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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비평

시인과 시에게 되묻는다

 

전문수   본지 주간, 문학평론가, 창원대학교 명예교수

 

 

요즘 시인과 시에게 시란 무엇이가 물어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자주 여러 시들을 대하다 보면 불현듯 이런 새삼스러운 의문이 생기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인간다운 인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해 왔듯이 시인에게나 시에도 분명 본래 갖추어져야 할 나름의 격自格이 있어야 그 명색에 걸맞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코끼리 만지는 장님처럼 시간만 허비할 공허한 글밖에는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제에 최소한 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이런 마음 기회는 필요하다 생각되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생각할수록 이건 너무 우직한 큰 물음이라 무슨 이론을 가지고도 역시 코만 만진 장님의 코끼리 얘기밖에는 안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은 눈을 바로 뜨고 코끼리에 대해 진실을 밝혔다 해도 역시 오십보백보인 불완전한 실체 잡기라 생각했다. 다리만 만져보고 코끼리에 대해 말해도 그도 분명히 코끼리 것이면 일리는 있을 수밖에 없다. 필요한 부분만으로도 전체를 추론하는 문은 연다고 봐야 한다. 딱히 한 꼬투리만이라도 가능한 것만 잡으면 들어가는 입문의 키가 될 수 있다면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 키워드가 무엇인가를 잡아야 하는데 참 공교롭게도 지금 이 글에서도 거듭 사용되고 있는 생각이란 놈의 겉 표상과 그 안의 상징이란 놈이었다. 주지하는 바처럼 상징의 대표적인 기호가 지금 쓰고 있는 바로 언어이다. 모든 글쓰기에서 언어는 필수인데 언어의 안팎이 겉은 표상이고 안은 상징이니 역시 모든 글쓰기가 온전할 리 만무하니 비록 좀 엉성한 말놀이라고 이놈들 붙잡고 시비 걸면 영 헛고생은 안 하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많은 어휘 중 하나,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인 생각이란 단어 하나를 잡고 안팎을 뒤져보고자 한다. 글은 어떤 장르의 글이든 그 사람의 생각을 문자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니 어쩌면 핵심을 움켜쥔 것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이 글이 시인과 시에 대한 물음이니 이 문제는 아마 매우 유익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즉 언어를 말과 글자로 다루는 천혜의 능력을 받은 존재이긴 하지만 인간이 사는 삶의 문제는 소크라테스도 모르는 일을 이 말과 문자를 어찌 다루어야 서로 소통을 시킬 수 있을지는 참으로 난감하다.

왜 인간은 기호를 통해서만 겨우 소통하게 되었느냐는 것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모든 사물 존재는 어느 것도 그 실체를 다 알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기 때문에 기호로밖에는 서로 아는 것을 이심전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사물은 의사소통의 기호 역할을 다 한다. 그러니 실물의 형상이나 또는 이들의 존재형식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모방한 그림이나 사진 그리고 각종 표지 기호들 그중 가장 편리하다고 만든 문자 기호 등의 상징력뿐인 애매성은 우리들의 글쓰기의 매우 아픈 망령이다. 아무리 적확한 전달을 시도한다고 해도 글의 종류에 따라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들다.

모든 사물의 생각을 밖에서 감각밖에는 발휘 못 하는 능력으로 생각한 것이 항상 핵심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사물들에 대한 이런 모호성이나 애매성들은 바로 생각이란 이 어휘가 다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따라서 언어 기호의 상징성 문제는 이 생각이란 용어를 다룰 때 필연적이다.

그래서 평소 문학 작품이나 문인들이 매우 귀중하면서 사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이 생각이란 놈과 상징이란 놈이 문제라 보아 이들 목의 고삐를 잡긴 했는데 역시 이 두 단어의 용어가 장님의 코끼리 둥치라서 이 한정된 원고량 안에서 코끼리 코 하난들 다루어 낼지 모르겠다.

