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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승 대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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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탐방

필름·7

 

나비는 온실 밖에서 은싸라기를 흩고

꽃도 한 생각, 향을 뿜어 하늘대네.

맞대고 갈라선 투명, 주황朱黃 타는 저 유리벽.

 

카메라 탐방

필름·39

 

골목마다 휴지를 줍는 페스탈로치의 창고에서

구겨진 낙서들이 반딧불로 살아나와

들풀이 꽃 피는 일을 시중들고 있구나.

 

카메라 탐방

필름·78

 

두견새 울던 골에 진달래꽃 배어나네.

해마다 설운 일 찾아 두견이나 울리며 살까

굽어본 하늘 한 자락 그도 그냥 번져나네.

 

벙어리의 노래

 

소리 하나에 일생을 걸었다.

다져온 적막에도 귀가 돋는 세월을

온갖 춤 다 추어 봤다. 무슨 춤을 더 추랴.

 

고 향

 

어딜까 까치밥 남긴

감나무 섰던 곳이

금의환향 저 노인장, 노 저어 더듬고 있다.

담부랑

가리개 삼아

넘나들던 그 인정도

 

언덕배기 미루나무가

흉터로 증언하는

여기는 수몰지구, 세월도 비껴가던 동네

평생을 떠돌면서도

신앙이던 고향 아닌가.

 

알아서들 살아가게나.

두루 용납하던

너와 나의 고향, 둘러볼 때 놓치는갑다

목청껏

허우대는 손끝

꿈에 자주 스치니.

 

묘한 일

 

지나치는 길에

조약돌

한 개씩

심심풀이로

포개고

포개더니

 

어느새

손 높이로 솟은

탑만 돌다

오곤 한다.

 

 

너를 따르다

나마저 잃고 사네.

 

천지를

품에 해도

또 하나 열리는 천지

 

앉아 볼

끝은 어드메,

돌아볼

끝은 어드메.

 

멍 에

 

넥타일 매다 말고

매는 손 째려본다.

멍엘 씌우는 주인의 손 아닌가.

식솔의

배웅마저도

쏟아지는 채찍 같다.

 

일터에선 한사코

내 고삐 내가 쥐지만

논은 소작답, 꿈은 자꾸 걸돌받고

돌아와

신발 끈 풀면

고개 숙인 해바라기들.

 

물소리

 

아주 찾아 나서지는 말고

까마득한 옛얘기 속 더듬듯

한 여든 해쯤

실안개 속 더듬어 가게나

 

가다가 지치면 그곳에

오두막채 하나 마련해 살다가

아주 잊지는 말고

한 여든 해 잊고 살다가

 

문득,

왁자그레 물소리가 나서

그때 그 몸살이 도져올라치면

또 나서게

더도 말고 한 여든 해

 

저승도 얼비치는 날

 

비 온 뒤 오월 청산은

골골마다 운해를 걸치고

저승도 데려올 듯 무지개도 걸쳐놓고

이 잔치 찰나에 그칠까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고

시방 네 살아 있음이 고맙다 고맙고 말고

그윽이 실눈 뜨다가 아껴보자 도로 감고

세상일 욕심껏 잊으니

내 스스로 격에 겹고

 

심부름

 

미래사 가는 길에

내생만 한 꽃을 만나

스치는 눈인사에

절이 한 채 생겨나서

심부름 까마득 잊고

소풍 속에 노닌다

 

귀뚜라미의 노래

 

돌아왔어요 당신의 뜨락에

해마다 이맘때

당신이 아끼시던 실비단 목청을 풀어

가을밤을 감아 봅니다

그날들의 사투리로 매만진 나이 그대로

돌아왔어요 아직은 슬픔인 채

목메인 뜻을 받들어 이 밤도 비워 둡니다.

귀뚤귀뚤 귀뚜르

베갯머리 맴돌지만

유명이 갈라놓아 통곡도 닿지 않네

이다음엔 빨간 눈 달고 꽃으로나 오지요.

 

야솟골 찬가

 

내 요람 야솟골은 씨할만 한 동네

산울림이 뇌이는 동화 속에 잠기어

세월도 비켜가는 그런 동네

법보다 먼저 순리를 익히어

우러러 섬기고 굽어 아끼며

울타리 넘나드는 치자 향기 이웃

눈만 주면 풀빛도 따라와 주고

삼동 볕도 나누어 쬐는 사람들

세상 눈치 안 보고 옛말 하면서

까치밥 한 알 감도 남겨두는 동네

 

어머니 날에

 

나가 주세요

외갓길 산모롱이 복사꽃이 아른거려

해마다 이날에는 영업을 쉬어요

 

그날 낯선 동네로 후살이 떠나던 울 엄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당도한 산모롱이

외할머닌 불쑥 바위 뒤에서 호랑이로 나타나

날 무슨 짐짝처럼 나꿔채시곤

네 에미 짐 되면 못쓴다며 우셨지요

그날따라 웬 복사꽃은 그리 흐드러지게 피었던지

지랄 같은 봄바람은 또 갈 곳 잃고 맴돌기만 했던지

내가 짐이라던 그 말씀과 함께 이적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답니다.

