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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다리 위에 지은 기억의 집 복원

—이부용 시인의 시세계




공영해(시인)



필자와 이부용 시인과의 인연은 2000년대 초 시동인지 ‘포에지·창원’을 결성하면서부터였다. 둘은 다 늦은 나이에 문학에 입문하여 진지하게 시와 사람을 알아가던 때인지라 금방 의기투합하게 된다. 영문학자인 그는 견문이 넓고 생각이 서구적이며 시작에 임하여서는 허세가 없고 염결한 시인이라 존경할 만하였다.

이번에 발간하는 《지산나박실》은, 첫 시집 《빈 수레를 끌고 간 겨울》을 상재한 지 14년 만에 내는 제2시집이다. 삶의 역정에서 만난 기억의 삽화들이 유화처럼 펼쳐진다. 아무 붓을 써도 노을의 빛깔은 채도가 다르고 강물은 굽이쳐 흐른다. 그의 기억은 출생지인 고향 ‘척번정리’에서부터 출발한다. 청년시절의 강물과 열사의 사막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밤이 기다리고 있다. 밀양의 곡강 언덕에 하얀 집을 새로 지었고, 30여 년 공직 생활로 괭이질이 손에 익지 않았을 터인데도 청주 계원리에다 ‘詩몽苑’을 개척, 사과나무를 가꾸며 보란 듯 ‘산마을’의 주인이 되어가는 그가 있다. 붉은 사과 향을 택배로 보내 거둠의 기쁨을 지인들과 함께 누리던 그가 지난해 다시 ‘지산나박실’을 떠나 충남 공주 교외 솔숲 드리운 산자락으로 옮겨 두 채의 하얀 집을 짓고는 이 시집을 내는 것이다. 바다는 바다의 역할을, 해는 해의 역할을 다하듯 시인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시의 종교, 그/ 믿음의 파도 소리 들려오는/ 바닷가를 혼자 걷고 있다,”고 〈시인의 말〉에서 근황을 말하고 있다. 

이부용 시인은 그의 자전적 시론, 〈내 존재의 뒤안길과 사랑의 무늬들〉(《시향》 13호·2016)에서, “시가 거짓이라 하지만 그 거짓은, 창조이고 현실의 확장이다. 시는 역설적으로 거짓의 진실과 미학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시인은 현실의 확장을 통해서 실재에 도달함으로써 성취감과 동시에 미학을 음미하게 되므로 진실의 선을 창조해가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은 바로 천국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진실의 선을 창조해가는 사람들’이 시인일 때 시인들이 사는 세상은 ‘천국’이 된다. 늦깎이 시인이며 농부 시인인 그가 종심從心의 마루턱에 올라  과거의 시간 위에 펼쳐놓은 그리움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에 짓고 있는 시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순서는 이 시인의 삶의 여정을 따른다. 그의 믿음에 대한 동행이다. 


1. 돌담의 시간, 그 섬의 시간 


산마을


저녁노을 


돌담길 


소녀의 집 


처마 끝 


걸어놓은 


등불 


깜박깜박 


발돋움 


휘파람 


파랑새 


그 소년 

—〈휘파람〉 전문


〈휘파람〉은 산문적 경향의 시와 달리 조사와 서술어를 생략한 39음절로 쓴 단시이다. 이따금 떠오르는 ‘산마을’에 대한 단편적 생각을 시인은 마치 징검돌 놓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던져놓고 있다. 각 행을 명사 배열한 것은 생략의 여음을 돌게 하여 시를 보다 생기 있고 함축미를 높이기 위한 의도적 작법이며 행과 행의 행간 배열을 넓힌 것은 사유의 폭을 넓히기 위한 시인의 의도이다