 

 

1. 생각이란 놈의 망령

 

그간 우리는 단어 하나 용법도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한 주제에 글쓰기 전공자라고 생각해 왔다는 자괴감을 버릴 수가 없다. 명색이 중등 국어 교사 노릇을 한 필자부터 이런 무책임한 글쓰기 지도를 해 왔다는 반성 때문이다. 글쓰기가 무어냐고 학생들이 물으면, 아주 쉽게 네가 생각한 것을 잘 다듬어 쓰면 된다고 거북한 장면을 얼버무려 왔던 게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무책임한 말이 그들의 글쓰기 길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해 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주지하는 바처럼 사전적으로 생각이란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따위의 정신 작용이라고 되어 있다. 즉 어떤 사실에 대해 잘 헤아리고 잘 판단하고 그래서 잘 인식하는 따위에 부응한 정신작용 또는 우리들 의식작용이라고 하여 문제의 대상에 대한 진실한 내용을 알게 하는 정신기능이라는 것이다. 다시 부연하면, 주어진 문제를 어떠한 목적을 위해 어떠한 사고방식으로 정신기능을 작용시킬 것인가를 먼저 염두에 두고 헤아리고 판단하는 능력을 부려서 그 내용을 신중히 결정하라는 뜻이다. 그러니 생각이란 정신 능력의 치밀한 발휘가 일차로 우선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제이차의 어떤 해결적 사고(내용)의 결과를 얻으라는 사유 구조를 만들어 차분히 헤아리는 사유과정을 거쳐야 하는 용어 해석부터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유 과정의 정신 작용을 통해서 소기의 내용(생각)을 결정해야 한다. 먼저 차분히 작동시킬 사유의 목적과 그에 따른 사고방식과 글 기능 여하에 따라서 같은 문제나 사물이라도 다르게 내용은 결정된다는 생각자체에 대한 보다 면밀한 메커니즘을 자체 정비해야 함을 우리는 너무 까맣게 간과한 것이다. 두리뭉실한 생각개념으로 무장하고 글쓰기 전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게 있는 변별지를 거의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아 숨은 저변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용어의 기능과 내용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관습화해서 어떤 의사소통에도 써먹었다.

매우 노력해서 만든 어떤 한 문장이 지식 전달용인지, 정념 전달용인지, 도덕적 덕성 전달용인지, 칼럼용인지, 철학적 이론 해설용인지 등등의 사유 목적과 사유 구조에 비추어 보지도 않고 그저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라고 하며 너무 쉽게 사용했다.

아마 생각이란 이 용어 하나만의 철저한 구조적 메커니즘을 잘 분석해서 이해만 해도 바로 문장론의 최소한 기초를 닦는 길일 것이다. 이런 철저한 생각의 기저 고민 없이 시를 작시하고 수필 등을 창작한다면 어찌 장르에 맞는 글을 쓸 수 있겠나 싶다. 모든 어휘가 모두 이런 심각한 용어 개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괘념만 해도 큰 글쓰기 기본을 닦았을 것이다. 물론 대개가 문맥 속에서 가름의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건 부분적인 땜질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예술적인 문학 문장에는 감당하기 힘들다. 문학의 어느 장르에서 이런 수준의 생각을 받아들이려고 하겠는가 싶다.

한 편의 시와 시조 작시에는 응당 그 장르가 지켜야 할 특성들을 강하게 요구받는데, 감당해야만 할 문장의 사유를 잃고 있다면 이게 바로 작자나 작품에게 소위 공자님식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고문을 당해야 할 것이다. 격을 못 갖춘 것이라면 시장에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어떤 용어보다 무심코 마구 사용하는 이 생각이란 놈이 너무 애매모호한 요술쟁이라서 정직한 마음이 이 생각의 목에 고삐를 단단히 매서 손아귀에 꽉 쥐고는 긴장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사물과 현상의 사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 생각하는 방식과 기능이 적절해야 얻는 답의 생각도 그 경계에 선다. 바로 이런 것이 학제 간의 기본 경계다. 생각을 애매모호하게 사용한다면 전문 영역 특성을 살려낼 수가 없다. 실로 어떤 시 작품을 접하다 보면 과연 이게 시 장르의 범주에 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마주하게 되는 것이 이런 이유이다.

가령 밤하늘에 반달이 떴다.”는 이 문장이 글 서두의 첫 문장으로 제시돼 있다면 이 문장이 어떤 장르의 글을 다루려고 하는지의 생각 방식과 기능을 전제로 하고 있어야 그에 맞는 내용이 잡힐(생각) 것이다. 만일 한 달 내의 달의 변화에 대한 기상관측이나 천문학적인 해설문이라면 생각 방식과 그 정신 작용이 그에 맞는 생각 기능을 작동시켜야 한다. 목적에 맞는 그런 생각 방식으로 생각해낸 내용이라야 이 글의 진행은 합리적 논리를 이끌 것이고 제 글 영역을 지킨다. 그러나 이 문장을 시 문장의 서두로 생각한 문장이라면 애초부터 작시 방식으로 사유 구조, 내지 사유 방식에 의해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시적 정념(생각)을 담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애초부터 시 문장을 이루려고 했다면 이 문장은 그다음 문장이 바쳐줄 내용에 따라 반달 떴다로까지 압축시켜도 될 것이다. 생각 방식은 밝혀내고자 하는 생각 내용에 따라서 그에 가장 적합한 조건으로 변한다. 물론 수필, 소설 등 장르에 걸맞게 절로 조건 조절이 될 것이다. 철학적 문제나 칼럼 문제로 이 문장이 쓰인다면 역시 그에 알맞게 변화할 것이다.

