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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기행
-역사의 현장 초지진- 광성보 답사
오하룡 시인(마산시문화상 5회 수상자)
강화 섬에 간다. 섬은 섬인데 공식이름은 강화도(島)가 아닌 군(郡)이다. 우리나라 4대섬 중의 하나이다. 그만큼 큰 섬이다. 그 섬으로 향한다. 역사탐방 명분으로 강화 섬에 가는 것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광역시 관할이다. 진작 가고 싶었으나 80년을 살고 난 뒤 이제야 간다. 그동안 기회가 여의치 않았다. 이번에도 자칫 갈 기회를 놓칠 뻔 했다. 다행히 예정했던 일본 가야유적지 탐방이 한일관계 악화로 무산됨으로써 모처럼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어수선한 분위기더니 난관이 닥쳤다. 난데없이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휴전선 근방에 발생하더니 급기야는 강화에서도 발생한 것이다. 돼지에게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라 한다. 외지인들의 방문이 지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설왕설래가 있었다. 또 무산되나 염려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의 노련한 행정가 김 병수 회원이 강화군에 직접 확인하여 여행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확인을 받은 것이다.
역대 창원시문화상 수상자(마산 창원 진해시 문화상수상자 포함)는 100여명이나 열심히 참여하는 회원은 평소에는 20여명이다. 그러나 여행 때는 참여 회원 수가 느는 것이 상례이나 이번에는 각자 겹치는 행사가 많다보니, 이런 저런 이유로 이번에도 가족까지 합해 20여명을 크게 넘지 않는다. 구순 중반의 김성길(야구계 원로), 박호종(체육계 원로) 회원의 참여는 역시 모임의 활력소가 아닐 수 없다. 이분들은 아직도 지팡이 없이 다니는 노익장을 자랑한다.
왕년의 씨를 선수였던 김성수 회장도 여든을 넘어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나 회장이므로 회장답게 솔선수범이 돋보인다. 부인까지 동반하여 회원들의 간식까지 챙기는 열성을 보인다. 이창규(문학) 부회장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부인을 동반하여 그의 부인에 대한 헌신 적 사랑을 입증해 보여, 여행 동안 내내 참여 회원들의 격려와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의 부인은 뇌출혈로 1년 넘게 사경을 헤매다가 다행히 이제 여행을 할 정도로 회복단계에 있다.
아침 7시에 출발하였는데 강화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다. 대단히 먼 곳이다. 강화도로 가자면 어느 길로 가는지 아름 했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서 가늠해보니 서울 중심가를 통해야 강화에 이르게 됨을 알았다. 서울 속의 한강변을 끼고 달려 김포를 거쳐야 강화에 이르는 것이었다. 창문을 통해 보니 얼핏 국회의사당과 그 유명한 63빌딩이 오른쪽으로 바라 보였다. 요즘 사통팔달 시대여서 남녘 경상도에서 가자면 강화로 바로 가는 무슨 길이 있는 줄 알았으나 아직 그렇게는 뚫리지 않고 있었다.
강화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 질곡의 역사의 현장으로서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이 유명한 강화의 큰절 전등사 주차장이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절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이 유명한 절을 잠시 둘러본다는 표현은 말이 아니다. 제대로 둘러보자면 한나절도 모자란다. 따라서 이 절 이야기만 해도 할 말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탐방의 목적지는 초지진과 광성보 등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현장으로 잡고 있어 여기에서는 이 두 곳에만 초점을 맞춰 둘러보고 기록도 이 두 곳 이야기만 집중하여 기술하기로 함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초지진에서 광성보까지
초지진과 광성보는 강화 해협의 초입에 있다. 이번 여행은 전적으로 S여행사가 안내를 맡게 되어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모두 초지진에서 먼저 시작되어 다음으로 광성보를 목표 삼았으므로 필자의 탐방순서도 순서상으로는 초지진에 먼저 들려야 하나 여행사 운전기사는 우리를 광성보에 먼저 내려놓았다.