‘휘파람’은 입김을 불어서 내는 맑은 소리를 말한다. 휘파람은 일종의 통신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는데, 음악적으로 접근하면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거나 자신의 존재 또는 위치를 여성에게 알려 주는 신호이다. ‘휘파람’이란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는 유년의 정감을 불러온다. 군더더기가 없다. 화자의 내면세계가 그대로 한 폭의 정감 어린 풍경화를 그려낸다. 시인은 ‘소년’이 되어 소녀의 집 앞을 지나며 휘파람을 분다. ‘산마을’은 고향의 대유어,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저녁노을에 젖은 산마을 돌담길을 소년이 따라 걷고 있다. 어느새 소녀의 집 돌담머리에 이른다. 소녀네 집 처마 끝에 걸어놓은 등불이 깜박깜박, 소년을 부르는 듯하다. 등불의 깜박임은 어쩌면 소년을 부르는 소녀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소년은 돌담을 짚고 발돋움하며 소녀에게 무작정 휘파람 신호를 보낸다. 마음은 파랑새가 되어 소녀에게로 날아가고 싶은 거다. ‘그 소년’은, 산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낸 소년들 모두로 확대될 수 있다. 

〈휘파람〉의 두근대는 그리움과는 달리 〈왁쌔기〉는 연민의 아픔을 우리들에게 주는 작품이다. 〈왁쌔기〉를 본다.


막걸리 사발로 새경을 되질한 동네머슴 왁쌔기

몸과 마음 새까맣게 타 버린 그의 이름

포승 없이 포박당한 가난과 홀아비의 분노

밤 골목길에 비틀비틀 온 마을에 흩뿌려도

고요 깊숙이 가라앉던 산마을에 새벽이 오면 

물안개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앞개울의

흰 찔레꽃 흐드러지게 피는 물소리 들으며

둑길 맨 먼저 길게 끌고 간 그가

동녘 하늘 어둠 파헤쳐 캐낸 태양 바지게에 지고 와

집집마다 한 개씩 골고루 나누어 주다가 

어느 날 부어오른 배 골목길 돌담에 기대어 놓은 채

저녁 종소리 따라 하늘로 가버린 

막걸리 사발로 새경을 되질한 왁쌔기 

머나먼 고향 

—〈왁쌔기〉 전문


‘왜가리’를 경상도에서는 ‘왁새’ 또는 ‘왁쌔기’라 한다. 울음소리가 ‘으악으악’ 한다 하여 ‘으악새’로도 알려진 새이다. 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인물을 흔히 ‘왁쌔기’라 한다. 서사의 배경은 산마을, 고용인에게 곡식을 새경으로 주던 근대이다. 시인은 이름 대신 ‘왁쌔기’로 통하는 ‘동네머슴’, 주변인의 삶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새경으로 받은 곡식을 되로 퍼 주고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왁쌔기, 몸과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린 왁쌔기, 가난한 홀아비 왁쌔기. 그가 ‘밤 골목길에 비틀비틀’거리며 삶의 ‘분노’를 ‘온 마을에 흩뿌’린다. 그가 그렇게 분노를 흩뿌려도 산마을은 ‘고요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의 주사를 수용한다. ‘새벽이 오면’ 맨 먼저 일어나 ‘동녘 하늘 어둠 파헤쳐 캐낸 태양 바지게에 지고 와/ 집집마다 한 개씩 골고루 나누어’ 주는 왁쌔기이다. 시어 ‘물안개’, ‘앞개울’, ‘흰 찔레꽃’, ‘물소리’를 통해 시인은 자연인 왁쌔기의 순수한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왁쌔기가 “어느 날 부어오른 배 골목길 돌담에 기대어 놓은 채/ 저녁 종소리 따라 하늘로 가버린” 것이다. ‘막걸리 사발로 새경을 되질하던’ 왁쌔기, ‘몸과 마음 새까맣게’ 탄 왁쌔기, ‘부어오른 배’ ‘돌담에 기대어 놓은 채’ ‘하늘로 가버린’ 왁쌔기. 원인–증세–결과의 순으로 수미상관. 마지막 행 ‘머나먼 고향’에서 시인은 주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여운으로 남기고 있다. 

