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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다시 시집을 묶으면서 5

 

1

 

예쁜 여자일수록 12

나이테 13

꿈꾸는 종려나무 14

꿈꾸는 종려나무·2 16

종려나무의 몽유 18

두 그루 나무 20

폭포를 보는 눈 22

오사마 빈 라덴을 회상하며 24

아이스바 하겐다즈 26

도림사 계곡의 때죽나무 그늘 28

이순 30

장군과 깡패 32

만추晩秋 34

어느 여류 시인의 부고 36

 

2

 

수도승이 아닐지라도 40

코 고는 아내 곁에서 41

풍미루 44

말의 옹이 46

신 수렵시대 47

노란각시붓꽃 48

방울토마토가 있던 자리 50

장마 52

성하盛夏 54

감기 55

산방산 56

친구 57

바람에게 58

입추 59

계절에 대한 경례 60

 

3

 

도반 62

사랑은 63

미투 64

국도 위에서 65

매창공원을 다녀와서 66

봄생 67

가족 이야기 68

능소화 능소화 69

상경기 70

11 71

늙어가는 아내에게 72

미움주머니 73

밥값 74

구릿빛 열쇠고리 75

겨울 남포 76

속 깊은 님의 뜻 77

 

4

 

홍콩 안마 80

생활의 달인 81

오래된 영화를 보다가 시의 운명을 생각함 82

저 많은 책들을 어디로 모셔야 하나 84

케이블카 승강장 앞 일곱 굽이 줄서기 86

붉은 조명이 만발한 골목길 88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미안하다 91

종신이 92

잘 가라, 얼룩 94

96

연탄보일러를 고치며 98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101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102

나이 들어갈수록 104

족발 뜯는 여자 105

 

시작 노트 106

 

 

 

 

 

시작 노트

 

 

 

둔한 재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좋은 시를 쓰지 못할 바엔 애당초 시를 가까이하지 않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재주가 부족함을 진작 알았지만 미련하게도 나는 아직도 시를 쓰고 있다. 좋은 시를 써 보겠다고 이런저런 책도 읽고, 흘러가는 구름에게도 마음을 주고, 꽃 한 송이 피고 지는 것에도 마음을 두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곡예를 하듯 조심스레 살고 있다.

나에게 있어 문학은 구원의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할 짓이라곤, 하고 싶은 일이라곤 문학밖에 없었던 천둥벌거숭이 시절부터 이순의 나이에 이른 지금까지, 문학이 나의 등불이라는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다. 나는 한때 문학의 전도사를 자칭했었다. 문학을 하면서 얻는 것이 많으니 당신도 한번 해보라’ ‘같이 한번 해보자라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곧잘 하곤 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영달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 지향이나 양태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잘만 하면 남들에게 기쁨도 주고 감동도 주는 일이란 문학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보다 좋은 취미가 없고 이보다 짜릿한 놀이가 없고 이보다 좋은 정신적 노후 대비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는 읽는 문학과 쓰는 문학이 있다. 독서를 많이 했더라도 창작을 해보지 않고서는 책을 읽고 난 후의 감동에서 창작을 하는 사람과 차이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창작의 고통을 모르고서는 문장 하나 문맥 하나 낱말 하나에서 뭉클뭉클 감동하고 감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좋은 작품은 남이 좋다고 해서 좋게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작품 자체, 문장 자체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이미 살아 있는 상태가 되어 독자와 직접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은 좋은 느낌을 낳기 마련이고, 창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훌륭한 작품, 좋은 문장, 멋있는 표현이 주는 그 생동감을 온몸으로 느끼기 마련이다.

