 재건에 최선을 다하였다. 운동복 팬티도 없이 모래를 뒤집어 쓴 몸을 씻을 때, 비누 한 장도 우리들 용돈에서 갹출해서 구입했고, 코치도 없어 씨름 선배들이 훈련장에 나오면 한 수씩 배우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후원이나 조직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간혹 김현식, 모희규, 이종석, 박영식, 조용도 등 선배 들이 훈련장에 나오면 한 수 지도받으려고 등목을 해드리고 온갖 심부름 다 하고 상대선수의 훈련대상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녁 늦게 귀가했다.

이 시절에 마산공업고등학교는 고 박일룡 선생이 박귀동이란 덩치가 크고 키가 큰 학생 등 5명의 선수를 데리고 늘 씨름대회장으로 출근해 우리 학교와 결승전 시합을 하였다. 결과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1956년부터 57년까지 선수 생활했던 선수는 나 혼자만 지금껏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단체전을 5인조로 했는데 늘 32로 승부가 결정 났다. 우리가 어렵게 이기면 인솔 선생이 백교관 이란 예비역 육군 준위 출신인데, 자기 전세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사모님이 끓인 쇠고기 국을 배부르게 먹게 하는 훈훈한 인정을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1958년 초 급우들은 대학을 가거나 은행, 한국전력, 무진회사 등에 취직이 되어 떠나는데 나는 갈 데가 없었다. 지난여름에 사고를 친 일이 있어 육군사관학교에도 응시할 수도 없었다. 그런 차에 한 해 후배인 33회 김영하 군이 찾아와서 같이 씨름연습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다시 모교 씨름장으로 나갔다. 그 전에 나는 운명적으로 씨름계로 나가라는 어떤 알 수 없는 계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집에 누워있으니 성호초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선생의 말씀인즉, “성호출신 중 씨름선수는 학생뿐이라 찾아왔다며 이어 하는 말씀은 이랬다. “우리 학교가 8.15기념 전 마산체육대회 씨름단체전에 출전하려고 하는데 학생들은 선발되었는데 가르칠 코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코치를 할 정도가 안 되니 다름 사람을 찾아보시지요하고 사양 하였다. 그러나 그 선생은 다른 사람을 알아봤는데 학생 같은 선수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니 꼭 부탁한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가버리신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씨름단에 조건 없이 합류하여 훈련에 참여하였다.

그때 나중 유명한 씨름 선수로 자란 김성률이가 5학년으로 선수로 뽑혀 있었다. 그때 함께한 선수들이 제자 인연으로 형 동생하며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씨름지도자 길은 그때 19576월 어느 날 마산시 성호동 6번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연일까 행운일까? 내 숙명의 씨름계의 진출은 내 스스로가 아닌 34회 후배들이 결정해 준 것이다. 그들이 32회나 33회보다 성적이 월등 나은 것이 인정되어 마산 해인대학(경남대학 전신)에 씨름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나는 체육 특기자로 등록금 면제받고 주장 완장을 차고 장군동 캠퍼스에 입성하여 가문의 영광을 안았다.

오전에는 열심히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씨름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시합에 나가면 성적이 신통찮았다. 선수들의 체력보강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당시 군의학교에 근무하던 장 씨를 찾아가서 쌀과 된장 식용유 등을 지원받고 어협조합에서는 생선을 협조 받아 학교 이웃의 가정집에 부탁하여 선수들의 건강보신에 최대한 심혈을 기우렸다.

그러나 성적은 쉽사리 좋아지지 않았다. 41회 체전에서는 예선에 탈락하였다. 담당 김봉구 교수님으로부터 팀을 보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포항의 박두진, 울산 김영태, 박영식 선수 등이 이때 합류하였다.