이런 주변적 삶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곡강–이웃 백씨〉에서도 나타난다. 어릴 때 뇌성 소아마비를 앓은, 언제 만나도 싱긋이 웃는, “두 번째 아내의 신발도 수산다리 건너간 뒤/ 긴 시간 붙들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슬래브 집 아들 백씨. “사람들이 하루 종일 내던진 언행의 쓰레기들을/ 서편 하늘에 쓸어 모아 불 질러 놓은 빛깔/ 언덕 위에 서서 소리 없는 웃음으로 매만지다가/ 강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그의 등 뒤/ 이 세상의 뿌리 하나가 어둠 속에 뻗어 있”음을 시인은 보여 준다. ‘어둠 속에 뻗어 있’는 ‘세상의 뿌리 하나’는 백씨의 정직한 삶을 암시한다. 


저기 낙동강물이 흐른다

추억은 

강가의 꽃봉오리 되어 새색시 젖꼭지처럼 

퉁퉁 불어 있다

물빛으로 갈대밭 사랑을 물들이다가 지웠다가

자꾸만 매만지는 시간의 토막들 사이 

일웅도一雄島 모래밭 하이얀 파꽃이 다시 일어서고

태화고무 신발공장 순이들 지어준 갈매기 이름

흰 까마구들

하구언 지나 자유의 날개 저어 온다

돛배 찾아왔던 그날 그 소녀의 마음

은빛 물결로 인다

겨울 끝 갈대들의 속삭이는 모래톱 이야기 섞여

한 송이 저녁노을로 꽃필 때

조용히 눈을 뜨는 저 도시의 불빛들

—〈일웅도에서〉 전문


일웅도日雄島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 2동에 소재한 낙동강의 하중도이다. 1987년 낙동강 하굿둑 건설과 함께 을숙도와 합쳐지며 이름을 빼앗긴 추억의 섬이다. 무성한 갈대숲과 고즈넉한 수로, 똥다리, 갈대밭 사이의 밀어, 장엄한 낙조는 70년대 젊은이들에게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청년기를 70년대 부산권역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면 일웅도에 대한 추억 ‘한 송이’쯤은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 이부용 시인의 〈일웅도에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아련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화자는 흐르는 낙동강 물을 바라보며 일웅도에 대한 추억에 잠긴다. 시인은 ‘추억’을 은유와 직유로 교직交織하여 보조관념을 ‘꽃봉오리’, ‘새색시의 젖꼭지’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매혹적이고 육감적 표현은 우리들의 흥미를 유도하는 기능이다. ‘꽃봉오리’가 ‘새색시 젖꼭지처럼/ 퉁퉁 불어 있다’는 ‘꽃봉오리’는 피어야 하고 퉁퉁 불어 있는 젖꼭지는 수유되어야 한다. 일웅도에 대한 시인의 모성애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갈대밭 사랑’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성한 갈대밭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보고도 못 본 체했던가. 자꾸만 매만져지는 ‘시간의 토막들’은 추억에 대한 애착, 삽화이다. 다시 일어서는 ‘파꽃’은 남성적 이미지로, 추억의 매체이다. ‘하이얀 파꽃’에 대한 기억은 ‘태화고무 신발공장 순이들’을 불러온다. 70년대 부산의 제1차 산업은 신발 사업이었다. ‘태화고무’는 수많은 공장 중의 하나. ‘흰 까마구들’은 자유를 갈망하는 순이들이 붙여 준 갈매기의 애칭. 휴일을 맞아 돛배를 타고 찾아와 갈매기들이랑 놀던 소녀들의 마음은 은빛 물결처럼 반짝일까. 겨울의 끝자락, ‘갈대들의 속삭이는 모래톱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저녁노을’과 ‘도시의 불빛’까지 잊을 수 없는 일웅도. ‘하이얀 파꽃’, ‘흰 까마구’, ‘은빛 물결’ 등 백색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시인은 순수 자연의 원형 복원을 갈망하고 있는 듯하다. 


