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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제32호를 내면서- 이우걸 편집인

 

권두시화(卷頭詩話)

삶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천양희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쓰려고 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마다 나에게 시란 무엇이며 시를 통해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시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시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왜 나를 이 고통스럽고도 피 말리는 일에 등을 떠미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생각만 바꾸면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왜 시인으로만 살려고 하는지 자신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시인들에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물어보면 시인마다 그 대답이 다 다르다. ‘나는 내가 아니기 위해 시를 쓴다.’는 시인이 있고, 어떤 시인은 질서를 벗어나기 위해서쓴다고 한다. ‘말이 하기 싫어서 쓴다.’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작은 우주 속에 큰 우주를 들여놓기 위해 쓴다.’는 시인도 있고 그냥 시가 좋아서쓴다는 시인도 있다. 나에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물으면 나는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잘 산다는 것은 시로써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해도 시만큼 나를 살려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와 소통할 때 가장 덜 외롭다.

시란 나에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마다 시인인 나는 누구인가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고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할 때도 시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이 간단한 물음을 간단하지 않게 가슴속에 매달고 살 것이다. 자신에게 시란 세상의 헛것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시인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짜 시인은 언제나 타자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만 진짜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도 타자와 함께 말한다.”는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의 눈은 언제나 구경꾼이 되고 발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것을 많이 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온몸으로 온 정신으로 시를 써서 좋은 시가 되면 그 시는 독자들이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살아 있는 시는 독자들에게 다양한 삶을 이해하게 하고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시는 내가 본 만큼 쓰게 하고, 내가 발견한 만큼 쓰게 하는 내 삶의 저자著者이다. 그래서 시와 소통할 때 세상은 살 만하다고 나는 말한다. 지금은 시 외의 어떤 삶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다. 시가 내 인생을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시는 이제 내 삶에서 떼어버릴 수도 어쩌지도 못하는 운명처럼 되어 버렸다. 마치 한집에서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끈질기게 살아온 조강지처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운명을 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운명을 걸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에 혼신을 바칠 수 있겠으며 돈도 밥도 안 되는 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는 나에게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한다. 나를 끌고 가는 시가 없었다면 따라가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내 삶에서 시는 단독정부의 수반처럼 무서운 권력을 쥐고 있다. 살아 있는 시는 내 정신의 부활을 맞게 해주고 그렇지 않은 시는 나를 정신의 이방인으로 소외시킨다.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나는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려는 자세를 가지려 애쓴다.

시를 주도하는 진짜 힘은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며 시쓰기의 어려움을 극복한다. 우리들 앞에 벽이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잠깐 멈춰서서 생각해 보라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릴 때도 한 번씩 내려 뒤를 돌아보는데 그것은 자신이 달려온 길에 후회가 없도록 살피는 것이라고 한다. 시를 쓸 때에도 벽 앞에서 잠깐 생각하는 것처럼, 달리는 길에서도 잠깐 뒤를 돌아다보는 것처럼 시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장점 중 하나는 멍들었다고 다 썩지 않는다는 것이며 헤맨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꽃 심고 김매듯이 삶도 글도 하루하루 일구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말을 하고 살고 있지만 그 말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잊고 살기도 한다. 말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기적을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도 언어로 짓는 절이며 말로써 지은 빚을 갚기도 한다.

1920년 뉴욕의 추운 겨울,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라고 쓴 푯말을 앞에 놓고 공원 앞길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몇 사람만 적선할 뿐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 남자가 시각장애인 앞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 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각장애인의 적선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생각을 바꾼 것일까? 푯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은 곧 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글귀를 바꿔놓은 사람은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언어의 힘에 대해 다른 얘기를 하나 더 해보겠다. 미국의 여성 작가 델마 톰슨의 이야기다. 델마 톰슨이 전쟁 중에 군인인 남편을 따라 40도가 넘는 사막에서 살 때 도저히 그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혼을 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집으로 보냈다. 그때 아버지의 답장은 단 두 줄이었다. “두 사나이가 감옥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흙탕물을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아버지의 편지가 계기가 되어 델마 톰슨은 빛나는 성벽이란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쓴 뒤,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도 단 두 줄이었다. “나는 자신이 만든 감옥을 통해/ 별을 찾을 수 있었다.” 언어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힘이 시를 쓰게 한다.

