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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불후의 가곡 가고파
서일옥 시조시인, 전 경남시조시인협회장
〈가고파〉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곡이다. 향토 마산을 노래한 한국의 명시요,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퍼렇게 살아 숨 쉬는 온 국민의 애창곡인 것이다. 세계 어디서든지 동포들의 모임이 끝날 때쯤이면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목메어 부르는 어머니의 젖줄 같은 따스한 노래인 것이다. 우리 가곡은 안으로 녹아들고 그 여음에서 우러나는 특유한 정서가 깃들어 있기에 그러하리라.
노산 이은상 선생은 고향의 산인 노비산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노산’으로 지을 만큼 고향 사랑이 남달랐으며 또 선생께서는 전통시조를 계승하여 많은 시조를 창작하였고 기행문 등을 통해 조선의 자연을 노래하고 우리말을 지키는 노력을 하셨다. 〈가고파〉는 1962년 노산 이은상 선생이 30세 때 쓴 작품으로 《노산시집》을 처음 발간할 때 실려 있던 작품이다.
1932년 1월 5일 서울 행화촌에서 완성한 〈가고파〉는 어릴 적 노비산과 산호공원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마산 앞바다를 그리워하며 고향에 가고 싶고, 고향 친구들이 보고 싶고, 고향을 떠나 있는 자신이 안타깝고,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들을 시조 10연에 담았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다닐 때 이은상, 양주동, 이선근 세 분이 한집 한방에서 하숙생활을 했었기에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노산 선생이 1935년 33세 때 동아일보 편집국 고문 겸 출판국 주간으로 있을 때 양주동 박사는 평양숭실전문 영문학 겸 교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사 주최로 백두산 등산 탐험행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양주동 박사에게 알렸더니 오다가 평양숭실전문대학에 들러 교양특강을 좀 해 달라고 요청했고 노산 선생 방문 하루 전날 양주동 박사는 우리글 강의 시간에 선생의 〈가고파〉를 1수부터 4수까지 칠판에 써 놓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노산을 천재 시인이라 추켜세우며 내일 특강에 학생들은 빠짐없이 청강하라고 했다. 운명적인 인연이었을까? 이 대학 음악학과 1학년에 다니던 김동진 학생이 〈가고파〉 가사를 적어 집에 가지고 가서 작곡하여 평양교회 학생들에게 교양음악으로 가르쳤고 이 노래를 배운 학생들이 애창하게 되어 평양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탄생된 〈가고파〉는 해방 이후 학생은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많이 부르게 되어 국민 가곡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김해성 시인의 가고파에 얽힌 사연 참조)
그로부터 1970년 이은상 시인의 고희와 작곡가 김동진 교수의 회갑기념으로 〈가고파〉 5수부터 10수까지를 다시 작곡하여 1973년 12월 10일, 숙명여대 강당에서 숭의여고 합창단에 의해 가고파 전편이 모두 발표되었다.
노래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애국가를 부를 때는 온 국민의 마음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을 단전 아래로 모이게 한다. 그래서 의식행사에는 의식가가 있고 각 학교마다는 교가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시와 음악이 만나 민족의 노래, 국민의 가곡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서정시인이 그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무모한 비판을 받고 그 노래들 또한 고향을 못 찾아 떠돌고 있다. 각 지자체에서는 작은 인연 하나만으로도 스토리텔링하여 마케팅 전략을 짜고 있는 이 즈음에 우리 지역은 고품격 문화자산인 가고파를 어떻게 브랜드화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