2. 인간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


리야드의 밤 열대야에

아다모의 노래 눈이 내리고 있었네

톰블라내져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네

그리움의 절규 와닿는 한여름 밤

한 잎 두 잎 사랑의 눈송이 흩날리고 있었네

추억의 무늬들 사이로

아득히 멀어져 간 겨울밤이 밀려오고 있었네

옛 고향 초가집에 깜박이던 등잔불이 

창밖의 별빛으로 옮겨와 빛나며

사막의 어둠을 절였어도

나의 침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네

지친 하루 곱게 접어 둔 채

어둠 속에 그리움 한입 물고 

눈 내리는 사막의 밤을 들고양이처럼 

걸어가고 있었네

—〈한여름 밤에 눈이 내리고 있었네〉 전문


‘리야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이다. 이부용 시인은 1978년 한국관광공사 공채로 입사하여 PATA총회 준비 사무국에 파견 근무하다가 신화/사우디 합작회사로 자리를 옮겨 4년여 동안 리야드에 거주한 적이 있었다. 이 시는 이때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아다모’는 프랑스 샹송 가수 살바토레 아다모Salvatore Adamo이다. 70년에 우리나라에도 널리 애창되던 프랑스 노래 〈톰블라내져Tombe La Neige(눈이 내리네)〉는 하얀 고독의 노래이다.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는 지금도 올드팬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적막한 침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리야드의 밤 열대야에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고 어느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규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한 잎 두 잎 사랑의 눈송이’가 흩날린다. 이 ‘추억의 무늬들 사이’ 겨울밤이 밀려와, 창밖의 별빛마저 ‘옛 고향 초가집에 깜박이던 등잔불’로 반짝이는 듯한다. ‘나’의 그리운 마음은 톰블라내져이고 ‘눈이 내리는 사막의 밤을 들고양이처럼/ 걸어가고 있었’던 거다. 추억의 고향마을 등잔불이 눈 내리는 노래 위에 오버랩되고 있다. 


예약 시간을 들고 뛰고 있다 다글다글 시간이 보채는 모습이다 바통을 이어받은 KTX가 헐떡이는 시간을 싣고 벌판의 사색을 깨뜨리며 서울로 달려간다 파편들이 강의 머리에 박히며 몇 개의 강들이 뒤로 나자빠진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으려는 철로의 평행선에 몸을 맡긴 시간의 배설물 수많은 고뇌들이 차창 밖으로 내던져진다 햇볕이 눈빛으로 닦아내고 바람이 부르튼 손으로 줍기도 하지만 쉬이 줄어들지 않는 지금은 자연이 겪는 수모의 시대 오늘도 희열에 취한 열차가 숨 가쁘게 내달리고 있다

