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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쳐 생각하여 채진採眞하기

-오하룡吳夏龍의 시 세계

 

윤재근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오하룡 시인의 시들을 만나게 되면 누구나 풀쳐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다음 저나름 스스로 채진採眞의 노님을() 누리게 된다. 그는 그런 노님을 삶의 일상日常에서 찾아내 매우 교묘하게 살맛을 삭혀 내준다. 삶의 일상에서 삶의 여울목을 놀랍도록 찾아서 시로 녹여 채진採眞의 노님 터를 우리에게 마련해 준다. 그러한 채진採眞의 노님은 맺혔던 생각들을 훌훌 풀어버리게 하고 연이어 자신을 위로하는 순간을 마주하도록 마음자리를 마련해 크게 한다.

맺힌 생각이 풀리면 산다는 일로 이리저리 응어리졌든 것들이 봄눈 녹듯 하기 마련이다.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져 홀가분해지고 그래서 사뭇 편안해진다. 이런 안심安心이 곧 스스로 누리는 채진採眞의 즐거움이다. 우리 서로 주고받으며 모여 살기는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서로 가까운 듯해 보여도 실은 저마다의 마음속에는 여기서 은하수만큼이나 먼 거리가 숨바꼭질하고 있는 것이 인간人間의 간즉 인간들의 사이이다.

인간의 그런 사이()을 좁혀 허물어버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우리에게 시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오 시인의 시를 만나면 인간의 사이()는 은근하게 좁혀진다. 그 좁혀짐은 시가 저마다 자신의 속내로 돌아가서 풀쳐 생각을 펼침에서 일어나는 채진採眞의 즐거움이다. 그의 시는 도란거림이든 수군거림이든 성질부림이든 우리로 하여금 풀쳐 생각을 저마다 나름대로 펼쳐내 채진採眞의 즐거움을 스스로 맛보게 함이 그의 시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그렇게 그의 시는 채미採美하기를 저어하고, 채진採眞하게 하는 텃밭 같아서 스스럼없이 우리를 끌어들인다.

 

예사로 듣지 마라

듣고 또 들어도

 

달디 달고

못 참게

달고 달더라도

 

또 그렇게

뭐라 할 말이 없게

달콤하더라도

 

얼른 커서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 드릴게요

이 말

<[호강이란 말] 前半>

 

마음속을 적중하기로는 소곤거림보다 더한 쏜살은 없다. 오시인은 [호강이란 말]을 눈으로 읽으란 듯 써 두었지만 [호강이란 말]은 저절로 <예사로 듣지 마라 듣고 또 들어도>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숨질 따라 입으로 소곤소곤 도란거리게 한다. 내 입이 내는 소리가 내 귀에 울려서 내 마음속이 새삼 울림하고 잠자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일깨워내는 것이 시화詩話이다. 시가 들려주는 말()은 샘물 같아야 마실수록 상큼한 법이다. <“얼른커서 돈많이 벌어 호강시켜드릴게요이말> 군더더기 하나 없이 상큼한 샘물 같은 소곤거림이다. 그는 시화詩話가 이럴수록 파고드는 힘을 가졌음을 자득自得하고 오랜 세월 자신의 시도詩道를 나름대로 열어왔다. 오시인 자신이 말했듯 그에게 시는 천지를 모를 때부터 밀착되었는지라’ [호강이란 말]처럼 하나도 걸림 없이 술술 시화詩話를 도란거린다. 이런 도란거림에는 잡것들이 끼어들 수 없이 그냥그대로 이어져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여기서 오 시인吳 詩人은 말을 깎거나 다듬지 않아야 함을 밝혀두고 있는 셈이다. 조금도 내숭떨지 않고 소곤소곤 도란도란 마음속을 파고드는 힘을 시에 실어준다. 이점은 오랜 세월 이런저런 눈치 안 보고 꾸벅꾸벅 작시作詩하면서 제 길을 걸어온 덕일 것이다.