시인이 되기 전 시공부할 때 나는 나 자신한테 잊지 말자고 당부한 두 가지 말이 있다. 하나는 그대는 삶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시간은 삶을 만드는 자료니까.”란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과 다른 하나는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의 준엄한 말이었다. 그 말을 디딤돌 삼아 시인이 된 뒤에는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 시인의 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선지 시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란 말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된다. 고독은 누구의 접근도 사절하며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고독할 때 가장 강하고 가장 순수하다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독하지 않으려고 복잡한 곳을 기웃거리는 시인들도 더러 있지만 시인은 고독을 잃어버릴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리면 시의 고갈이 오기 때문이다. 요즘 시인들은 고독을 잃어버리고 시에 운명을 걸지도 순정을 바치지도 않으니까 절창이 나오지 않는다고 어느 평론가가 쓴소리를 했을 때 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반성문을 쓴 적이 있다.

시인은 일상 속에서도 일상 너머를 봐야 하고 그 속에서도 상식적 감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시도 삶도 바뀌게 된다. 일상에 길들여진 정신에서는 새롭고도 뛰어난 시가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대할 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말을 다루는 솜씨일 것이다. 말은 침묵에 근접할 때 가장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것이다. 말의 선택, 말의 표현, 말의 운용이 매우 중요하다. 전체의 조화나 균형이 잘 되지 않았을 땐 수정과 퇴고가 필요한 것이다. 시는 무엇을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는 깡통따개는 중심에서 가장 먼 가장자리를 돌지만 그것이 깡통뚜껑을 따는 최선의 방법이라 했고 어떤 작가는 중심의 둘레에서 맴돌면서 중심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고도 했다. 요즘 시인들은 단순한 생활,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살고 있다고 말한 이들도 있다. 제멋에 겨워 산다고는 하지만 제멋에도 격은 있다. 제멋에 격이 없으면 제멋이 아니라 제멋대로 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싸워 이기려 하지 않고 상대방을 흠집 내서 이기려 드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과 다르면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적이 되는 안티문화도 있다. 차이와 차별을 구별 못한 셈이다. 시인들이야말로 시를 쓰기 위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말을 찾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에 끌려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해야 한다. 시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을 품고 있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오늘따라 왜 쓰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돌아보니 내 시의 시작 과정은 길의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쓰고 길 찾기를 통해 삶을 쓴다. 길은 곧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내 시에 자리 잡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높이에 대한 열망으로 산에 대한 시를 많이 썼고 중년에는 깊이에 대한 관심으로 물에 대한 시를 많이 썼으나 지금은 높이도 깊이도 아닌 넓이에 대해 쓰게 된다. 마치 니체 정신의 3단계 같기도 하다. 청년시절의 사자, 중년의 낙타, 노년의 어린아이. 어린아이의 단계인 노년은 퇴행이 아니라 거룩한 긍정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피카소도 만년에 어린아이처럼 그리는데 50년이 걸렸다면서 백 년이라도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싶다고 토로하고 있다. 동심이 시심이고 천심이니 나도 어린아이처럼 쓰는데 얼마나 걸릴까. 시심詩心, 동심童心, 천심天心 등 가장 순수한 것에는 모두 마음 심이 들어 있다는 것도 시를 쓰면서 알게 된다. 내 마음이 독자들의 마음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초심初心이던 동심을 내 시심 속에 들여놓아야겠다.