—〈시간을 싣고 가는 열차〉


어제의 시간은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진다. 시간은 소멸이며 또한 재생의 모티브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내일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질주하는 시간의 모습을 시인은 표지 시로 올려놓고 있다. 〈시간을 싣고 가는 열차〉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내용상 4연. “~ 달려간다”까지가 첫 연, “~ 내던져진다”까지가 둘째 연, “~ 수모의 시대”까지가 셋째 연, “~ 내달리고 있다”까지가 넷째 연이다. 시인은 행과 연 가름 없이 산문시처럼 시상을 풀어놓고 있다. ‘뛰고 있다’, ‘달려간다’, ‘자빠진다’, ‘내던진다’, ‘내달리고 있다’와 같은 동태적 서술어의 반복은 속도감을 주기 위한 배치. 그러면서도 시인은 시의 흐름을 단숨에 읽히도록 하지는 않는다. ‘시간의 배설물’, ‘수모의 시대’에서 호흡을 추스르도록 하고 있다. 뛰고 달려가고 내달리는 열차와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첫 문장에서 (무엇이) ‘예약 시간을 들고 뛰고 있다’. ‘다글다글’ ‘보채는’ ‘시간’은, ‘예약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의 시각적 표현이다. 현대인은 누구도 시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샐러리맨의 시간 운행은 더욱 그렇다. ‘예약’은 미리 정해놓은, 꼭 이행해야 할 사회적 약속이다. ‘바통을 이어받’음에서 임무 수행의 확신감을 KTX는 부여받게 된다. 한국고속철도를 뜻하는 ‘KTX’가 2004년부터 부산–서울 간 운행되면서 출근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 ‘KTX’는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현대문명의 환유(이 시인은 환유법에 능하다). 바통을 넘겨받은 고속열차는 ‘헐떡이는 시간을 싣고 벌판의 사색을 깨뜨리며 서울로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헐떡이다니? 이는, 무형의 시간을 의인화한 시각적 표현이다. 평화롭게 펼쳐진 벌판의 고요함을 시인은 ‘벌판의 사색’이라 하고 ‘벌판’을 인격화하여 심리적 점층을 꾀하고 있다. ‘벌판’은 ‘자연’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목적지는 ‘서울’,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집결지이다. 1연에서 우리는 벌판의 고요를 깨뜨리며 요란하게 달리는 고속열차를 만난다. 사색의 여유도 없이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의 모습을 ‘KTX’와 들판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2연의 상황은 점층적이다. 시인은, ‘파편들이 강의 머리에 박히며 몇 개의 강들이 뒤로 나자빠’지게 한다. ‘파편들’은 ‘벌판의 사색을 깨뜨’린 조각, 다시 말해 깨뜨려진 ‘사색’의 조각이다. ‘벌판의 사색’을 깨뜨리고도 부족하여 ‘강의 머리에’ 파편을 박아 ‘몇 개의 강들이’ ‘나자빠’지게 한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연출이다. ‘벌판’과 ‘강’은 자연의 환유. 열차의 질주는 ‘사색’을 거부한다. 천천히 걸어가며 맛보는 벌판과 강으로부터의 사색, 그 느림의 미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 치 오차도 허락지 않’음은 현대문명의 정밀성을 암시하는 수식언. 시인은 이제 ‘시간의 배설물’, 곧 시간의 속도 때문에 겪는 일상의 쫓김, 그 초조함과 ‘수많은 고뇌들이 차창 밖으로 내던져’지게 하여 벌판과 강을 두고도 사색할 시간을 누리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 못마땅함을 보여준다. 2연에서 우리는 조금의 사색도 허용치 않고 질주하는 열차를 만난다. 

이제 시인은 3연에서 할 말이 있다. 숨 가쁘게 열차를 휘몰아 가며 시인의 의식은 열차 바깥의 세계를 본다. 차창 밖으로 던져지는 시간의 배설물 즉 속도 문명으로 야기되는 인간의 고뇌와 삭막감을 ‘햇볕’과 ‘바람’이 스스로 없애려 하지만 쉬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금’을 ‘자연이 겪는 수모의 시대’라 고발한다. 벌판과 강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여유의 부재, 그로 인해 유발되는 인간성의 상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오늘도 희열에 취한 열차가 숨 가쁘게 내달리고 있’지만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돌아보며 살아가기를 주문하고 있다. 시간의 속도성으로 인하여 관심 밖으로 밀려난 자연과 미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을 되돌아보게 하는 반어적 역설이다. 

인간은 시간 앞에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아래 시는 시간이 엮어가는 인간의 삶을 유희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시를 본다. 


지칠 줄 모르는

하나님 

혼자 즐기는

반복 게임

째깍거리는 

소리


     

—〈사계〉 전문


행가름이 특이한 시이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사계의 변화로 대체시킨 순발력이 돋보인다. ‘하나님’ 혼자 하는 게임이라 하였으니 시행도 배열도 달라야 하는 것일까. 첫눈에 정지된 시계추를 보는 느낌이다. 시인은,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을 혼자 게임이나 즐기는 존재로 설정하여 인간과의 친근감을 이끈 후 절대자가 하는 게임이 어떤 게임인가를 ‘째깍거리는/ 소리’로 청각화하여 시간놀이라는 유추의 빌미를 주며 터질 듯한 긴장감에 싸이게 한다. 

‘생로병사’의 시각적 배치는 흥미롭다. 이는 놀이판의 모양이며 시간의 연속성을 차단한 표현이다. ◇(마름모)꼴을 가로쓰기 읽기로 이해할 때 시계 방향으로 읽도록 ‘생-사-로-병’으로 쓰거나 ‘생-로-병-사’로 배치하지 않고 시인은 ‘생-로-사-병’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도적 배열은 질서 비틀기에 다름 아니다. 지칠 법도 한데, 실수를 한 번쯤은 할 법도 한데 ‘하나님’은 이 게임을 혼자서 즐기고 있다. 