 

대륙 깊숙이 자리 잡았을 때

단단히 국경선 못 긋고

다들 어디 갔는가

 

저 억울한 역사를 보고도

남과 북 사이 철벽 못 걷고

다들 어디 갔는가

 

그 기른 힘 어디 쓰려고

저리 눈감고 입 다물고

지금 다들 어디 갔는가

<[다들 어디 갔는가]>

 

이 땅의 남북에 사는 우리 모두 무엇 하나 감추거나 숨길 것 없이 통일을 누리기 위하여 툭 터놓고 풀쳐 생각을 펼쳐보라고 [다들 어디 갔는가]는 절규絶叫한다. 오 시인의 시세詩勢에서 이렇듯 성깔부리는 시는 흔하지 않은 편이다. 견디다 못해 딱하면 소곤소곤 수군수군 조용조용 풀어내는 시화詩話를 접고 그만 [다들 어디 갔는가]처럼 마치 간헐천 같이 저마다의 속내를 터트리게 한다.

그래서 성깔부리는 시는 우리를 통쾌하게 한다. 그렇다고 그는 결코 시화詩話를 엉뚱하게 쏟아내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시가 자신의 시도詩道 안에서 꿈틀거리도록, 고삐잡기를 오히려 더 단단히 한다. [다들 어디 갔는가]는 그러한 절제를 잘 드러내준다. 절규絶叫하되 노호怒號하지 않고, 자칫 치우칠세라 균형을 잡고, 이 땅의 우리 모두가 겪어온 아픔들을 알알이 살펴 헤아려 볼 수 있게 최대한 평균치를 함축含蓄한다. <지금 다들 어디 갔는가>는 절규할 뿐 결코 분노하지는 않는다. 이편저편 나누고 패거리지어 겨루자는 주장 따위는 시가 짊어질 일이 아님을 그는 이미 터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시가 인간의 삶을 음풍농월吟風咏月로 덧칠할 사이가 있는지 의심한다. 그의 시도詩道는 삶을 곧장 파고들기를 고집하는 쪽으로 그의 시에는 현대시의 근기根技이미지란 것도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다들 어디 갔는가]를 보라. 거기에 등장하는 <대륙-국경선-남과 북-철벽> 등은 은유隱喩도 아니고 직유直喩도 아니어서 우리네 사실로서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술어述語이다.

우리 모두 사실로 겪어온 지나간 발자국들을 풀치라고 <지금 다들 어디 갔는가>는 간만에 서슴없이 우리로 하여금 풀쳐 생각으로 채진採眞하게 한다. 진실을 캐는 일은 어떤 서책書冊의 이론理論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캐내는 일은 곧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다들 어디 갔는가]는 따끔히 일깨워준다. 이런 것이 오 시인의 시화詩話가 지닌 간결한 호소력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생 황금기를

요양병원 전전하는 생활이니

남편 노릇인들 어찌 제대로 하였으랴

 

놀라워라 그런 그 아내가

남편이 평론집 걱정을 하였던지 어쨌든지

원고 넘어오고 얼마 되지 않은 날

뜬금없이

돈을 보냈는데 받았느냐

 

이학수가 예순 넘었으니 그 부인도

아마 그 근처는 되었으리라

듣건대

시아버지 모시고 자식만 바라보는 삶

남편 쾌유인들 얼마나 소망하였으랴

 

비록 출판비 일부에 불과하나

나는 그 책을 낸 출판인으로서

그 아내의 그 음성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저림을 어쩌지 못한다

[어떤 음성]

 

오 시인은 시가 아니라 인간人間을 짊어지고 시인의 길을 가겠노라 선언하고 시를 짓기 시작했다. 왜 인간을 짊어져야 하는지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하여 늘 세상에 문제를 던져왔다. 물론 그 해답은 시를 만나는 독자가 마련해야 한다. 시인이란 본래 말하되 답하지 않는다. 소를 강가로 끌고 가되 강물을 마시고 안 마시고는 소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물을 먹이려는 목동이란 세상에 없듯이 참다운 시인은 적어도 독자들 앞에 척해서는 안 됨을 사무치고 인간의 정을 말 할 수밖에 없는 뼈저림을 겪는다. 오 시인이 삶의 아픔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경락經絡은 인간人間의 정이란 문제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세상과 그리고 온갖 사물事物과의 사이()를 묶어서 <인간人間>을 오 시인은 바라고 보고 있다. 그는 <사람()><인간人間의 간> 즉 사람이 살아감을 그 사이()를 통해서 도멱(睹覓)하고자 한다. 사람이 겪는 이런저런 사이들을 그는 가려보되() 꼼꼼히 찾아내고 곁눈질하듯() 하면서도 정곡(正鵠)을 콕 찌른다. 풀쳐 생각을 남김없이 다하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간절한 것이 무엇인지 채진採眞해 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시세계를 관류貫流하는 주류主流가 된다. 그 주류에 속하는 시[어떤 음성]이 있다.

