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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역사의 증언을 생각한다 -이순항 선배의 책을 읽고
2010년 09월 07일 (화) 박소웅 이사 webmaster@idomin.com

풍요로운 수확을 앞둬야 할 농부에게 9월 하루하루는 쓰리고 아프다. 태풍이남긴 생채기 탓이다. 줄줄이 떨어져 나뒹구는 과일을 보며 상처를 땀으로 덮어야 할 농부의 심정은 그야말로 쓰리다.

하지만, 이런 아픔 속에서도 역사의 증언에 신선한 의미를 주는 책을 발견하게 돼 가을의 성찬을 보는 듯하다. 아직도 이 고장을 지켜야 할 사람들의 건강한 소리가 가득 넘치기 때문이다.

<남길 것 없는 사람 이순항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40년 넘게 지역언론에 몸담으면서도 언제나 언론의 정도를 걸으며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원로 언론인 이순항 선배의 글이다.

그는 80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면서도 언제나 지역 특수성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난한 소리를 들으며 언론이 지켜야 할 공리적 책무를 후배들에게 몸소 보여준다. 진실을 갈구하는 현장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이 지역을 움직인 사람들의 역사를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언론이라는 광장에서 인생을 관조하며 후배 언론인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이순항 선배는 이 모든 게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밝힌다. 돈과 권력과 토호의 등쌀에 때로는 만신창이가 되는 지역 언론 현장에서, 그래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모습'을 지니기란 정말 힘겨운 일이다. 그럼에도, 잡다한 세간사를 이겨낸 것은 많은 사람과 맺은 인연 덕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마산 3·15의거의 역사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역사의 현장이 때로는 토호의 맛에 따라 변질해 그 진실이 왜곡되거나 과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이순항 선배는 때로는 몸으로 부딪치고 때로는 기사를 통해 역사의 현장을 잔잔하게 증언했다.

이순항 선배는 지역 역사성에 맞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현실과 타협을 강요하고 언론의 책무를 왜곡하려는 지역 토호들의 끝없는 회유를 이겨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공동선을 위해 연을 중시하면서 많은 사람과 끈을 놓지 않았음을 이 책에서 밝혔다. 이 책에는 진실의 증언이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어 독자에게 내가 사는 이 지역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이 지역에서 아직도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언론은 약자의 편에 선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게 다반사다. 때로는 거대한 금력과 야합하면서 살진 돼지가 되는 위선적인 언론인이 곳곳에 있다. 허위와 위선, 그리고 아부의 굴종적 자세를 마치 진실만 탐구하는 것처럼 주변 사람을 휘몰아치는 언론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성숙하게 이끌면서 도덕적 가치를 몸소 보여주는 글을 쓴다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이순항 선배는 건강이 좋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내색 없이 역사의 증언에 앞장서면서 언론인이 지켜야 할 숙명적 덕목이 무엇인지 책을 통해 밝혔다. 또 다른 이순항 선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시린 마음이 아련해진다.

/박소웅(YTN 사외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