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노산 선생에 대한
몇 가지 상념



오하룡


나는 지금도 노산 문학을 접하면, 그가 까마득히 먼 곳에 위치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의 문학이 그만큼 내가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경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학을 처음 접한 것은 가곡에서였던 것 같다.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사우' 같은 것을 흥얼거리면서였다. '가고파'는 그 얼마 후에 익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본격 문학에 눈을 뜨면서 구체적으로 책을 통해 그의 글과 만나게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의 책은 장르별로 편집되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 드물었다. '노산 문선(鷺山 文選)'이라는 제목으로 판형도 일반 판형보다 작으면서 부피만 볼록한 그런 책이 내가 처음으로 접한 것이었다.
이 책은 내가 오랫동안 소장해왔었는데 최근에 와서 노산 선생을 본격 연구하는 학구파 후배 문인이 있어 그에게 기증하고 말았다. 구입할 당시 이미 판권이 손상되어 있어 그 책이 어느 출판사의 몇 년도 판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지난 『마산문학』 22집에서 민병기 시인이 작성한 노산 선생의 저서 목록을 보니 '노산 문선'이라는 제목의 책이 광복 전인 1942년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출판사는 영창서관이다. 내가 소장했던 책이 이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자료에 보면 광복 전에 단행본으로 『노산 시조집(鷺山 時調集)」이 1932년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유일본을 내가 만나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노산 문선』에서 그의 시조작품을 볼 수 있은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나는 이 시조를 음미하면서 세상에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그의 너무나 능란한 글 솜씨에 홀딱 반하였다. 나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면서 배움에 목말라 동냥 중학을 다니며 객지를 떠돌았다. '고향 생각'의 한 구절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그때 나도 홀로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인편으로 소식을 드리고 할 때였다. 그러니 이런 정황이 얼마나 마음에 닿았는지 모른다. 이 1절도 이처럼 절창이지만 2절의

    고개를 수그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요 / 배 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기뭉기 / 때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마지막 연 '때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부분은 나를 기어이 훌쩍거리게 만들기 족했다. 하루도 내 의복은 꾀죄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모습으로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러 마을 사람을 만날 때의 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 쪽지 편지 몇 자보다 어머니는 내 행색이 궁금하여 '얼굴은 어떻더냐, 건강해 보이더냐' 하고 꼬치꼬치 캐물으시는 성품이시다. 이런 정경을 훤히 꿰뚫고 있는 나는 이 부분을 흥얼거리면서 얼마나 객지의 설움에 북받쳤던가.
노산 선생의 작품에서 내가 위로받고 영향 받은 것을 어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으랴. 그때 나는 부산에 있었다. 그것도 수정산 중턱의 피난민 판자촌에서, 어떤 때는 고아원에서, 어떤 때는 주경야독의 고된 공원 생활을 하며 역경을 극복하고 있었다.

    오륙도 다섯 섬이 / 다시 보면 여섯 섬이 / 흐리면 한두 섬이 / 맑으신 날 오륙도라 /   흐리락 맑으락 하여 / 몇 섬인줄 몰라라

수정산에서는 오륙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를 듣고 이 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영도나 광한리에 가면 오륙도가 잘 보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신기하게도 섬이 다섯개도 되고 여섯개도 되어 이름조차 오륙도가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름으로 하여 오륙도는 당시 나 같은 촌뜨기를 현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이 섬이 노산 선생의 작품이 되면서 더 유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흠모하게 만들었다. 이 섬은 노산 선생의 문학 속에 자리잡으면서 확고한 부산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이 섬을 무엇으로 이 노산 선생의 작품보다 더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으랴.
노산 이은상이라는 분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나도 문학 공부를 하면 이처럼 어떤 대상이건 서정적으로 절절하게 표현 할 수 있을까. 문학이라는 것이, 시라는 것이 내가 감동을 받았듯이 모든 읽는 분들을 감동으로 몰아갈 수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하구나. 그렇다면 나도 문학을 해야겠구나. 어이없게도 나는 이렇게 하여 문학 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작품과 구체적으로 접촉하면서, "그럼 그렇지, 이게 문학이라면 천재가 아니면 못하는 게 문학이구나. 어쩌면 그의 글은 어느 것이든 한결같이 이렇게 고르게 완벽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시 하나, 산문 한편에서 약간의 하자나 모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의 작품은 탄복, 탄성, 경탄의 그런 성숙한 문학의 세계였다.
나는 그를 오르지 못할 천상의 나무쯤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그런 인물이었다. 나와 동시대의 인물로 도저히 이 지상에 함께 산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만이 누릴 특별한 세계가 있고, 능히 그런 세계에 그는 있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나는 그의 작품에 몰입하면서, 그리고 성년이 되어 외람 되게도 문학의 길에 들어선 후에 만나는 그의 작품 역시, 나에게 한번도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면서 어찌 그렇게 애국심은 솟아나는 것일까. 그 점 또한 그를 외경스럽게 보도록 하는 요소였다.
요즘 나는 유행가나 가곡 등 많은 노래말을 유심히 살펴 볼 기회가 있다. 아쉽게도 완벽한 가사는 만나기 쉽지 않다. 하다못해 토씨 하나라도 고쳤으면 하는 것이 흔히 눈에 띄는 것이다. 그러나 편향된 내 의식 탓인지는 모르나, 노산 선생의 노래말에서는 거의 그런 노래말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나는 마산에 정착하게 되면서 이 위대한 문인이 그의 고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유적지조차 흐지부지 관리되는걸 보면서 솔직히 아연한 심정이었다. 지역의 빈약한 재정 탓이라고 위안도 해 보았다. 여유만 있다면 어찌 이런 인물을 챙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이상했다. 그를 그렇게 내세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가 고향에서 한 일이 무엇인데."
"고향에서 친구 부인을 꿰차고 야반 도주한 주제인데."
"친일을 했다는데."
"자유당 때는 이승만에 붙고 5.16 후에는 박정희한테 붙어 일신의 영달에만 급급했다는데."

