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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정체성
정목일
금년 초에 서울의 한 문학회에 문학강연을 하기 위해 참석했다. 창원에서 서울까지 가는 것이기에 시간적, 경제적인 여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어서 신경이 쓰였다.
참석자는 K문인협회 문인 50여 명이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이 지역구 출신 4선 의원 경력의 정치인이 나와서 정계은퇴 인사를 했다. 정작 정치에 손을 떼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진 단장의 아픔을 경험했다고 실토했다. 그는 수필가이기도 해서 '글만 열심히 쓰십시오.'라고 인사했다.
이제 문학행사가 전개되려니 여겼더니, 이 지역 현역국회의원으로 저명한 정치인 L씨가 나와서 인사말을 늘어놓았다. 이것으로 정치적인 말은 끝난 줄 알았는데, ㅜ회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인사말씀을, 구청장이 출마자여서 알림의 말을, 또 시의원으로 경선에서 참여하여 고배를 마신 사람이 이에 대한 변을 늘어놓았다.
총선을 앞둔 시점임을 고려해도 불원천리 서울까지 간 필자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맥이 빠지는 듯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치인이기도 한 이사람들은 시인이거나, 수필가로 문학회의 회원 신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주최측에서도 정치성을 배제 하지 못하고 묵과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마음이 언짢았다. 어떤 행사든지 정체성과 개최 목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문학행사는 문학 위주로 진행돼야 하며, 정치성이 게재되어 행사의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발언자가 정치인 신분을 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행사에선 정치에 관한 얘기는 삼가해야 한다.
문화행사에 고위 관료들이 참석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축사를 해야만 행사가 빛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고위 공직자의 참석 여부에 따라 행사의 성황과 호응도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권위적이고 비문화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문화축제나 문화행사장에 가면, 주최자인 문화 예술인은 단하에 자리 잡고, 공직자가 단상에 올라 축사하는 장면을 흔히 본다.
문화는 단상과 단하의 구별을 없애는 것이어야한다. 시민 죽제 행사장에 동원된 시민들이 운동장에 줄을 선 채 오랫동안 단상의 시장 연설과 많은 사람들의 축사를 들어야 한다면, 시민은 다시는 문화행사에 오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기 쉬울 것이다.
문화의 주권자인 시민을 한순간에 열등심을 안겨주는 피동자로 만드는 순간인 것이다.
세계화 개방화시대를 맞아 정체성을 살리지 못한 문화는 점점 쇠퇴하여 모습을 감추고 있다. 문화에 관한 한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 수준 높은 문화와 수준 낮은 문화로 구분하여 비교할 수 없는 개념이다. 뉴욕의 문화가 아프리카 밀림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란 그곳 주민들을 가장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문화가 쇠퇴하는 것은 정체성 상실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어떤 행사일지라도 정체성을 살려야 효과를 올릴 수 있다. 문화의 정체성은 고유성, 개성, 전통성을 바탕으로 독자성과 차별성을 지녀야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는다.
어느 지역 문화행사에서나 볼 수 있는 관중 동원이 가장 손쉬운 '열린 음악회'나 유명 인사 초청공연 등에 신경을 쓰면 정체성 상실과 주객전도의 문화행사로 전락되고 말 뿐이다. 문화의 정체성을 살리지 않으면 지역문화는 상업적이고 힘이 센 문화에 종속될 것이 분명하다. 우선 달콤하다고 해서 본질과 순수성을 잃는 일을 자행해선 안될 것이다.
계간 작은문학 제26호(2004년 가을호) 목차
■시와그림│내 고향 ― 이원섭
■책머리에│문화의 정체성 ― 정목일
■특별기고│樂論 1 / 노래와 天 ― 윤재근
■강연초록│웃음과 문학, 여름 나기를 위하여 ― 김열규
■신작시
아가에게 외 3 ― 남용술
을숙도에서 외 5 ― 도리천
후가막골 여름 외 9 ― 유순예
비 오는 자정 무렵 외 4 ― 이상옥
소멸 외 2 ― 정시운
사해(死海) 외 4 ― 정영태
사리(舍利)로 남아서 ― 하길남
■문학기행│정지용 홍명희 생가 및 충북 문학기행 ― 최영인
■신작수필
동동구리무 장수 외 2 ― 김화홍
자연으로의 회귀 ― 박래녀
내 친구의 추억 ― 홍하정
초혼(招魂) ― 황선락
■평론
一筆, 또는 깨달음의 詩 ― 정목일
세상 일과 사람들에 대한 근심 또는 애정 ― 오하룡 시집 『내 얼굴』― 윤상운
역사라는 해안에 암각된 시적 이미지와 휴머니즘 ― 임신행
■신인평론│초보독자의 시조 나들이 ― 김선혜
■이소리 시인의 향수 에세이│창원, 추억 속의 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