이 마름모꼴의 의도적 문자 비틀기는 ‘하나님’의 반복 게임, 곧 창조주의 거듭된 질서 강요에 대한 시인의 반발에 다름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즐기라는 ‘하나님’의 참뜻을 잘못 받아들인 시인 자신의 마음을 행간에 숨긴 내밀한 역설적 고백이다. 


용지공원 한 모퉁이에

벤치 하나 앉아 있다

귀와 입 닫고

멍하니 먼 곳 보고 있는 외톨이

등 뒤만 보이는 그의 곁으로

가을바람이 기웃거리는데

제 그림자조차 목을 빼고 있는 지금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 공원에서

멀어져 가는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알 수 없는 그의 기다림 하나

자꾸 발길에 걸려 차인다

—〈고도를 기다리며〉


아일랜드 극작가 베케트의 희곡에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다. ‘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의 신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지만 막연히 존재하리라고 믿고 있는 대상일 뿐이다.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된 삶을 막연한 기다림이라는 두 인물 간의 행동을 통해 전통적인 사실주의극에 반기를 든 전후 부조리극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명작이다. 제목이 같다고 하여 베케트의 희곡과 비교해서는 아니 된다. 이부용 시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짧지만 희곡 이상의 긴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내용상 2연, 선경후정의 구성으로 읽는다. 7행 ‘~ 지금’까지를 전반부, ‘아무래도’부터 끝까지를 후반부라 하자. 배경은 가을, 용지공원.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원 한 귀퉁이의 벤치에 ‘나’의 시선이 머문다. 두 번째 문장의 ‘벤치 하나’는 이 시에서 중요한 눈이다. ‘벤치 하나’는,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을 무정물인 벤치와 동일시하여 표현한 ‘외톨이’의 시적 변이. 벤치맨은 풍경화의 일부, ‘귀와 입 닫고/ 멍하니 먼 곳 보고 있는 외톨이’로 구체화된다. ‘멍하니 먼 곳 보고 있’음은 기다림에 지친 대상의 앞모습이고 ‘등 뒤만 보이는’은 뒷모습이다. 기웃거리는 ‘가을바람’이 감각적 분위기를 돋운다. ‘제 그림자조차 목을 빼고 있는 지금’은 간절한 기다림의 모습이요 저녁 무렵임을 암시하는 말일 게다. 용지공원 한 모퉁이, 가을바람이 기웃거리는, 저녁 무렵, 멍하니 벤치에 앉아, 먼 곳을 보고 있는 외톨이를 우리는 만난다. ‘외톨이’에 대한 정보는 없다. 외톨이가 보고 있는 ‘먼 곳’은 어디인지…. 

다음 연을 본다. 앞 연 ‘외톨이’의 상황을 화자 ‘나’가 개입하여 풀어 준다.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보이질 않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것도 오지 않는’ 공원에서 화자는 대상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멀어져 가’면서도 ‘나’는 ‘그’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진다. 멀어질수록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알 수 없는 그의 기다림 하나’는 무엇일까. 오직 하나, 간절한 기다림. 고도를 기다리는 변두리 사람들의 모습을 지울 수 없다. 화자는 ‘벤치 하나’의 모습이 내내 눈에 밟히는가 보다. 아니 시인 스스로 쓸쓸히, 또는 간절히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3. 지산나박실에서 시간의 홍로를 얻다 