문학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문학을 버리기 어렵다. 문학작품을 읽는 것도 재미있지만, 문학작품을 쓰는 재미는 해본 사람만 아는 것이다. 한 편의 문학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 그 원초적 희열 때문에 작가나 시인은 기꺼이 창작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기쁨, 글을 쓰는 기쁨을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문학이 주는 유익 중에 다음으로 큰 요소가 깨달음이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인생의 깨달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말하자면 간접 경험에 불과하여 그 깨달음이 자신의 것이 되기는 어렵다.) 창작을 해봄으로써, 깊이 있게 생각하고 폭넓게 바라보고 진지한 자기 성찰을 하게 되어, 이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정신적 성숙은 깨달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창작의 산고를 겪어본 사람은 수도자들이 추구하는 정신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구도자이다. 나는 이런 유익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는 좋은 시를 쓰고 싶다. 오래 둘수록 풍미가 더해지는 조선간장 같은 시, 간장이 음식의 맛을 좌우하듯 독자의 삶에 진미를 불어넣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상식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같이 공감할 수 있고 조용히 음미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좋은 시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워서 어째서 모든 사람이 다 시인이 되지 못하는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시란 건강한 말에 다름 아니다. 가장 훌륭한 시구절들을 대하노라면 내가 겪은 평범한 일들을 그저 이 시인이 보고 듣고 느낀 대로 토로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18411130일의 일기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적고 있다. 벌써 170년도 더 된 시절에 쓴 소로의 토로가 아니더라도, 좋은 시는 누구에게나 좋게 느껴지는 시이다.

낯설게하기가 시 쓰기의 기본이라고들 하는데, 상투성을 벗어라, 창의성을 발휘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낯선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달거나 자극적인 음식이 처음엔 맛있게 느껴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는 것처럼 낯선 시도 이와 같아서 한동안은 그 시에 빠져 살다가도 자칫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설기라는 전제에는 굉장한 함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 세상에 낯선 것이 얼마나 있을까? 기실 인간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졌을 뿐, 인간 세상의 잡다한 문제들은 여전히 숙제인 채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변한 것이 없는데, 인간의 정신세계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자꾸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다보니 급기야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기에 이르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낯설게하기보다 자기 들여다보기는 어떨까? 나는 누군가, 너는 어디 있으며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기는 어떨까? 뒤집어 바라보고 낯설게 표현하는 것보다 먼저, 생명 가진 모든 것의 오늘과 내일을 고민해보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비결은 아닐까?

인간의 문명은 고도로 발달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인간의 정신세계는 황폐화되었다.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장착한 로봇에 가깝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발달이니 진보니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감성은 점점 더 메말라 가고,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인간의 정신세계는 통합된 모습을 잃고 여러 갈래로 세분화되어 개인의 그것은 옛날보다 훨씬 왜소해지고 말았다. 지구가 촌이니 어떠니 말들을 해도, 방 안에 앉아 세계를 본다고 해도,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감성지수는 퇴화를 거듭하여 사람의 도리 같은 것을 점점 망각해가고 있지 않는가?

시는 그래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인데, 시를 다시 살리는 그 길, 시가 독자를 불러올 수 있는 그 길은 시인, 독자 할 것 없이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으로 귀결되리라. 우리 모두가 도를 찾아야 하고 도리道理를 찾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워질 때, 세상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시를 회복해야 한다. 좋은 시를 써야 한다. 좋은 시들이 세상을 바꿀 날이 올 것이다.

좋은 시는 정신의 고도가 높은 곳에서 생산된 시가 아닐까 싶다.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좋은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을 관조하려면 삶을 느슨하게 살 수 없다. 치열하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따르지 않으면 삶에 매몰되어 한 사람의 육체적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수도자의 자세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며,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고 불리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시에 있어서 비지식非知識은 하나의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했다. 그는 또 시란 사방으로 정신분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가 인용한 장 레스퀴르Jean Lrscure라는 미술평론가의 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식은 동시에 그 지식의 망각에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지식非知識이란 무지가 아니라 앎의 초월이라는 어려운 행위이다.’

선불교의 역사에서, 육조 혜능六祖 慧能은 일자무식이었으나 오조 홍인五祖 弘忍의 많은 제자 중 학문이 가장 뛰어났던 신수神秀를 제치고 스승의 의발을 전해 받는다. 도는 아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한 일화가 아닐까 싶다. 시도 이와 같다고 본다. 좋은 시도 많이 안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선불교에서 가르치는 중도의 경지, 도가에서 가르치는 무위의 경지, 앎을 초월한 경지에서 빚어내는 시, 언제 마셔도 그 맛이 그 맛이라 오히려 신선한 - 맹물로 빚어진 시, 그런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시의 이론을 넘어서는 시, 많이 배운 사람이나 시를 모르는 사람이나 똑같이 좋다고 느낄 수 있는 시, 나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2017경남문학가을호에 실었던 글을 그대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