소리판에서 소리꾼의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듣는 귀명창 때문에 소리 명창이 만들어지듯이 시의 경우도 시를 깊이 보는 뛰어난 독자들이 있어야 명시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채찍이다. 준마駿馬는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린다. 그래서 나는 내 시들이 시든 채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시의 고갈이 올 때마다 그 결핍과 갈등이 다시 시를 쓰게 한다. 내가 고통스럽게 정직할 때 절창이 나온다는 말은 늘 나를 자각하게 한다. 그 자각이 막혀 있는 삶의 통로를 뚫고 나아가려는 나의 의지이다. 내가 독자와 소통하는 구멍은 시밖에 없으니 모르는 독자여 내 시가 기울 때는 그대들이 떠받쳐주고 시의 바람벽에 작은 구멍이라도 뚫어 가난한 이들과 소통하게 해주시라. 그러면 나도 세상에 드러나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될 것이니. 나는 앞으로도 마음이 쓰고 입이 쓸 때까지, 뭔가 멋진 것을 찾을 때까지 쓰고 쓰고 또 쓸 것이다. 나는 쓰는 시가 있어 살아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살아 있어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기쁨이 된다. 이 지극한 기쁨으로 독자와 사회와 시인이 함께 시 권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열망해 본다. 시 권하는 사회가 된다면 문학이 사유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문화강국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 또한 내가 시를 쓰는 이유이다. 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어서 이것이 독자들이 시를 읽는 이유라고 한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시가 어떤 경우에라도 시를 위한 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편은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한 편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한 편은 우리를 외면한 사람들을 위해 바쳐졌으면 좋겠다.

누가 가끔 밑도 끝도 없이 그 짓을 왜 해요?”라고 하면 그게 다 내 운명인가 보죠.” 한다.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은 그렇다. 내 운명의 시쓰기, 시인이 나의 운명인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나는 늘 내 손으로 내 잔을 채우는 일에 익숙하려 애쓴다. 세상에 겉도는 기름처럼 있거나 시의 세계 밖으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겉은 비록 사람살이를 닮았어도 마음은 빛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빛나게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시를 쓴다. 몇 년에 한 번씩 시집을 내다보면 햇수만큼 나이가 더해지지만 시와 함께 살 수 있어서 참 다행하다고 생각한다. 시에 대한 신념은 마음과 의지로부터 생겨난다. 신념이 없으면 시도 진화할 수 없다. 신념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듯이 시인의 길도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란 것을 시를 쓰면서 더욱 느끼게 된다. 네덜란드의 작가 톤 텔레헨이 쓴 고슴도치의 소원에 거북이와 달팽이의 얘기가 나온다. “나는 내 속도로 갈 거야.” 달팽이가 말했다. “멈춰 있겠다는구나.” 거북이가 말했다. “멈춰 있는 것도 내 속도의 일부야.” 그들은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러면 거기 도착 못해.” 거북이가 말했다. “눈을 감으면 나는 벌써 거기 가 있어.” 인생 또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시인으로 살기 위해, 시인으로 사는 삶을 다지기 위해 스스로에게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 떠나야 하고, 지독한 소외와 뼈아픈 고독을 자청해야 한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또 어떤 평자는 시인들은 의연하게 고독을 견뎌내야 하고 고독이 시를 정복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나는 그 경고를 귀담아들으면서 내 시를 내 방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방이라야 독립적이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정신으로 세상에서 발견되는 새로움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시를 쓴다. 시 쓰는 것만이 언어의 심장을 움직이는 시인의 일이라 생각한다. 시인은 자기 주변의 침묵하는 모든 것을 대신해서 말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우연과 우여곡절과 비극에 눈감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은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무엇이 더 문제냐 하면 별문제가 아니란 것이 더 문제라면 문제다. 이처럼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새장을 덜컥, 열어젖히는 것 같아 겁이 나는 삶이다. 겁나기 때문에 더 긴장하면서 시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자신과 끝없이 싸워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고 숙명이다.

요즈음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엄마야 누나야 대충 살자로 쓰고 엄마야 누나야 술이나 먹자로 자조하는 시인들이 있는 것을 보면 시인들 모두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늘 자신한테 질문을 거듭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었어도 질문하는 내 습관은 살아 있다. 시를 쓸 때 ? 어떻게?’가 내 물음이기 때문이다. 작고 새로운 것에 놀라고 경이로운 것에 경탄하니 질문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사람의 상처를 꽃으로 피우기 위해 시를 쓸 것이다. 시란 결국 삶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양희 1956현대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산문집 시의 숲을 거닐다

 

 

열린시단

이하석 홍일표 고찬규 김시탁 이자규 길상호 김승기 김요아킴 조  민 최서진 최인서 신덕룡

이선균 서연우 손영숙 윤현주 손남숙 조영란 이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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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정과 현실 신인작품상/ 이금진 시조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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