[어떤 음성]은 사람의 사이 중에서도 틈이 없는 둘 사이가 곧 아내와 남편이란 부부가 아니냐고 자문自問한다. 그리고 그 부부사이를 왜 무간無間이라고 하는지 까닭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어떤 음성]에 등장하는 남편과 아내의 무간無間은 사랑이란 것이냐고 자문自問하게 된다. 나아가 [어떤 음성]에서 돈을 보냈는데 받았느냐”-“전화해 온 가냘픈 여성의 음성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가슴 저림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을 새김질해본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간無間함이 어떻게 일궈지는지 누구나 저 나름대로 풀쳐볼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을 꾸리느라 날마다 땀 흘리는 사람이라면 그 가냘픈 음성을 듣고 풀쳐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정앞에 마주서게 된다. 그리고 <썩은 장이 더러워 산다>는 천하의 명언名言이 귓속에 맥놀이하면서 가슴 치게 된다. 누구나 나름대로 살아가느라 이리저리 맺혔던 생각들을 풀어버리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아가도록 진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것이다.

풀쳐 생각으로 남몰래 흘리는 눈물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진실 그것임을 알아챌 때 그보다 더 감미롭고 절실한 생의 채진採眞은 없는 편이다. [어떤 음성]은 썩은 정으로 살지 어디 사랑으로 사느냐 자답自答을 하게 한다. 이렇게 오 시인은 자문自問하고 자답自答하여 은근슬쩍 눙치는 시화詩話를 술술 풀어낸다.

 

우리 마산에는 연세 지긋한데 살점이라곤 없는 앙상한 문인 한 분 계시느니, 이분은 수필과 평론을 쓰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분이라 아는 분은 다 아시리라 보지만, 그 분에 얽힌 후문이 재미있어 음미해 보노니, 어느 날 이 분과 중년의 여성 몇 분이 한 차에 동승하여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운전을 맡은 에이치 여사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낯선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때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던 앙상 문인 왈 여성 세 분이 나를 납치하여 어디에 쓰려고 이러오.” 이 말에 세 분 여성 모두 박장대소를 넘어 기절초풍의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후문이었으니

[어떤 후문]

 

오 시인의 작품에는 [어떤 후문] 같은 담소조談笑調 가 많은 편이다. 이런 담소조談笑調를 우리 시단詩壇에서는 산문시散文詩라고 일컫는다. 그런지라 [어떤 후문]을 산문시散文詩라 하겠지만 산문시란 말은 시를 부정否定하는 술어述語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여기에다 말해두기는 어쭙잖지만 산문시散文詩란 시인의 산문이란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솔직한 사젼私見을 오 시인께 말해주고 싶다.

오 시인은 [어떤 후문] 같은 산문시散文詩를 많이 짓는 편이다. [어떤 후문]은 시인이 무덤덤한 일상日常에서 살맛나게 하는 것을 콕 찍어 내 상큼하게 산문으로 마무리해 놓은 하나의 일화逸話인 셈이다. 물론 산문문체 같이 끝을 <->로 써 마무리하지 않고 <계시느니-보지만-보노니-이었으니> 등으로 문장마감을 해두었지만, 그렇다고 시의 율미律味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율미律味를 경시하는 시류詩流가 우리 시단詩壇의 주류主流처럼 돼 있는지라 오 시인 역시 산문시散文詩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이지 그런 주류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터이다. 다만 산문시가 시로 용납되는 시단시류詩壇時流라 할지라도 오 시인이 2014년 초하初夏에 상재했던 몽상과 현실 사이시집 5부에 게재한 바와 같은 산문시들은 앞으로 오시인의 시집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솔직히 앞선다.

왜냐하면 그 5부에 실린 14편의 사람이야기는 인간 오하룡吳夏龍의 비망록備忘錄에 해당될 뿐 오하룡 시집에 들어가기는 좀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오 시인은 우리말의 소리를 율이 되게 하여 그 율을 타게() 하고 [어떤 음성] 같은 시를 짓는 시인인지라 저 5부에 게재했던 것과 같은 산문이 그의 시집 속에 들어갈수록 옥의 티가 됨을 이 발문跋文을 빌어 깐죽거려 두고 싶다.

