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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선생의 백운산白雲山 은거지 답사

 

김교한   시조시인, 전 김해교육장

 

1.

 

한국민의 민족사상 말살을 꾀하던 일제가 1942년 수차에 걸쳐 마지막 민족운동 단체로 그들이 주목해 온 조선어학회 회원 33(이은상 포함)을 붙들어 가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가하여 구속 조치한 사건을 조선어학회 사건이라 함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일제의 언론 탄압이 심해질 무렵 노산 선생은 1938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전남 광양 백운산에 은거 중 조선어학회 관련으로 19421223일 검거되어 함경도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1년간 옥중생활을 하다가 함흥형무소로 넘어가 19439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함흥형무소를 나온 1943년 이후 해방 때까지의 선생의 행적에 대하여 일부에서 친일 의혹설을 제기한 바 있어, 진위는 구체적인 자료에 의해 꼭 가려져야 한다고 믿어왔다.

마산시가 시민 정서 함양 및 문화적 기반과 긍지의 고양을 위하여 노산문학관 건립계획을 발표하고도 문학단체와 대다수 시민들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사업추진에서 주춤거리며 시기를 늦추어 온 이유를 짚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주된 이유는 노산 선생에 대한 일제 말기의 행적 논란에서 의연하게 밀고 나갈 힘있는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았다. 그러므로 진실하고 구체적인 확인 과정을 거쳐 그 떳떳한 자료를 내놓는 것만이 의혹과 불신을 해소하는 마지막 해답이라는 것을 믿었다.

노산 선생이 친일을 했을 것이라는 설이 누구에 의해서 무슨 근거에 의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말 우리글만 보존하면 언젠가 독립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뭉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서 애국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가혹한 옥중 생활을 감당해 온 선생의 떳떳한 행적을 일부에서는 너무나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 관련으로 홍원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된 사람들이 받은 고문은 물 먹이기, 공중에 달아치기, 비행기 태우기, 메어치기, 불로 지지기, 개처럼 사지로 서기, 뺨치기, 얼굴에 먹물로 악마 그리기, 동지끼리 서로 치게 하기 등이었다는 기록을 보고 놀랐다.

 

2.

 

19439월 이후의 노산 선생의 행적을 확인하고자 여러 대학 도서관을 다니며 관련 서적 자료를 찾아보고 노산시조집등 저서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1958515일 간행한 노산시조선집에 옥중음獄中吟이라는 중간 제목 서문에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해방 때까지의 행적 개요가 간략히 기술되어 있어 여러 번 읽고 또 읽어보았다. 옥중음에는 서문 외에 홍원옥중, 함흥옥중, 광양옥중에서 읊은 시조 15제목 25수가 담겨 있다.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에 옥중음의 서문과 세 곳 옥중에서 읊은 시조 2제목씩 6제목 11수를 골라 보았다.

 

자료 1

 

1942년 가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咸鏡道 洪原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어 1년을 지내고 다시 咸興감옥으로 넘어갔다. 얼마 뒤에 咸興감옥에서는 잠시 놓여 나와 妻子를 데려다 둔 全羅道 光陽 白雲山 밑으로 돌아갔건마는 다시 또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그곳 경찰서에 갇히어 해를 보내다가 해방과 함께 풀려 나왔다. 그 동안 세 군데 獄中에서 읊은 노래들이 꽤 있었건마는 거의 다 잃어버리고 해방된 뒤에 겨우 몇 조각만을 거두어 두었던 것 중에서도 여기 몇 편만 추려 싣는다.

 

1942년 가을 : 조선어학회 인사 구속 시작한 때(필자 주).

 

洪原獄中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

 

어머님 보내 주신

두둑한 솜이불 덮고

얼음 같은 마루방에서도

차운줄을 몰랐습니다

겨우내 어머님 품속에서

코만 드렁드렁 굴었습니다

철창에도 봄이 왔습니다

인제는 한결 쉽습니다

몸은 못 돌아가고 빈 이불만 보냅니다

짐 뭉치 받으시거든

부디 우시지 마옵소서

 

이 이불 펼치시면

이가 우글부글 하오리다

그래도 친구들이랑 같이 앉아 없이 나고

언제나 웃는 얼굴이오니

安心하시옵소서

 

비 파

 

얼굴은 여위라 하라

風化 안 되는 心臟이다

그러길래 내 노래는 피어린 옛 곡조다

철창 살

두 손으로 움켜잡고

琵琶 마냥 타 본다

 

 

그에게로 던지자

 

가슴 한 구석에 패어진 낭떠러지

메울 수 없는 벼랑 밑에 웃고 선 이가 있다

한 송이 시들은 꽃이나마

그에게로 던지자

 

