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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표시인선 34/ 오하룡 시선집 <母鄕 失鄕 그리고>

┃시인의 말

 

내 문학의 변명


나는 미미 천박한 내 불민함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처한 생존 상황의 증언적 문학화에만 몰입하였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가 몰입하라고 해서 몰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문학의 형상화만 의식하여도 안 된다. 문학으로서의 본질적 의미의 달성과 숙련미를 갖추는 것 또한 필연적이다. 나는 불문곡직 쓰는 일에만 매달린 것이다. 이것은 내 천성의 발로인지 모르겠다. 국가 산업화의 기반인 공단의 개설은 상전벽해와 함께 거주지의 대 이동을 가져왔고 이러한 이향離鄕 실향失鄕의 충격은 내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어쩌다 내 문학의 본격 출발과 함께 선조의 터전인 구미와 함께 현실적 생존터전인 창원이 공단화 되는 핵심적 본류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첫 시집 《모향母鄕》은 물론 두 번째 《잡초의 생각으로도》, 세 번째 《별향》, 네 다섯 번째인 《마산에 살며》 《창원별곡》 등이 거의 이러한 시대 상황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그 이후도 크게 변화된 것이 없다. 지금도 내 글의 주류적 본분은 거기의 진행형이다. 여기에 대한 본질적 언급은 이번 시집에 발문을 흔쾌히 써주신 유산 선생께서 평설하고 있다. 선생께 각별히 감사를 표한다. 

 

┃차례 ┃

 

시인의 말


제1부
경로(經路)/ 공단(工團)/ 시루골에서·1/ 시루골에서·2/ 시루골에서·3/ 종(鐘)소리/ 모향(母鄕)/ 이주(移住)/ 흙/ 그것 생각하면/ 잡초의 생각으로도/ 그것 저것 다 덮어두고/ 딴 길을 걸어/ 괴기 사이소/ 새해 아침에는 이상해/ 알라딘의 램프/ 무학산/ 훗날 어느 날에/ 무제


제2부
어느 날/ 별향(別鄕)/ 고향 어디냐고 묻는 친구야/ 괭이/ 김씨네여/ 농한기/ 장사꾼/ 잡초/ 정답/ 주먹구구식/ 담쟁이 덩굴/ 이주민·1/ 이주민·2/ 캔버라·1/ 캔버라·2/ 원주민·1/ 원주민·2/ 몽달귀신/ 농사꾼 자식/ 그 동네


제3부
재수여 가라/ 남천(南川)에게/ 공감/ 장보기/ 천성/ 무심하기 연습/ 어떤 심사/ 노인/ 덤정 가는 길/ 오두막집/ 변절/ 그러고만 있구나/ 그리운 환영(幻影)/ 다시 다짐하자/ 리모컨/ 대통령의 눈물/ 사진 속 어머니/ 그때 진균이/ 미숫가루/ 오후 한때


제4부
밥/ 약수암·1/ 러브호텔/ 곰절에 가면/ 이심전심(以心傳心)/ 반가사유상/ 삼색 볼펜 한 자루의 명상/ 저 물빛/ 고구려 지도/ 사모곡(思母曲)/ 평등/ 국화를 위하여/ 종말/ 몽롱한 이 기분/ 통일 돌개바람/ 방향(方向)/ 어째야 하는지 묻노니/ 큰 어른 그립네/ 진땀/ 김경윤


제5부
아름다운 실랑이/ 통일이여/ 다들 어디 갔는가/ 마음꽃/ 묻는다/ 가뿐한 만남/ 환생/ 도시의 불빛/ 종점/ 시의 맛/ 지리산에 다녀오면/ 창원의 집


■발문 
이변(離邊) 그리고 적중(的中)-오하룡 시선 평설
윤재근(문학평론가·한양대 명예교수)

 

 

┃발문 중에서 ┃

 

시인으로서 오하룡은 마냥 인간을 쓰다듬어주려는 시를 짓는다. 어느 누가 쓰다듬어줌을 싫어하겠는가? 그의 시들은 서글픈 인간사(人間事)가 우리를 망가지게 할까 두려워 삼가고, 조심조심 어루만져 쓰다듬어주고자 애쓴다. 그의 시를 만날 때마다 시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 시원(始源)이 열지고언지(說之故言之)임을 어렵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이를 터득한 후 거침없이 “나 시인올시다” 한국문단에 자립선언하고 등장했다는 사실을 오 사장을 알고 지낸 지 15년쯤 뒤에야 알았다. 이처럼 오하룡은 산천(山川)에 저절로 나서 절로 사는 산목(山木)같이 스스로 기립(起立)한 시인이다. 이는 내가 오랫동안 오하룡의 시들을 만나본 덕으로 내리는 증언(證言)이다. 

 

4·19, 5·16을 거치면서 세상은 어디서나 양변(兩邊)으로 나뉘어 아우성치고 두 손은 이편은 저편을 저편은 이편을 향해 삿대질하던 때 “간신히 가다듬어 내어 미는 손”은 어떤 “손”일까? 보수(保守)의 손도 속셈 다르고 진보(進步)의 손도 속셈 다른지라 “간신히 가다듬어 내어 미는 손”은 마음 편히 잡아볼 세상물정(世相物情)이 없다. 본래 창랑(滄浪)의 물이 깨끗하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지만 그래도 소중한 것이 삶인지라 더럽다고 뭉개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편저편 갈라서서 서로 탈탈 털어버리고 ‘실신(失身)’에서 깨어나 정신 차리고 우리 함께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간신히 가다듬어 내어 미는 손’은 ‘닿을 곳이 없는 손’이라 말하는 시인 오하룡. 그는 이변(離邊)의 시인이다. ‘닿는 곳이 없는 손’이야말로 주먹 쥐고 삿대질하는 손보다 서로 털어버리고 우리 삶을 보듬어 가는 ‘손’이 더 소중하지 않겠느냐 자문(自問)한다. 그래서 ‘가뭄’은 ‘닿는 곳이 없는 손’을 잡아보라 하는 것이다. ‘닿는 곳이 없는 손’은 두 패로 나뉜 세태의 어느 쪽 손도 아니다. 그 손은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의 손임이 분명하다. 이쪽저쪽을 떠났다 해서 중간치가 아닌 손인지라 기회를 엿보는 그런 손도 아니다. 밀고 당기고 지지고 볶아 삶을 난도질하다 보면 진실로 소중한 삶은 갈가리 찢기고 말지니 우리 삶이 소중하지 않느냐고 애달파하는 손길이 분명하다. 

 

인간 오하룡은 희수(喜壽)를 넘겼지만 시인인 덕으로 여전히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보채는 코흘리개 유년(幼年)에 머물러 사람을 울컥하게 할 수 있는 시를 짓는다. 우리로 하여금 삶의 눈물겨운 진실을 퍼 올리게 하는 《모향(母鄕)》의 시인으로서 본분(本分)을 따랐듯이 그의 〈도시의 불빛〉 같은 ‘자술시(自述詩)’ 역시 시인의 본분(本分) 따라 삶을 미더움으로써〔以信〕 마주할 뿐이다. 그래서 시인 오하룡은 아름다운 말로 다듬고 꾸미지 않고서도, 북받쳐 울컥하게 삶을 어루만져 살맛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해줄 시선집(詩選集) <오하룡 시선>에 평설(評說) 삼아 발문(跋文)을 붙일 수 있게 돼 매우 기쁘고 <오하룡 시선>이 무척 기대된다.
― 윤재근(문학평론가, 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