지금 시단詩壇에서 우리말의 율을 실어 흥하게 해주는 시인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어떤 국회의원의 딸] 같은 시들을 보면 율격律格의 속박을 벗어나도 자연스레 들고나는 숨질 따라 걸림 없이 우리말 소리를 율에 태워 율동律動하는 시가 아주 자유롭게 지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어느 날 엄마가 국회의원인 학생 딸이

휴지를 움켜쥐고 울면서 집에 오네

그 엄마 국회의원이 황당하여 물었네

왜 그러니?”

내가 버린 휴지가 아닌데 국회의원 딸이

휴지를 보고 그냥 간다고 할까봐

주어오느라 그러지!“

[어떤 국회의원의 딸]

 

<>

어느 날 엄마가 국회의원인 학생 딸이 휴지를 움켜쥐고 울면서 집에 오네 그 엄마 국회의원이 황당하여 물었네 왜 그러니?” “내가 버린 휴지가 아닌데 국회의원 딸이 휴지를 보고 그냥 간다고 할까봐 주어오느라 그러지!“

 

[어떤 후문]과 같은 작시의도作詩意圖라면 <>과 같이 행가름 않고 <>처럼 줄줄이 뇌어 수군수군 해버렸을 터이다. 그런데 왜 행가름 하여 [어떤 국회의원의 딸]<>이 되게 작시作詩했을까? 오 시인이 띄어쓰기 국문법國文法을 준수해서 <어느 날 엄마가 국회의원인 학생 딸이>로 시행詩行을 잡아둔지라 처음엔 그냥 눈으로 읽어가게 된다. 그러나 <>을 눈으로 훑어가다 절로 되돌아가 입은 그만 시행을 따라 <어느 날 엄마가국회의원인 학생 딸이>처럼 날숨을 따라 나오는 말소리가 울림을 따라 읊어짐에 새삼 놀라게 된다.

가락의 맛이 전해보려는 의도意圖를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실은 율미律味가 의미意味에 앞섬을 절감切感하는 사람이 곧 시인이다. 가락의 맛을(律味) 먼저하고 뜻의 맛을(意味) 뒤로 함은 시인의 순명順命이다. 우리 시단詩壇에는 의미를 중시重視하고 시상詩想을 살려내려 율미律味를 서슴없이 경시輕視해버리는 시류詩流가 있는지라 오 시인도 이런 시단시류詩壇時流를 외면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오하룡이란 시인은 날숨과 들숨의 자연스러운 섞바뀜을 음성音聲이 타야 말의 율이 생기고 뜻 이전에 소리 들림이 울림이 되어 청음聽音 그것이 곧 즐김이(說之) 됨을 스스로 터득했기에 소년少年일 때 이미 시를 지었을 것이다.

<>과 같이 죽죽 이야기해도 될 터인데 <>과 같이 행가름을 하여 작시作詩했을까? 날숨과 들숨의 자연스러운 섞바뀜을 따라 율을 타게 하면서 이야기의 속내를 넌지시 던져두고 싶어서이다. [어떤 국회의원의 딸] 끝 행 주워오느라 그러지!“ 여기에 이르면 <>이라면 갑질이 갑질로 이어지지 않고 금수저가 금수저로 대물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 전에 시행詩行의 말소리가 풍겨주는 가락()이 먼저 가슴에 척 와 닿아 철석 울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어머니란 자기가 국회의원이니까 자기 딸도 국회의원 대접받아야 한다>는 역겨움이 드러나고 <어머니를 국회의원으로 둔 딸은 그것이 어줍지 않음을 알고 있다니 기특하다>는 상쾌함이 뒤섞이어 오 시인이 [어떤 국회의원의 딸]에 숨겨둔 속내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이처럼 그는 첫 시집 모향모향母鄕을 통하여 처음부터 선율후의先律後意의 시도詩道를 걸어갈 시인임을 보여주었으니 그의 시도詩道에서 산문시散文詩란 일종의 시류時流를 거스르지 않음일 뿐이지 그에게 시의 본시本始는 숨결과 음율音律이 어울리게 행가름 하는 시를 창작해 감에 있는 것이다.

