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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선생의 조국애와

가고파주변 이야기

 

 

김교한  원로시조시인, 전 김해교육장

 

 

 

 

국토 순례와 필연의 시조

 

20027월 합포문화동인회(이사장 조민규)의 초청 강연회에서 조순 전 부총리는 배움의 자세는 내가 얼마나 모르느냐에서 시작하라고 하였다. 이 강연회는 매달 마산에서 시행해 온 지가 오래되었다. 이 강연 요지를 경구처럼 담아 놓은 비망수첩에서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왜 이 비망수첩을 열어 보아야 하는가 모를 일이다.

마산 출신의 노산 이은상(1903~1982) 선생은 일찍부터 명산 대천과 유서 깊은 고찰 명소 등 국토순례를 통해 겨레의 영혼을 찾고 조국애를 온몸으로 새기며, 초지일관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며 국문학 연구를 통한 민족 문화의 발굴 선양에 공헌해 온 명망 높은 문필가요 시조시인이며 항일 애국지사였다. 민족의 빛이신 안중근 의사와 이충무공 등 여러 애국 선열의 얼을 선양하는 사업에도 예사롭지 않은 자취를 남겨 놓았다.

노산 선생은 사화집, 수필집, 기행문집, 역사서, 시가집, 시조집 등 간행한 서적이 무려 46권에 이르며 발표된 시조 작품만 해도 2천 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폭넓은 문필과 문학의 영역 중에서도 노산 선생의 대표 장르는 시조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노산 선생은 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1970. 금강출판사) 서문 중에서 말했다.

 

내가 시조 창작의 길로 들어선 것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는 모르나 거기에 내 문학적 생명을 걸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조와 함께 사는 사람이다. 오늘도 나는 내 일기장에 시조 한 장 읊어 넣을 것을 잊지 않는다.

 

김동리 선생은 시조문학(1982. 겨울호) 이은상 선생 추모 특집에서 ‘20이라는 젊은 나이와 그 뛰어난 문재에도 불구하고 자유시나 소설을 젖혀두고 시조를 택하시게 된 일 결코 범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이 나라 이 겨레의 마음과 영혼을 기리고 읊으실 사명을 타고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노산 선생의 처녀 작품으로 평정된 시조는 1923년에 발표한 고향 생각(2)이다. 이 사실은 노산시조선(1976. 삼중당) 머리말에서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일 년 앞서 시조를 짓기 시작한 때의 작품이 두 편 있다. 첫 번째 것은 19223월에 지은 아버님을 여의고이며 두 번째 것은 같은 해 6월에 지은 꿈 깬 뒤이나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노산 선생의 대표 작품으로 봄처녀〉 〈옛 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사랑〉 〈그리움〉 〈가고파등 가곡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도 있고 고향 생각〉 〈낙화암〉 〈가서 내 살고 싶은 곳〉 〈해바라기〉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탱자꽃〉 〈고지가 바로 저긴데〉 〈돌아오지 않는 다리등도 대표 작품으로 올라 있다.

 

 

한 시대 고난을 딛고 탄생한 가고파

 

앞에 제시한 작품 중에서도 간판 작품은 가고파를 꼽을 것이다. 가고파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 마음이 향하는 빛이요 그리움의 창이 되어 주고 있다. 가고파는 노산 선생이 등단한 지 10년 만인 1932년에 서울에서 창작한 10수로 된 시조인데 1933년에 김동진 선생이 앞 4수만 먼저 작곡하고 후편 6수는 뒷날로 미루었다.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문과 2학년 때였다.

가고파후편 작곡은 40년 뒤인 1973년에 완성하고 그해 1210일 숙명여자대학교 강당에서 숭의여고 합창단과 테너 김화용 선생의 독창으로 박명섭 교사의 지휘에 의하여 가고파전후편의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고향 마산에서도 1974년에 가고파노래의 전후편 공연이 있었다. 마산여고 합창단과 같이 엄정행 선생의 독창으로 김동진 선생의 지휘에 따라 경남대학교 완월강당에서 뜻깊은 공연을 시행했다. 이 공연은 그 당시 경남대학교 윤태림 총장의 초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잊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한 시대의 고난을 딛고 탄생한 가고파의 심오한 자산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가고파는 실향 극복의 의지와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절절한 겨레의 외침으로 살아 있다.

노산 선생의 첫 시조집은 노산시조집(1932. 한성도서)인데 가람 선생과 함께 현대시조의 여명기를 개척해 온 선구자적 성채를 이루어 놓았다. 노산 선생의 마지막 작품집은 시조 형식의 시집 기원(1982. 경희대학교출판국)이다. 기원155마일의 남북 분계선을 횡단 답사한 실황이다. 회고와 애절한 소원의 문학이며, 자유와 평화와 사랑을 갈구하는 마지막 통일 염원의 찬란한 고통의 문학이다. 기원은 노산 선생의 총 저서(46) 중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그해 봄에 이 기원을 간행하여 필자에게 두 권을 보내 주시고 가을에 영원히 떠나셨다.

피천득 시인은 하와이에 갔을 때 이민 온 지 오래된 통영 사람의 고향 사랑에 젖은 상황을 보고 노산의 가고파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가 생각났다고 그의 수필집에 올렸다.

 

 

통일 염원의 노래가 된 가고파

 

노산 선생에 대한 응분의 기념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국비로 된 기념사업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한때 노산문학관 건립을 추진한 때가 있었다. 시 당국이 문학관 설계도까지 완성해놓고도 아슬아슬하게 무산된 일이 있었다. 하나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노산문학관 건립의 희망까지 유실된 것은 아니다. 경남시조 문단을 중심으로 바라던 숙원 사업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노산시조문학상의 제정이다.

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기기를 원하는 것은 중요하다라는 포스코 화장실의 경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노산문학관의 건립과 노산시조문학상의 제정 시행 등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희망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노산 선생의 생애가 잘못 알려지지 않도록 중의를 모아 대응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경우에 따라 막연한 침묵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노산문학관 건립의 좌절에서 똑똑히 보아 왔다. 일제하에서 두 번째의 옥중 생활 중 해방을 맞은 노산 선생은 항일 투쟁을 전개한 조선어학회 33열전의 한 분이지만 많은 시련을 겪었다.

노산 선생에 대하여 사실대로 표해야 할 진실은 아직도 많이 묻히어 있다. 조광朝光(조광사 발행 종합잡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93511월호부터 194412월호까지 11055책의 조광을 한차례 살펴본 적이 있었다. 노산 선생은 조광의 초창기 주간으로 있다가 시대가 촉박하여 19388월호에 묘향산 향로봉(기행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주간직을 조선일보와 함께 사퇴하고 부산을 경유하여 백운산 은거지로 향하게 된다.

노산 선생이 주간으로 있던 기간의 조광에 수록된 내용은 건전했다. 친일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36년 독일 백림올림픽에서 우리 손기정 선수의 우승 기사도 일장기를 가리운 사진을 게시함과 동시에 조선 남아의 의기를 높이 찬양한 글로 되어 있었다. 노산 선생이 사퇴한 뒤의 조광의 변질은 선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한 번은 밝히고 싶었던 한 부분이다.

가고파를 무대에 올리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느새 가고파는 실향민의 설움과 통일 염원의 노래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한국문학인36(2016. 가을)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