가냘픈 가지 끝에서 바람에 지치고 말라

떨어져 가는 그대로 아무 미련도 없다

차라리 아름답지 아니하냐

그에게로 던지자

 

내가 아직 살았는가

 

깊은 밤 찬 마루에 누워

숨소리를 들어본다

내가 아직 살았는가 그래도 못 미더워

손목에 뛰는 맥박을 슬그머니 짚어본다

 

한 바다 물거품 하나 눈앞에 떠오른다

웃어본다는 게 어째 씁쓸한 표정이냐

주먹을 힘 주어 쥔 양

언제 그대로 잠이 든다

 

 

해바라기

유치장 마당 담 밑에 해바라기가 많이 심겨져 있다

 

나는 머리에 선

한 송이 해바라기

아침이 오면 숙였던 고개를 들고

너희랑 나뉘는 交叉點에서

汽笛 소리를 들을 게다

 

나는 밤을 보내는

한 송이 해바라기

눈물로 얼굴을 씻고 님 만나는 아침이면

한사코 따라만 가련다

밤이 없는 나라로

 

南風賦

 

읽다 둔 책장을랑 덮지 말고

펴 두시오

南風이 날 대신 내 방으로 불어들어

뒤지며 펄럭이거든

날 본 듯이 여기오

1958515일 간행 노산시조선집에서

 

3.

 

상기 노산시조선집옥중음서문에 명기된 내용은 참으로 명료하여 잔잔한 믿음을 주었다. 마음 내친김에 노산 선생이 일제 탄압을 피해 은거한 백운산을 직접 찾아가 그 당시의 생생한 자취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선생이 걸어온 한 시점의 자국을 따라 일시 방랑객이 되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모르고 있었던 자료를 있는 그대로 수집하여 알리는 것이 문학 후배로서 할 임무라고 생각했다.

지난 5월 광양 쪽 사람에게 전화를 통해 노산 선생의 백운산 은거 사실을 물어 보았더니 광양서초등학교 교가 가사를 지은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노산 선생이 은거한 곳을 알려 주었다. 백운산 여러 곳을 방랑했으나 주로 오래 은거한 곳은 광양시 진상면 신황마을 황호일 님 댁과 같은 면 지랑마을 김현주 님 댁이었으나 두 분 다 고인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 것은 610일 창원역에서 목포행 무궁화호를 타고 갔다. 하동 섬진강을 지나 산중 한적한 진상역에서 내려 황호일 님의 장남 황하운 님을 만나 그분의 안내에 따라 먼저 진상중학교에 갔다. 교문을 들어서자 오른쪽에 큰 비석이 서 있었는데 진상중학교 사적비였다. 이 비문은 건립 주체인 진상중학교 동창생들의 요청에 의해 노산 선생이 썼음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 비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었다.

앞에 언급한 황호일 님을 일제하 백운산에서 만나 지낸 인간적인 관계며, 노산 선생이 백운산에 은거 중 광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석방된 사실이 담겨 있으니 그 비문이 참으로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진상중학교 설립에 황호일 님의 큰 공적과 김현주 님 외 여러분이 베푼 협찬의 미담이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사적비 전문을 말미에 붙여 구체적인 자료로 제시하고 싶었다.

황하운 님의 안내에 따라 노산 선생이 묵고 지낸 백운산 속 신황 마을을 찾아갔다. 수자강댐 안쪽으로 깊은 산중에 들어가니 숲속에 집이 몇 채 있는 마을이 있었다. 옛집들은 다 불타고 재건축한 집이었다. 선생이 은거한 황호일 님 집 뜰에 서보니 감회가 무량했다. 산새 소리 바람 소리조차 아득하기만 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백운이 감도는 산협을 뒤돌아보며 떠나왔다.

지랑 마을 김현주 님 댁으로 방문했을 때는 삐딱한 나무 대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여 다음에 찾아보기로 하였다. 종일 안내를 해 준 황하운 님은 광양향교 전교를 지냈으며 대를 이어 백운산을 지켜나갈 분으로 보였다.

다시 답사에 나섰다. 지난 619일 사전 연락을 해놓고 이미 고인이 된 김현주 님 댁을 방문했다. 지랑 마을은 역에서 마주 보이는 그리 멀지 않는 산기슭에 있었다. 김현주 님의 제씨 김기주 님의 안내에 따랐다.