시란 학식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학식이 시를 못나게 하는 수렁이 될 수도 있다. 본래 시가 이런지라 시인이라면 인간이 태초부터 열지고언지(說之故言之)하고 싶어 시가 생겨났음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 사무치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시의 본시本始가 뜻()이 먼저()가 아니라 가락()이 먼저임을 저절로 사무친다. 오 시인의 첫 시집 모향母鄕은 그가 시의 본시本始가 선율후의先律後意에 있음을 천성적天性的으로 감지感知하고 시도詩道를 터왔음을 [어떤 국회의원의 딸]에서도 짚어낼 수 있다.

[어떤 국회의원의 딸]은 입으로 읽다가 읊게 되는 시이지 눈으로 보기만 해도 되는 그런 산문시가 아니다. 그런데 오 시인은 동시童詩를 마련해보고 싶다는 의중意中을 내비친 적이 있다. 동시에서 시상詩想이란 의미 따위는 참으로 별것 아니다. 율미律味가 넘쳐나지 않으면 유아幼兒는 본체도 않는 까닭이다. 오 시인이 이를 모를 리 없을 터인데 그런 의중을 내비친 것은 시인으로서 가야 할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고 그의 시도詩道는 정도正道를 떠나 있지 않음을 암시해준다.

 

어쩌다 내가 한 살이 많아

오빠가 되었지

내 큰 이모 막내딸 권영자

 

예나 지금이나

외톨이 나를 오빠라 불러주어

고맙고 찐한 여동생

 

진한 벤졸냄새 풍기나

동생은 영도 해안가 오래된

세탁소 주인

 

나는 어디를 헤매 돌았던가?

이른 후반 우리 오누이

막차 나란히 탔네

[막차]

 

어느 누구이든 [막차]를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운명임을 시인이 마련한 [막차]는 눈물겹게 달려와 오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가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는 깊은 뜻을 마주해 보게 한다. [막차]는 너는 하차장을 얼마쯤 남겨두고 인생이란 여정(旅程)을 줄달음치고 있는지 손꼽아보라 한다. 아무리 슬퍼할 것 없다고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하는 정거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은 구슬플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이런 우리네 인생을 너는 어찌하고 있느냐고 서글프게 그리고 애잔하고, 아니 달달하게 우리를 꼬드기면서 [막차]는 자문自問해보고 나름대로 자답自答해 보라고 한다. 이것이 [막차]가 채진採眞하여 풀쳐 생각을 담아 마음속을 풀어보게 하는 힘이다. 시는 이런 힘을 간직해야 한다.

물론 [막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 시인의 시는 입으로 읽게 하는 시든 눈으로 보게 하는 시든 거의 다 자문해보고 자답해보게 이런저런 꼬투리를 넘겨준다. 그리하여 아 그러네!’ 아 그렇구나!‘ 이렇게 미처 걸머잡지 않았거나 알아차리지 못했던 인생의 명암明暗들이 밀물이 되거나 썰물이 되어 메아리쳐 온다. 이러한 뒤끝이 바로 그의 시가 간직한 채진採眞의 감칠맛이다. 그 감칠맛이 풀쳐 생각으로 이끌어가 맺힌 인생을 풀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시가 듣기로는 부드러운데 생각하기를 조여 채진採眞해보라는 맥놀이를 강하게 하는 감칠맛이다.

감동해 보라는 시보다 채진採眞해 보라는 시가 뒤끝이 오히려 강한 맛을 낸다. 자문自問하여 인생의 참다움()을 스스로 캐내보라() 채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채진採眞하고 나면 누구나 저마다 풀쳐 생각을 거치게 되고 따라서 후련해진다. 간난(艱難)하여 삶이 메말라 갈수록, 풀쳐 생각을 거칠수록 그만큼 삶의 목마름이 절로 촉촉해진다. 왜냐하면 채진採眞으로 말미암아 삶을 옹색하게 하는 것들을 스스로 풀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 시인의 시들은 꽁꽁 묶여 맺혔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풀어버리고 너그럽게 관서(寬恕)하는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음을 넌지시 가리킨다. 그래서 저 [막차]가 꼬드기는 것처럼 시인 오하룡吳夏龍의 시들은 저마다의 삶을 <풀쳐 생각>에 얹어 채진採眞하고선 아 그러네!‘ ’아 그렇구나!‘ 술술 삶의 이런저런 실마리를 풀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한사코 <풀쳐 생각하여> 채진 해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