밑도 끝도 없는 이런 말들이 떠다니면서 그를 폄하하고 있었다. 그런 말이 소수의 입을 통해 떠다니는데 이상하게 다수는 침묵 일관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수의 풍문이 진실이 되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 유행처럼 지역마다 애향 인사들이 부각되고 있다. 그 인물들이 지역세를 타고 빛을 받으면서 자연히 마산에서도 노산 선생이 들먹거려지게 되었다. 문인들이 나서면 자연스럽고 보기도 좋으련만. 문인이라는 사람들이 워낙 힘이라곤 없는 무력한 개인주의자들이니, 나 자신부터 제 살 도리에만 급급하느라 이 위대한 선배를 위해 당당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한심한 자세를 탈피 못하고 있다. 문학 단체 역시 그 무력한 개체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보다 못한 외곽에서 들먹거리게 되자, 그때사 문인들도 약간의 고개 드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당연히 이때를 노리고 있던 검증을 내세운 참여 여론단체가 가만 있지 않는다. 예의 풍문을 문제 삼고 나선다. 친일한 사실이 없다고 하자, 앞으로 어디에서 불쑥 튀어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깃대를 든다.
이승만 정권에서 시작하여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권에의 동조는 결국 부정선거의 배후가 되고, 군사혁명에서 군사 강권정치에 이르는 뒤틀린 정권에 대한 방조행위가 아니냐는 책임까지 들먹이게 된다.
이러면서 이들 정권의 '나팔수'로까지 비약해서 몰아간다. 그의 영향력이 그만큼 위력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된다. 그렇다고 그를 그들 정권의 간판이나 상징으로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며 따라서 진실이 아니다. '나팔수'라면 적어도 노산 선생이 그 정권이나 집권당의 대변인 또는 그런 위치에 있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적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생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며 심각한 명예훼손일 수 있다.
본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 가족들조차 적극적인 대응력이 없는 상황이다. 그럴수록 조심스런 접근이어야 하며 정중하고 사려 깊어야 하고 지역의 위대한 선조에 대한 예우는 지켜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럴 때 우리 문학 단체의 명확한 태도 표명 같은 것이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문인단체는 그 설립목적을 문학 발전과 친목도모, 그리고 문인으로서의 권익옹호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노산 선생에 대해 공식 견해를 밝히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경남시조문학회가 앞장서서 노산 선생의 이미지 제고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런 행동의 한 전형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 내가 받은 노산 선생의 문학을 통한 영향으로 하여 그의 문학 외적인 영역까지 변호하고 싶어지는 심정을 어쩌지 못한다. 지금도 나는 '가고파'를 흥얼거리고 있으며 '옛 동산에 올라'를 노래하고 있다. '고향 생각'을 흥얼거릴 때는 한참씩 옛 추억에 젖는 한량없이 작은 감상주의자가 된다. 이번 호에 자료가 될까 하여 그간 언론에 취급된 노산 선생 관계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혼자 넋두리 삼아 푸념을 해본다.


계간 작은문학 제14호(2000년 여름호) 목차

■시와 그림│당신과 나 ― 李殷相
■책머리에│노산 선생에 대한 몇 가지 상념 ― 오하룡
■이광석 신작시 모음│나무(1)  외 9
■이영자 신작시 모음│새내기 농부의 고민(1)  외 9
■임종린 신작시 모음│북한산에 오는 봄  외 2
■최은하 신작시│내 그리운 이여
■신현득 신작 동시│독도에 나무심기  외 1
■러시아 기행문│네바강에 흐르는 황혼의 서정―공영해
■다시 읽는 수기
│당신의 이 成熟한 約束을―趙有卿
■수필
 
황금빛이 주는 여유 - 강현순
  출생기-고동주
  유전론과 환경론을 넘어 - 김병익
  해병으로 맺은 인연 - 김수년
  수를 놓던 처녀들 - 김원숙
  휴가의 경제학 - 박시룡
  게 섰던 그 큰 아카시아 나무 - 이광호
  더러움과 깨끗함 - 이응인
  목련이 핀다 - 이종화
  마지막 수학여행 - 허학수
■이승희의 번역시
 
깃발 ― 유치환
  湖水 ― 박철석
  살이 살과 닿는다는 것은 ― 이선관
■다시 읽는 소설│歸路―南廷賢
■생활속의 발견②│마로니에를 가꾸면서―吳仁文
■평론│간추려 본 수필의 장르적 특성―河吉男
■자료모음│노산 이은상 선생 검증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