결국 생각이란 용어구조 논의 핵심은 생각이란 이 용어가 글의 정신 구현 방식에 맞는 사고방식과 기능 작용인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 그리한 후 그 사유 결과로 어떤 내용까지를 드러내는 분별지를 터득해야 한다. 이렇지 않고는 장르의 글쓰기에 큰 혼란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저간의 작시 방법에 대한 여러 창작 강의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깨우침 없이 그냥 다독多讀, 다사多思, 다작多作하라고만 열을 쏟았다면 아는 척하는 겉모양은 했을지 몰라도 방치한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사유 구조나 사유 방식이 왜 필연이고 중요한 가는 모든 사물의 존재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좀 현학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물은 저 홀로는 존재가 0(제로) 값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둘 이상의 사물 사이에서만 무슨 의미든 존재를 얻는다는 존재론이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전에 어떤 사물들이 어떤 목적으로 동원되는가는 바로 이 존재론적 기저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최소한 생각은 사물이 두 양태로 연계되는 조건이 구조화되어야 한다. 가령 소나무가 흔들린다.”는 주어와 술어란 기본 형식 또는 구조는 필연이다. 이기론적이라면 체와 용의 관계이고 주역으로는 음양의 관계고 태극의 원리다.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도리道理 문제라 봐도 된다.

한편 사유가 시간과 공간의 평년과 입체로 다양한 구성일 때는 이런 존재 구조를 살펴야 한다. 사물들은 이 존재 방식이 다르기에 어떤 존재도 같은 존재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가 무엇이냐는 한마디로 시적 사유 구조가 무엇이냐로 대답이 가능하다. 만일 어떤 시가 이런 시적 사유 구조가 없이 작동되고 있다면 이게 시인가를 냉정히 질문받아야 한다.

우리들 마음이 무엇이냐를 물으면 누구도 실은 정답을 내놓을 수 없다. 마음 작용의 능력과 기능이 곧 생각이면 이 생각을 등 뒤에서 주시하고 있는 놈이 글 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편의 글 안에는 이런 의식 안의 생각 신령들이 서로 다투며 우글거리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언제나 잘못된 생각이 들어가 개입되었다면 반드시 생각 망령은 글을 망칠 수가 있다.

한편 매우 중요한 이 생각이란 용어에 맞는 언어 존재 문제는 다음 상징성의 망령 문제에서 같이 다루고자 한다.

 

 

2. 상징이란 놈의 망령

 

익히 아는 바대로 상징성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담아내고 전달하는 여러 생각들을 담는 기호들의 핵심 내용이다. 생각이란 용어의 구조가 외적 인간 언어 형식 양태라면 이 상징성은 그 사유 내용의 특성과 내부 구조라 보기로 한다. 수학의 수에 대한 구조를 비롯해서 작은 점 하나에서 신호등 불빛과 필요한 곳곳에 부착되는 상징 표지들까지,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의 형상들과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언어 문자의 기호들이 다 사고 내용이란 의미를 상징성이라 한다. 이들은 다 다양하게 어떤 유의미한 내용을 표상하는 기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의 상호 전달을 담당한다. 특히 인간의 언어는 직접적으로 존재를 다 담는 기능을 한다고 해서 존재의 집이라고 하여 의사소통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조작된 문자나 말이 상징성을 갖기에 존재 의미가 간접 전달된다는 것이다.