1866년 병인년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함대는 조선에서 선교하다 희생된 천주교 신부들의 책임 추궁을 위해 강화 해협을 미리 답습하고 조선조정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이곳의 조선 주둔군과 충돌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상당한 피해가 있었으나 이들이 2개월 이상 장기전을 펴다가 지쳐가던 때에, 비교적 훈련된 조선 군대를 투입하여 이때는 별 피해 없이 프랑스 군대를 퇴거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이때 강화관서에 있던 귀중한 유물을 탈취당하는 손실을 입는다. 고도서 340여권과 은괴 등의 재물을 약탈해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중 일부를 우리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빌려오는 형식으로 국내에 들여야 전시되고 있다는 서글픈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가 개항요구를 하며 처음에는 덕진지, 광성보 등을 공격하고 물러갔다가 다시 초지진과 광성보에 상륙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특히 광성보의 전투가 치열했던 것 같다. 이 전투에서 주둔군의 상징인 ‘수(帥)자기’를 탈취당하는 굴욕을 겪는다. 뿐만 아니라 마침 미국 본토는 남북전쟁 겪었던 터라 이들 군대는 전쟁에 익숙하였으나, 우리 조선 군대는 재래식 무기로 대항하였다. 미군은 현대화된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군대를 거의 몰살시키는 피해를 안긴다. 이때 우리 군대의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이 마침 부대를 찾아와 함께 있던 동생 어재숙과 함께 대항하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 전적비가 현장에 세워져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묻히나, 그 전적 비 비각 아래에는 그때 희생된 무명용사 51명의 무덤이 개별무덤도 아닌 합묘 형식으로 군집(群集)되어 있다. 해안까지 이어진 광성보 성터는 말끔히 신축되어 그때의 흔적이라곤 그 무엇으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비되어 있다. 성곽 길 양편의 늙은 노송들은 그 때의 광경을 기억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유심히 그 나무들을 두 번 세 번 살펴보았다. 그 노송들의 뿌리가 언덕을 꿈틀거리듯 감싸있는 모습이 뭔가 그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감회에 젖게 하였다. 과연 여기가 그 참담했던 비극현장인가 묻고 싶을 정도이다. 다음의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전적비문이 그날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강화전적지 정화 기념비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다
역대를 통하여 전란 때에는 피란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포기 돌 한 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끼치지 않은 것이 없다
고조선 이래로 조상들의 한 많은 유적 중에서도
굳이 민족의 피가 어린 전적지를 헤아려보면
칠백년 풍우가 스쳐간 고려 때 궁궐옛터
고종 19년 서기 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송도로부터 강화로 옮겨 강도라 일컫고
원종 11년 서기 1270년 환도해 가기까지
무릇 39년 동안 항몽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문화적 샘터였기에 우리는 여기를 잊지 못한다
강화성은 이곳에 천도했던 고려의 도성이었고
중성을 쌓은 뒤 해안선 따라 외성을 쌓았으나
인조 14년 서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 성문 지키지 못해 온갖 치욕을 맛보았었고
다시 그 뒤 고종 3년 병인 서기 1866년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갑곶진에 상륙을 개시하고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다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산포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퇴각했던 것이다
5년이 지나 고종 8년 신미 서기 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통상을 표방하고 침입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들을 차례로 공격해 오자
우리는 최후까지 응전했으나 워낙 무력불급으로
어재연 장군 등 수백 명 용사들이 순국했었다
4년지나 고종 12년 을해 서기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를 공격한 뒤
이듬해 병자년에 이른바 강화조약을 맺었으며
그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것이니
강화도야말로 민족 시련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이 유서 깊은 역사적 옛터에 세월이 흘러
성곽은 헐어지고 집터에는 잡초만이 우거졌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강화의 전적지를 돌아보시고
여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호국의 기상을
이어받는 국민교육의 정신적 도장이 될 곳이라
정성들여 복원 정화 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므로
그 뜻을 받들어 문화공보부가 이 일을 마치니
이곳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발길을 멈추고
가슴에 국난극복의 결의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1977년 10월
이은상은 짓고 김충현은 쓰다
광성보 밑으로는 유유히 바닷물이 흐르고 있는 게 내려다보인다. 바다가 얕게 보이고 물살이 거칠어 거세게 흐르는 개천 물처럼 보인다. 낯선 나라에 허둥대며 상륙을 시도하는 그때의 미국의 해군수병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한참 공격부터 하고 뜸을 들이다가 당당하게 상륙했을까 아니면 저 개벌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허둥지둥 상륙하기 바빴을까.