오카리나 소리 위에  

사랑의 기쁨이 흐르네  

숲속의 산새 한 마리 

띄엄띄엄 배음을 끼워 넣는 

홀딱 벗고 홀딱 벗고 

내 귀가 더 넓어지네  

사랑하는 마음이 입고 있는 옷 

홀딱 벗은 나  

작은 음악회 풍경 어우르는     

네 소리의

징검돌을 딛고 

오카리나의 여울을 건너는 

부푼 그리움의 

등에 업혀 가네 

—〈지산나박실–작은음악회〉 전문


명예퇴직으로 교단생활을 떠나며 밀양 곡강의 삶도 정리가 된다. 또 다른 그리움을 찾아 그의 발이 닿은 보금자리는, 고향 척번정리가 아닌 청주시 낭성면 지산나박실 마을이다. 사과과수원 ‘詩몽苑’은 이웃인 미원면에 있다. 연작시 〈지산나박실〉은 그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전원생활의 땀과 이슬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작은 음악회’는 ‘사랑의 기쁨’이 오카리나 리듬을 타고 흐르는 전원음악회이다. 오카리나의 투명한 햇살을 닮은 특유의 소리 빛깔에 ‘숲속의 산새 한 마리’가 ‘띄엄띄엄 배음을 끼워 넣는’다니, 오카리나 소리와 어울릴 산새 소리가 참 궁금하다. 산새도 산새 나름이다. 시인은 굳이 어떤 새라 말하지 않고 ‘홀딱 벗고 홀딱 벗고’라는 말로 슬쩍 넘어가려 한다. 홀딱 벗는데 ‘내 귀가 더 넓어’질 수는 없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는 ‘홀딱벗고새’로 불리는 검은등뻐꾸기의 울음소리, 청각적 이미지이다. ‘홀딱 벗고’는 아름다운 미망인에게 마음을 뺏긴 큰스님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오카리나의 맑은 소리와 ‘홀딱벗고새’의 배음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내 귀가 더 넓어’짐은 정감의 폭, 몰입의 정도이다. 이부용 시인은 말 한 마디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입고 있는 옷/ 홀딱 벗은 나”에서 음악회에 동화된 자아와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다. 작은 음악회와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띄엄띄엄 배음을 끼워 넣는’ ‘산새 한 마리’의 울음소리, 그 울음소리의 “징검돌을 딛고/ 오카리나의 여울을 건너는/ 부푼 그리움의/ 등에 업혀 가”는 자아의 모습이 참 행복해 보인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이 음악회를 굳이 시인은 ‘작은 음악회’라 하고 있다. 시인은 자연 앞에 늘 겸손하다.


젊음의 오솔길

가없이 걷다가

큐피드의 화살에 꽂힌

뜨거운 사랑 이야기

한 알 한 알의 시

햇빛 튕기는 빨간 보석들을 

계원마을 

가을 산모롱이에

동긋이 걸어 놓았다

—〈사과밭〉 전문


위의 시 〈사과밭〉은 절정의 시이다. 나박실에 삶을 두고 미원면 계원리 산촌에 사과 과수원 ‘詩몽苑’ 농부로 귀촌한 뒤 거둔 수확물에 대한 시인의 마음을 담은 시이다. 그는 이 시를 사과 상자에 붙여 사과를 판매하기도 하였다. 시인이 농사지은 사과를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는 사과를 ‘사랑 이야기’, ‘한 알의 시’, ‘빨간 보석들’이라 하였다. 땀의 결과인 사과가 수식의 옷을 입은 은유로 빛나는 시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우랴. 계원마을 ‘가을 산모롱이에 동긋이 걸어 놓’을 만큼. ‘동그스름하게’란 뜻으로 쓰인 ‘동긋이’가 꽃봉오리처럼 봉긋한 느낌까지 준다. 첫 수확이라며 그가 보내 준 홍로 한 상자의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하리.

가없이 걸어온 젊음의 오솔길 끝에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을 이부용 시인은 걸어 두고 있다. 계원마을의 시간은 시 〈북촌〉에서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펼쳐진다. 

떼 지어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 아침 늦도록 서성거리는 “달천천 물안개”, 심부름꾼 “중고 꼬마 라보 화물차”, “슬픔을 잊고 살았던 폐가 한 채”, 한여름 오후 “오씨 집의 개 짖는 소리”, 빠알갛게 익어가는 사과 홍로의 향기, 저녁 무렵 이 집 저 집 피어나는 “굴뚝 연기”, 겨울 꽃으로 피는 골목길 “가로등 불빛”, 아침 일찍 부럭데기 화물차 몰고 일터로 나가는 “검은 장화 신은 은하당 아주머니”, “비 오는 날 마음 착한 이장이/ 어쩌다 부는 색소폰 소리”, 포동포동 겨울을 살찌우는 “오씨의 서툰 장작 패는 소리”, 탁주가 없는 탁주리 촌로의 웃음…….