노산 선생이 은거한 목조 기와집은 아래채인데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세월 건너 강 건너 선생이 기거했던 방 앞 대청마루에 앉아 속 대화를 나누었다. 뜰에는 70년 자랐다고 하는 키 낮은 감나무 한 그루가 그리운 눈길을 주었다. 김현주 님의 장손(김계한)이 살다가 문패만 달아놓은 채 타처로 떠나고 타인이 집 관리를 하고 있었다.

 

4.

 

노산 선생은 해방 전이나, 해방 후 백운산을 떠났어도 소원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곳 초등학교 교가 가사를 지은 일이며, 황호일 님 장손자(황상보) 결혼식 주례를 맡아 준 일과 진상중학교 사적비를 세울 때 동창생들의 요청에 따라 비문을 써준 일 등을 봐도 늘 백운산 쪽을 잊지 않고 지낸 두터운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노산 선생의 은거 행적이 곁들여져 있는, 2의 고향다운 정서가 담긴 진상중학교 사적비가 풍우와 벗하여 굳건히 백운산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백운산을 여러 번 답사한 보람은 헛되지 않았다. 일제 말기에 노산 선생이 백운산 밑에 은거한 그 마을과 주택을 확인한 일이며 거기서 구금, 해방된 흔적이 담긴 진상중학교 사적비를 처음으로 만난 것과 백운산 마을에서 노산 선생과 은거 생활을 함께한 황호일 님의 장남 황하운 님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이것은 앞에 예시한 노산시조선집에 수록된 옥중음제목의 서문 내용을 그대로 정직하게 뒷받침해 주는 살아 있는 자료들이었다.

1943918일 함흥 옥중에서 기소유예로 나온 이후 해방 때까지의 노산 선생의 행적은 분명해졌다. 백운산에서 은거 중 사상 예비 검속으로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석방(1945. 2. 2~1945. 8. 15)된 사실 그대로였다. 노산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 늘 일제의 감시대상자였음이 드러났다. 문학인으로서도 그만한 거봉이었음에도 보기 드물게 일제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지내온 분이었다.

상상이나 유언流言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전하고 싶어 기록을 찾아내고 답사를 하여 자료를 내놓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의문설에 묶이어 주춤거리는 시 당국에 현안이 되어 있는 한 시점의 참고자료로 내놓고 싶었다.

 

자료 2

 

진상중학교 사적비 전문

 

조계산 한 가닥이 백운산으로 뻗어 내린 아래 2000년 오랜 전통을 지녀 온 역사 깊은 고을이 있으니 광양군이요, 수자강 줄기가 섬진강으로 흘러내린 서쪽 언덕에 기름진 터전을 이루니 여기가 바로 광양 고을의 진상면이라, 산 좋고 물 맑은 고을이라 내가 일찍 일제의 압정을 피해 숨어 거할 곳을 찾은 데가 거기요 방랑하던 곳도 거기요, 그러다 마침내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만난 곳도 거기다.

광양은 언제나 잊지 못하는 곳이려니, 그런 인연으로 그곳 청년들이 서울로 나를 찾아와 진상중학교의 피땀 괸 연혁을 비에 새기고자 글을 청하는데, 특히 그 설립자가 서운 황호일 님이란 말에는 다시금 옛 기억을 되새겨 자못 깊은 감회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젊어 적수공권으로 주물공장을 경영하여 깨끗한 재산을 모았으나, 일제시대에 민족울분을 참지 못하고 백운산에 들어가 엎디어 지냈는데, 나 또한 숨어 다니던 때라 그 산에서 서로 만나 회포를 바꾼 일이 있던 분이다.

해방된 후 서희수 님 등 유지들이 그를 찾아 중학설립 문제를 건의하자 그는 유쾌히 논 200두락을 희사하였고, 지방유지 김현주님도 100두락을 기부하고, 김철주님으로부터 1,000여 평 기지를 기증받아 공사를 진행하면서 19481015일 진상면 회의실을 빌어 개교하고 다시 이듬해 122일 신축교사로 옮겨갔으나, 체제를 갖추기에는 너무도 부족하여 그는 몸소 나서 심혈을 기울였고, 면민들도 집집이 40여 일씩 땀을 흘려 마침내 그 준공을 보는 동시에 1950520일 진상중학교의 인가를 얻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었으랴.

더욱이 그 동안에 2000여 명의 졸업생들이 사회로 나가 모두들 크게 쓰이니 과연 나무를 심어 열매를 거둠과 같다. 인재를 기르는 거룩한 학원과 설립한 공로자들과 땀흘린 면민들에게 세세대대에 큰 축복이 있으리라.

196612(이은상 글, 김기승 글씨 동창생 일동 세움)

 

—《경남문학56(2001. 가을)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