 

이러지 마세요, 밟히는 일쯤이야 이미 졸업한 처지지만

나에게도 식지 않은 피 한 방울 남아 있어

이렇게 울고 있잖아요

어머니날이니까.

 

설 차(雪茶)

 

눈은 자꾸 내리고

차가 끓는다

 

그해 그 봄이

두고 간 눈빛

 

삭정이에 턱이 걸린

낮달의 눈빛

 

쑥물 든 유년은

잠기며 뜨며

 

그런 날에 누워 삭인

허기로 온다.

 

어디서 오는지

또 가는지

곁에 앉은 아내도

그림이 되어

 

차가 그만 잦았다

눈도 그치니.

 

땅의 비밀

 

품을 줍니다,

안기어 드는 족족

길을 내면 길 되어 주고 강을 내면 강 되어 주고

사철을

자아올릴 뿐

지휘도 수확도 몰라.

 

개나리의 노란 얼굴빛

동백의 붉은 얼굴빛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그 또한 땅속의 비밀

열매도

떨어지자마자

태고로써 피를 돌리는지.

 

말뚝을 박으면서

철조망을 치면서

불현듯 떠올립니다, 우리들 본디의 땅을

국경도

표지판도 없어

하늘 같던 그 벌판을.

 

해바라기

 

당신 하나로 하여 아직도 낮입니다

깜박하면 놓칠세라 졸지조차 못합니다

눈 뜬 채

당신 좇는 꿈

단잠보다 깊습니다.

 

나팔꽃을 보다가

 

무궁화나무가

나팔꽃 세상입니다.

제발 올려만 주십사손 내밀 적 언젠데

무궁화 꽃들을 막고

방팬 양 뽐냅니다.

 

눈보라 속 외딴 초가에

하룻밤을 구걸한 길손

쇠마구간도 마다 않던 다급함이 녹자마자

안방을 점령했답니다.

주인장을 내치고선,

 

혼자의 힘으로는

길 수밖에 없던 것들이

날개 달아 준 이 보고 거 뉘시더라?”

옛날로 되돌려 놓을

누구 없으십니까?

 

어머니

 

살점 죄 새끼들 주어

껍질뿐인 우렁이의

죽어서도

뱃놀이시키는

모정 앞에

눈 감아 봅니다

겸상에

진미 반찬만 오르면

내 숟가락에 얹어주시던,

 

울 어머니 눈길 닿는 곳곳이

사랑의 급소입니다

때 없이

나를 비추는 이름,

때로 병풍 되어 주는 이름

어머니!

한 번 뇌이면

고향 산천도 펼쳐집니다.

 

살다보니

 

잠깨자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숙제장

갈갈이 찢듯

저녁연기

흩어지니

 

종아리

걷을 일만 남았네.

 

비상구도 없는

하늘.

 

이 풍진 세상에

 

노래다운 노래가 없구나

이 풍진 세상에

올빼미와 박쥐를 위해 폐광을 그냥 두듯

살얼음

딛고 가는 이에게

징검돌 놓는 노래가

 

누가 삿대질하랴

단지 호구를 잇기 위해

엉뚱한 데로 발길 돌리는

어깨 처진 소신들

그나마 막차도 놓치고

발 동동 구르는구나.

 

도처에 도화선 깔고

끼리끼리 야합인 것을

잠꼬대로 이어지는 당대의 한숨들이 발 뻗고

누울 땅 몇 평도

비워 주지 않는 세상에.

 

생각도 단풍들면

 

사랑이 미움에게

바다에서 만나자 했다네

강은 달라도 물소리는 통하여

한바탕

소용돌이 끝에

짠맛으로 거듭났다네.

 

뭇 생각도 단풍들면

고요 쪽으로 기우는 법

지명知命이 내게 자꾸 잊을 일 잊었냐 묻네

얼룩을

만들고 지우고

사는 일이 다 그렇잖냐며.

 

 

 

-서우승 추모문집 <해학과 풍류속에 노닌 설엽 서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