참 덧없는 상상인줄 알면서도 한동안 그런 망상에 빠져보기도 한다. 온통 하필 그때 그 군함들은 왜 여기 강화를 택하여 상륙을 감행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차라리 조선 정부와 정면승부를 걸려면 오히려 임금이 있는 한양과 가까운 제물포 항구나 그 인근의 상륙하기 좋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강화도가 가장 허술해 보여 일단은 쉽게 상륙해놓고 보았을까. 이 자리에서 이런 상상을 하는 지 내 자신이 의아해지기도 한다. 그때 사정을 지금 시각에서 어떻게 짐작이나 해 보랴.
여기를 상륙지점으로 정하고 과감히 작전을 감행했을 그때 그 외국 군인들은 당시로선 나름대로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하고 궁리하고 기획한 결과였을 것인가.
광성보에서 초지진으로 이동하여 성안으로 들어가 본다. 광성보는 그래도 언덕이라도 있었는데 초지진은 평지에 야산 같은 얕은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그때의 전황을 지켜보았을 언덕의 큰 노송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이 노송도 포격피해를 입었다지 않은가. 이제 유물로 앉아있는 포대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과연 저 무기가 작동이나 했을 것인가. 성벽을 도는 동안 바람 소리 속에 150여 년 전의 함성과 함께 격렬히 대항하다 패배한 군대의 신음소리가 귓전을 아프게 맴돈다.
그 후 이곳에는 일본 운양호가 밀고 들어오면서 억지 개항이 이뤄지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망국의 나락으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고 만다. 짧은 역사지식으로 전설이 된 진지를 둘러보는 내내 어둡고 암담한 기분을 어쩌지 못한다.
지금의 우리나라 처지는 어떤가. 미국은 주둔비용을 올리지 않으면 동맹을 깰 수도 있다는 위협을 하고 있고, 중국은 힘으로 옛 속국의 연장을 요구 하는듯한 몸짓을 보이며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 옛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로 돌아간 듯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내부는, 서로가 적이 되어 으르렁 거리는 꼴사나운 모양을 보이고 있다. 다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우리를 만만하지 보지 않게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여행 동안 수고했던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 마음을 전달해야겠다. 김병수 회원과 그 부인의 헌신 봉사를 잊을 수 없다. 우리 모임에서 제일 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매번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몸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그 부인의 역할이 컸다. 간식 챙기기, 인원 점검하기 행동이 굼뜬 회원과 그 가족들 부축하기 등 성가신 일이 많았는데 다 맡아 처리해 주었다.
앞에서 미리 소개했던 이창규 회원 부부를 비롯하여 이수소(체육), 박춘성(미술), 박용덕(사진) . 오하룡(문학), 김병수 회원은 부부 동반으로 이번 여행에 활력소 역할을 해주었다. 이수소 회원의 솔선수범하는 부지런함도 잊을 수 없고 박춘성 회원의 듬직한 무게감, 특히 오랜만에 참여한 박용덕 회원은 블루베리 농장주로서의 생생한 경험담을 틈틈이 털어놓아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최용봉(교육) 회원은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이번 여행 중에 ‘물 관련 강의’를 한 시간 동안 하여 회원들의 상식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하영, 박성임 회원은 고등학교부터 단짝으로 어디든 함께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도 같이 참여하여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주었다. 특히 하영 회원은 회지 <창원시문화상 수상자를 만나다> 편집장을 수년간 맡아 오며 잡지의 상징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번 여행 중에도 이번 회지 발간을 위한 회원들의 원고 챙기는 일을 솔선하여 주었다. 최 성명(화가) 회원은 동남아 한 나라에 대안학교 운영을 건실하게 하고 있어 말없이 실천을 증명하고 있다.
오창성(미술) 회원은 큰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여행지 사진자료 챙기는 일에 이번 여행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틈틈이 스케치에도 열성을 보였다. 이런 그의 노력은 우리 회지에 그대로 담겨 나오리라 기대된다. 오 회원은 나중 들으니 강화에 다시 다녀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내용은 이번 이 책에 반영되어 나오리라 기대된다.
<창원시문화상 수상자를 만나다.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