이 시인의 역마살이 이제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다. 과수원에 사십만 원을 들여 원두막 지었다기에 역마살을 끝내라고 ‘徙心亭사심정’이란 현판을 만들어 보냈으나 그는 새로운 고향을 찾아 지산나박실을 떠난다. 


4. 연종리 솔향마을의 시간

 

이제 이부용 시인의 여정은 끝이 나는가. 인생 항해의 마지막을 쉬어가려 닻을 내린 연종리에 두 채의 하얀 집을 짓고 살면서 그간의 삶을 《지산나박실》에 담아내고 있다. ‘지산나박실’은 우리들에게도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자연 마을, 정겨운 고향마을이었음을 기억하며 〈이 집이 말하네〉를 본다 


연종리 솔향마을

산변에 사는 두 채의 집

어미와 새끼 노루라며

솔숲을 사랑하는 눈동자

창밖의 푸르름이 싱그럽네

이 마을 자주 들르는 바람이

행복 한가득 안고 서 있는

두 마리 산노루의 눈빛에 걸려

솔숲 닮은 풀밭에서

마음 비운 기쁨을 파닥거리네 

—〈이 집이 말하네〉 전문


이부용 시인의 ‘하얀 집’ 짓기는 현재 충남 유구읍 연종리에서 발목이 잡힌다. ‘연종리 솔향마을’은 이 시인의 현주소지이다. ‘어미와 새끼 노루’로 활유된 두 채의 집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본채(어미)와 사랑채(새끼 노루)의 귀여운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에 동화된 시인의 순수한 삶을 만난다. 노루의 눈동자는 맑은 창, 푸르고 싱그러운 솔숲을 가득 담고 있는 창이다. ‘두 마리 산노루’가 사는 ‘솔향마을’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외부자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 ‘바람’은 ‘행복 가득 안고 서 있는’ 이 두 채의 집, ‘산노루의 눈빛’을 벗어날 수 없다. 솔숲을 닮아 푸르고 싱그러운 풀밭에서 새처럼 날개를 파닥거리며 ‘마음 비운 기쁨을’ 함께하는 것이다. 무형의 바람을 ‘파닥거리’게 하여 무정물인 집을 활유화한 산노루의 벗이 되게 한다. ‘마음을 비운 기쁨’을 통해 우리는 화자의 내면세계, 곧 비움의 미학을 엿보게 된다. 이부용 시인은 철저한 자연인이다. 

시인의 고향 척번정리는 어머니와 누나, 소녀와 숙모, 왁쌔기의 시간이 기다리는 산마을이었다. 리야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열대야의 밤이, 일웅도에서는 태화고무 순이들의 시간이, 곡강에서는 ‘하얀 집’과 몸이 불편한 이웃 백씨의 시간이 있었다. 지산나박실의 시간은 사랑과 음악이 있고 홍로 사과가 붉게 익는 시간이었다. 강과 바다, 아침 태양의 시간을 이 시인은 찾아 나섰다…. 

이부용 시인의 ‘시간’은 도시적 목가적 배경과 만나 상충의 이미지를 펼치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시의 문법이 거칠고 낯설어 보이기도 하지만 통속을 거부하는 시인의 몸짓은 정직한 주제를 굵직한 남성적 어조에 담아 우리들의 시선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 준다. 이따금 휘파람을 불며 고향마을로 안내를 하다가도 ‘자연이 겪는 수모의 시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건강한 ‘바람’이 되어 시간 여행을 하게도 한다. 시인은, 확실히 ‘시간’의 다양한 모습 위에 강과 산마을을 배경으로 한 자아의 삶을 재구성하여 ‘들판의 사색’과 휘파람 소리, 그리고 ‘오카리나의 여울’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이 시인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시의 종교, 그/ 믿음의 파도 소리 들려오는/ 바닷가”의 시간을 더욱 보람 있게 누릴 것이다. 이부용 시인의 건강한 시를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