역시 앞의 생각이란 용어에서 사유 구조를 통해 얻은 의미 내용처럼 상징은 말 한마디에 우주 존재의 대도에 이르는 모든 이념과 진리에 대한 사유 내용을 감당하는 언어 표상 안의 존재이다. 이 상징이 있어야 신이나 귀신이 존재하고 인식도 이루어지고 성령도 일어나는 등 요술보가 상징의 능력이고 의사소통 가치이다. 그러니 이 역시 생각의 사유 구조에 따라 생각의 문제만큼 망령을 부리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선 사전적으로 규정하는 개념이 무엇인지 참고해 둘 필요가 있다. 상징이란 추상적인 사실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대표성을 띤 기호나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일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앞에서 이미 예를 다 든 바처럼 모든 존재의 의미를 가장 현상적으로 암시하는 기능을 이 상징이 담당한다. 어떤 유의한 것을 간접적으로 기호적 표상들이 대신해서 전달해주는 일종의 대신법이 지배한다.

어떤 외형의 기호 형상들이 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을 자기 속에 담고 있으니 그것을 통해서 알아차려 서로 소통하라는 것이니 언어적 기호들은 다 상징을 전달하는 아바타다.

우리들이 구름을 보면 구름이 직접 말을 건네지 않아도 비가 올 징조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문자를 비롯한 모든 기호의 특성은 이처럼 다 속심을 대신하는 기능을 한다. 역시 어떤 언어도 일종의 인위적 기호로서 어떤 사실의 진실한 내용을 도저히 일상의 말로서는 온전하게 전달이나 설명을 할 수 없기에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 상징성을 사용한다. 결국 우리들의 의사소통의 글쓰기는 다 상징성을 이용하는 방식뿐이다.

결국 어떤 글을 읽거나 쓸 때 이 기호적 상징성을 잘 이용하여 수준급의 정신 이념과 사상을 누리고 자존을 우리는 지킨다.

그러나 언어로 이름 지어지지 않은 사물은 아예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측면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인공적 언어는 다 개념화만 된 것이라 특정한 심상에서는 매우 고통을 준다. 진위를 가르는 합리적 논리 전개의 실용적 일상생활 지식 전달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예술적인 정념의 심상을 표현하는 데는 이 기존 언어가 매우 방해가 된다. 부득이 기존 관념이나 개념성을 회피하고자 상징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형상 사물을 직유로나 은유(환유, 제유, 풍자 등을 포함)로 비유해서 원관념을 대신하게 하여 상징화로 소기의 전달 목적을 살린다. 그림이나 사진 등은 바로 형상을 보여주는 그림 문자화하는 전달이니 문학보다는 전달 효과와 정확도가 높다. 이런 과정에서 역시 상징성인 언어(개념이나 관념)을 정서 표현용으로 사용하는 생각 구조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문학 작품에 대한 기법, 사유 구조나 목적을 이해 못 하는 경우는 소위 형용사, 부사, 관형 방법 등으로 억지스러운 꾸미기 기법으로 상징성이 가지고 있는 미적 기능을 깨닫지 못한다. 결국 상징성의 매우 깊은 신비적인 미묘한 예술성 구현 기능을 깨우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정념에 대한 속내를 진솔하게 사실대로 고백하는 방식으로 순수성을 살리는 우회 방식도 나온다. 시작에서 율격이 사라지는 이유도 이런 전달법에서 오고, 장시도 자연히 늘게 되는 것이다. 상징성의 미묘한 힘이 잘못 부려지면 이게 오히려 망령이 되는 예술에서는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특히 시의 작시에서 이 상징성의 묘미를 살리는 생각 방식 능력과 그 부족은 가장 그 시의 존재 평가에 높은 요인이 된다.

좋은 글은 이 상징성을 어떤 기법으로 또는 어떤 새로운 수단으로 창안되고 있는가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상징성도 역시 인간의 마음 부리기는 마찬가지니 언제나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망령이 되어 괴롭히기 마련이다. 모든 글쓰기가 어렵다는 말은 이런 고통의 여정에 대한 자탄일 것이다.

 

 

 

 

3. 자료 시를 통찰

 

아마 가장 이해가 빠른 방법은 어떤 작품의 실제 형상을 통해서 살펴보고 구체화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특정 작품 선택은 참 만만치 않다.