이듬해 1961년 우리 대학선수(해인대학 이후 마산대학 이름이 되었다가 나중 경남대학이 됨)단은 전국 대회마다 우승 또 우승 연전연승의 전력을 쌓아나갔다. 김성수 주장, 김영태, 박영식, 박두진, 진원진이 다 그해 42회 전국체전에서 대학부 우승 일반부 우승을 차지하였다. 빅 경기는 경북 OB의 고우주 선수대 경남의 김영태 경기에서 소우주 선수의 다리 삽바가 터져서 재경기를 한 것이 씨름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마산대학 배구선수단은 최강팀인 동양한의대를 32호 승리하여 우승하였다. 복싱에 허재관 선수, 태권도 팀 우승으로 하늘을 찌를 기세로 우수 성적을 획득하였다. 나는 체육부장 역할을 무난히 완수하였다. 2회 도민 체육대회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 마산체육계 위상이 한껏 높아진 것이다. 나도 이제 지도자의 길로 본격 나설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196410월쯤 월포동 현 하이마트 바닷가 광장에서 마산씨름협회가 주최하는 전국 씨름대회가 개최되었다. 나는 일반 선수로 참가하고 있었다. 이때 제 또래보다 키가 훌쩍 크고 얼굴이 넓적한 중학생 하나가 내 앞에 서더니 성수 형님이라고 부르더니 대뜸 삽바 잡는 방법을 묻는다. “니가 누고하니 기찬 형 동생 성률입니다한다. 삽바 잡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당시 명색이 마산 중앙중학 선수단이 성률이와 대결하여 완패하였다. 그만큼 성률의 씨름실력은 탁월하였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이 나는 기뻤다.

사실 성률이는 1957년 성호초등 씨름부를 만들 때 5학년 학생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근 8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나는 그의 진학문제를 진중히 생각하였다. 그는 마산상고에 축구선수로 입학이 내정되어 있었다. 나는 입학하고 씨름을 하도록 약속하고 19654월에 마산상고 씨름부에서 만난 것이다. 성률이는 국민학생 때는 유도 3급이고 중학생 때는 축구공격수로 성장하였다. 씨름을 통하여 복합적 선수로 완성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는 그의 큰 형님 김 기찬은 마산동중 동기동창이고 학생서클 파도의 정회원으로 아주 친한 친구이고 유도 2단의 장사이다.

김성률 장사는 한 세기에 하나 탄생한다는 초특급 선수임이 확실하다.

KBS7연패, 회장기 대회 10연패, 선수권대회 8년패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나를 만나 씨름을 배우고 후학을 가르치고 대학씨름연맹을 결성해 대학선수 발굴 육성하여 대학체육의 다변성에 기여하였다. 그는 씨름계의 큰 별로써 씨름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돌아보면, 전국 여러 곳에서 학교의 명예와 고향 명예를 위하여 30여 고등학교 씨름부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학교든 한 학교에서 3명의 천하장사가 나온 곳은 없다.

다음에 설명하지만 마산상고의 김성률, 이만기, 강호동 선수가 그들이다.

19844월 장충체육관에서 민속씨름 천하장사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첫 우승자는 이만기 라는 애티 나는 신성이다. 그는 꺼져가는 어둠속에 화산처럼 폭발한 기적 같은 샛별이다. 그런데 이때 씨름은 바닥난 상태고 민속정통 경기란 약점이 있고 경기 자체가 들어내고 밀어내는 정도의 테크닉이 없으니 이런 경기를 누가 보겠는가. 당연히 관중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때 혜성같이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그전부터 프로씨름을 하자는 분위기는 있었지만 선두에 나서는 누구도 없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경북 의성출신 김태형 선수가 앞장을 섰다. 그는 1982년부터 전국을 돌기 시작하였다.

그는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와서 의논 하였고 성률이를 만나고 갔다. 그리고 다음해 하얀 백지위 여섯 번째 선에 먼저 내가 도장을 찍고 성률이가 두 번째 찍었다. 그러자 모두 따라 찍어서 민속씨름연맹 결성 발기 신청 원을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등록하였다. 19842월에 허완구 회장, 김동수 부회장, 김태성 전무이사, 김성수 경기위원장으로 민속씨름연맹이 탄생하였다.

1회 대회는 우여곡절 끝에 개최되었지만 결과는 크게 성공하여 많은 관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혁신적이니 관중은 새로운 씨름에 환호하고 나선 것이다. 새로 스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때맞춰 젊고 미남이고 기술 민첩하고 활기찬 샛별이 하강한 것이다. 바로 이만기의 등장이었다. 내가 이만기 장사를 처음 본 것은 1993년 만기가 초등학교 6학년 봄일 것이다. 경남씨름협회 전무이사로서 경남씨름을 지휘하고 있었다. 만기는 제2회 소년체전에 출전을 위하여 마산무학초등학교에서 40킬로그램 이하 급에 3인 선수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된 꼬마선수 였다.

그런데 교육청 지도부에서 볼 때, 코치 감독진이 부실하다고 보고 나에게 맡아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사정은 직장이 부산이었다. 오전에는 부산으로 출근하고 오후에 무학초등학교로 와서 근 40여 일간 지도를 한 것이다.

