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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선생의 마산사랑
오정방 재미 시조시인
마산은 위대한 민족시인을 낳은 도시다. 올해로 탄신 102년이 되며 서거 23년째가 되는 노산 이은상 선생을 배출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마산이 다른 도시보다 더 유명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누가 뭐래도 〈가고파〉의 시인 노산 선생의 고향이라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혹 마산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민가곡 〈가고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만큼 이 가곡은 우리나라 최고의 가곡으로 선정되어 애창되고 있다.
필자가 이 얘기부터 하는 것은 지난 2003년 《월간 조선》이 성악가와 음대 교수100여 명으로부터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한국 최고의 가곡은 〈가고파〉, 최고의 작곡가는 바로 〈가고파〉를 작곡한 김동진 교수, 최고의 성악가는 오현명 교수를 뽑은 적이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가고파〉는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인 1932년 1월 5일에 탈고되어 3일 뒤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되었는데 이 무렵 노산 선생은 서울 신당동에 사셨기에 탈고지를 행화촌이라고 원고 말미에 밝혀 놓았다.
선생의 시조 〈가고파〉가 오늘의 〈가고파〉가 된 것은 물론 뛰어난 작곡가의 역할이 적지 않다.
〈가고파〉가 지상에 발표된 이듬해 작곡가 김동진 선생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문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의 신분이었다. 국어시간에 노산 선생과 갑장이며 일본 유학시절 함께 지냈던 무애 양주동 선생이 현대시조를 가르치면서 〈가고파〉 시조 10수를 소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배운 김동진 학생은 이 시조에다 곡을 붙이면 참 좋은 곡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현제명 선생이 곡을 붙인 〈가고파〉를 들어보고는 자신도 빨리 이 시조에 곡을 붙여야 되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혀서 곧 영감을 얻어 멜로디를 오선보에 옮긴 것이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였다고 한다. 좋은 곡은 먼저 좋은 시, 좋은 가사가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해서 전편 1수에서 4수까지가 작곡되어 불리게 되었는 바 해방 후 평양에서는 음악회가 있을 때마다 성악가들이 이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어느 때 가서는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자유롭게 이 곡이 불렸는데, 6·25 이후에 작곡자가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작곡한 〈가고파〉가 남한에서 그렇게 유명한 가곡이 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작시자와 작곡자와의 첫 만남은 6·25 한국동란 후 2~3년 뒤인 부산에서였다고 김동진 선생은 회고한다. 당시 노산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호남신문사가 부산에서 전남산업전시회를 가졌던 전시장을 김동진 선생이 방문함으로써 첫 대면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핸가, 노산 선생이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용마산에 〈가고파 시비〉가 세워질 때 작곡자도 초청되었는데, 10수 모두가 시비에 새겨진 것을 보고 자신도 나머지 6수를 마저 작곡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날 저녁에 축하강연과 음악회가 열렸을 때 작곡자 자신이 이 〈가고파〉 전편을 직접 불러 갈채를 받았다. 이 박수 속에는 빨리 후편을 작곡해 달라는 마산 시민들의 염원이 담겨져 있음은 물론이었다. 그 후 2개월여의 산고 끝에 마침내 후편이 완성되었다. 〈가고파〉 전후편이 처음 작곡 발표된 것은 전편이 작곡된 지 꼭 40년 후가 되는 1973년 12월 10일 노산선생고희기념음악회가 숙대 강당에서 있었을 때였고, 숭의여고합창단과 테너 김화용 씨가 독창을 했다. 필자도 그날 밤에 노산 선생을 모시고 참석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매우 흡족해 하셨고, 관중 모두의 흥분과 감격은 대단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전후편이 처음 발표된 그날로부터 벌써 3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가고파〉 전편이사 수없이 불렀으므로 잘 부를 수 있으나 후편은 그날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하여 어렴풋이 멜로디만 기억할 뿐인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가 서울의 지인에게 연락하여 이메일로 받아 CD를 구웠다. 참으로 좋은 시대에 산다는 생각을 하면서 필자가 살고 있는 포틀랜드의 한인방송 ‘FM KOREA’에서 지난 9월 18일 노산 선생의 23번째 기일에 맞춰 특집으로 방송하였고, 이것을 좀 더 확대 편집하여 10월 22일(토) 선생의 102번째 생신일에는 LA에 소재한 ‘라디오 서울’을 통하여 노산 선생 특집이 방송되어 워싱턴, 뉴욕, 하와이 등 미국 전역에서 〈가고파〉 전후편을 모두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 노산 선생이 마산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가곡은 아무래도 〈옛 동산에 올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해부턴가 해마다 ‘노산가곡의 밤’이 마산에서 개최되어 횟수를 거듭하고 있는데, 생전에 노산 선생은 이날만은 꼭 참석하여 마산의 동향인들을 만나고 성악가들을 격려하셨다. 노산 선생은 해학이 풍부하셔서 성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몇 마디 말씀만 하셔도 좌중은 늘 폭소가 가득하였고, 가곡 몇 곡을 부르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저들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무튼 노산 작시가 가곡으로 많이 애창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은데 대부분이 시조작품인 것을 새삼 깨닫고 노산 선생이 한국현대시조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아무리 높이고 기려도 오히려 부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고파〉(김동진 곡), 〈고향 생각〉(홍난파 곡), 〈그리워〉(채동선 곡), 〈그리움〉(홍난파 곡) 〈그 집 앞〉(현제명 곡) 〈금강에 살으리랏다〉(홍난파 곡), 〈동무 생각〉(박태준 곡), 〈봄처녀〉(홍난파 곡), 〈사랑〉(홍난파 곡), 〈산으로 가자〉(김동진 곡), 〈성불사의 밤〉(홍난파 곡), 〈옛 동산에 올라〉(홍난파 곡) 〈우리 속리산〉(김동진 곡), 〈장안사〉(홍난파 곡), 〈탄금대〉(김동진 곡) 등과 그 밖에 교가校歌나 사가社歌 경남도가道歌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