어느 강의에서 인용했던 시 한 편을 자료 시로 하기로 한다.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조정인

 

(이 시를 생각이란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따위의 정신 작용이라는 개념으로 우선 검토해본다면, 무엇을 잘 헤아리고 잘 판단하고 그래서 잘 인식한 정신 작용인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일단 시의 사유 구조를 살피기 위한 기초작업을 아래와 같이 해 두고 살피기로 한다)

 

오후 4시 역광을 받고 담벼락에 휘는 그림자는 목이 가늘고

어깨가 좁다 고아처럼 울먹이는 마음을 데리고

타박타박 들어서는 골목

(첫 시작의 심상들의 개념 요약은 울먹이며 들어서는 골목이 될 것이다)

 

담장 너머엔 온몸에 눈물을 매단 듯, 반짝이는 대추나무 새잎

(두 번째 받쳐주는 담 너머 대추나무 잎이다)

 

저에게 들이친 폭설을 다 건너서야 가까스로 다다랐을 새 빛

대추나무 앙상한 외곽에서 저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멀까

(세번 째 받쳐주는 대추나무 외곽에서 잎의 연두빛까지는 얼마나 멀까이다)

 

잎새 한 잎, 침묵의 지문 맨 안쪽 돌기까지는 얼마나 아득한

깊이일까 글썽이는 수액이 피워올린 그해 첫 연둣빛 불꽃까지는

(네 번째 받쳐주기는 잎에서 침묵의 돌기까지의 깊이는 얼마나 아득할까와 그해의 고난 피워올린 연둣빛 불꽃까지는 얼마나 멀까이다. 이 종결부는 두 개의 중심 사고구조가 한 연에 병렬로 묶여 있다. 핵심 사고 내용으로 분연하면 두 연으로 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고 구조 차이는 시간성이 끌고 있기 때문이다)

 

1) 사유 구조 설정화

 

. 시적 시간 구조

시의 가장 큰 제일차 사유 구조는 지금과 과거(그때), 시작과 종말의 사유 필드 설정이다. 즉 추억(체험)의 사유 체계이다.

 

. 시적 공간 구조

옛집의 굽은 골목길과 담장 너머 장소와 대추나무이고 작은 새잎 공간의 연계 공간 체계다.

 

. 심상과 심상의 거리 구조

굽은 골목길과 그림자와 오후 4시 해 질 무렵의 심상들 연계와 상호 거리 그리고 대추나무와 새잎 사이의 거리. 잎의 침묵과 발화(새잎 나기) 거리, 그리고 가장 큰 지금과 그때의 심상 시간 차이.

 

. 시적 화자와 시 청자의 거리

시적 화자와 이 시를 보고 듣는 가상 시 청자는 둘 다 배경 공간으로 묵언의 거리 두기 설정이다.

 

. 시적 상징성의 표현 구조

이 시는 시인의 가난 체험이거나 다른 복합적 좌절 의식은 어린아이 시절답게 순진하게 울먹이고’ ‘타박타박 걷고’ ‘눈물 매달고’ ‘눈물 글썽이는실제 행위 형상화를 근간으로 해서 나름의 직유와 은유적 사물 형상화로 핵심 주제의 정념을 상징화하기로 표현 구조를 조직했다.

2) 시적 표현의 실제

 

시적 사물들을 어떤 시공간에 동원하여 글을 이미 구상된 사유 구조에 맞게 존재를 구체화하는 그야말로 생각한 내용을 표현하는 실행단계이다. 즉 어떤 사물들을 생각이 내용을 감당하게 선발하는 표현 문장화하는 연결 구현 작업이다.

오후 4시의 시간 존재와 그림자 연계 그리고 그림자 연계로 중심 정념 심상의 상징성을 높이고 이를 받쳐주는 대추나무의 새잎과 희망의 봄빛의 연계, 그리고 대추나무 외곽과 새잎 연둣빛과 거리를 시간 거리와 기다림의 거리로 상징화시킨다. 이렇게 선택 동원된 사물들은 중심 심상을 대신할 상징물이 된다.

그리고 이미 설정된 지금과 그때란 시간의 거리로 확대함으로써 희망의 새잎이 돋아 피기까지의 시간 거리를 동일성으로 절묘한 항융화를 이루도록 한다. 이런 공간과 시간의 융합 작업은 더욱 높은 시적 심상의 구경적 경지로 끌어올린다.

그때와 지금이라는 시적 화자의 삶을 이룬 시공간적 거리 구조가 일개 대추나무가 새잎을 키우고 다시 빛나는 불꽃이 될 때까지의 거리와 동일성을 확보함으로써 시적 미학에 대한 혜안이 드러나고 다른 여러 작시에도 기여가 제고될 것이다.

 

 

이 소고가 시인과 시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지의 답은, 생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상징성이 무엇인지를 답하는 것으로 유추되길 바란다.

 

 

작은문학 2022. 통권 59호 권두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