이만기 장사가 마산중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 경남대학교를 거쳐 천하장사가 되었지만 잘된 기초는 내가 정석으로 가르친 것이 많은 뒷받침이 된 것으로 사료된다. 마산무학초등학교는 부산 개성중학교에서 거행된 제2회 소년체전 초등학교 단체전에서 준우승하였으나 씨름 종합성적은 공동우승하고 금의환향 하였다.

그 시절에 마산씨름 상황이 좋지 못했다. 김성률 장사가 너무 오래 선수생활을 한 탓에 김성률 후계자를 누구를 내세우느냐, 나를 비롯하여 감독 진들이 고민하고 있었는데 1983년 회장기 대회에서 이만기가 이준희 선수에게 21로 석패한 것을 내가 보고받고 감독 진을 소집해서 이만기를 마산대표장사 만들기에 나섰다. 우선 동계훈련 계획을 잡아 체력훈련에는 황경수, 기술지도에는 권평실, 백승만 감독이 맡기로 하였다. 이만기 장사 만들기 프로젝트가 본격 시동을 건 것이다. 그해 겨울은 이만기를 행운의 옹기에 담는 기간이었다. 앞에서 거론했지만 마산씨름은 한동안 침체기에 있었다.

이만기는 미남이고 기술 좋고 몸도 아름답고 빠르고 용맹스럽지만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은사가 경기위원장 이란 사실을 먼 훗날 결승전 경기의 비화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강호동은 씨름 장사다. 아니다 연예인이다. 호동이 중2학년 4월쯤 서원곡 백운사 광장에서 친구들과 요란하게 놀고 있었는데 그 중 덩치가 크고 키가 큰 놈이 우뚝해서 황경수 감독(당시 교사)의 눈에 든 것이다. 황경수 교사는 옳다 대어를 낚았다는 직감에 너 어느 학교 다니느냐.” 하고 물었다. “네 동중학교 2학년입니다,” “운동 좀 해 보았느냐?” “, 태권도 2품입니다.” “트위스트를 좀 추워보아라.” 보니 춤을 유연하게 잘 춘다. “오늘부터 씨름해 보지 않을래.” 이 이야기는 호동이가 씨름에 입문할 때의 현장 이야기다.

황경수 감독이 전화로 나에게 강호동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님, 오늘 아침 서원곡에서 좋은 한 놈을 건졌소.” 하는 것이다. 강호동은 중고등학교 때는 황경수 감독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권영식 감독이 조흥금고로 데리고 가서 훈련을 맡았다.

나는 강호동의 오촌 당숙인 넥슨 타이어 강병중 회장과 마산동중학교 동창이다. 한때는 강회장이 대한씨름협회 재무이사 부회장을 맡고 나는 감사, 경남씨름협회 전무이사를 맡았던 절친이다. 강 회장은 나를 만나면 호동이를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호동이가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전국고등학생 대회에서 우승을 했지만 발목을 크게 다쳐 2개월 이상 훈련을 하지 못했다. 그 후유증으로 3학년 초 성적이 신통하지 못했다. 나는 마산상고 훈련장에 가서 특별지도를 해 주었다. 부상 후유증에 대한 공포감을 해소하고 자신감을 갖는 일에도 관심을 기우려 2개월 여 후에는 원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지며 보았다. 그런 강호동이가 경남대학교에 가지 않고 부산 조흥금고 프로팀으로 감으로써 경남대학교 박 총장이 진노하였다.

 

나는 원래 경량급 선수로 요즘 급수로는 태백급 선수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알아주는 대찬 선수생활을 하였고 명석한 경기분석과 새로운 체육행정 이행으로 앞선 진취적인 발상으로 후배를 지도하였다. 미래지향적 인성강화, 예절교육 등 항상 연구하는 자세로 후배를 지도하였고 무엇보다 선수들의 생활안정에 중점을 두었다. 박수 받으며 퇴진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남기려 애썼다.

이제 나의 마지막 소원은, 무학산 그늘에서 훈련하고 이곳 출신 천하장사가 다시 탄생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강태공의 단 팔십 햇 팔십이 아니라 김성수 햇 팔십이 합포만 모래밭에서 대어가 낚이도록 낚싯대만 바라볼 작정이다.

 

(창원시문화상수상자를 만나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