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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향, 애국시와 노산

 

이우걸 시조시인, 전 밀양교육장

 

 

노산은 19세인 1922아버님을 여의고라는 시조를 썼다. 그러나 스스로는 1928년에 쓴 고개를 수그리니를 처녀작으로 내세운다. 그의 효심은 여러 작품에 보이지만 특히 가윗날에가신 아버지를 그리며라는 부제를 붙인 10수의 연시조로 가히 대작이다.

 

가을 들 마르는 풀 바람에 흔드는데

반계 단풍은 석양에 타는구나

천리객 이내 상흔을 뉘께 말씀 하리오

북산에 홀로 올라 누누중총 바라보니

가위라 군데군데 곡소리 슬프도다

우리님 누우신 산을 멀리 그려 우노라

 

첫째, 둘째 수를 옮겨 보았다. 쓸쓸한 나그네가 한가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는 절절한 심정을 읊고 있다. 노산은 부친이 설립한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했을 뿐 아니라 연희전문 3년 수료 후인 1923년부터 2년간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러한 기간이 부자지간의 온정을 돈독히 하는데 특별히 소중한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자비가 님의 뜻이 희생 또한 님의 뜻이

내 몸 죽사와도 남 도와 사올 것이

님께서 이길로 예오시니 나도 따라 가오리다

 

썩어질 몸이어늘 영화안락 무엇이뇨

불의엔 침 배앝고 향기로이 살았으리라

내 일생 이뜻을 지켜 님의 뒤를 이르리다

 

맹서라는 시조 전편이다. 부친 타계 3년째 되는 해에 쓴 작품이다.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했을 만큼 지역사회에 헌신한 부친에 대한 존경심과 아울러 자비, 희생, 봉사의 일념으로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결곡한 의지가 배어 있는 작품이다.

화엄사에는 효대가 있다. 연기조사가 그의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사자 석탑을 만들고 그 속에 부인 즉 그의 어머니상을 만들고 그 앞에 작은 탑과 자기의 상을 세워 공양하는 마음을 조각한 것이다. 노산은 세 수로 된 시조 효대를 썼는데 그 마지막 수는 다음과 같다.

 

그리워 나도 여기

합장하고 같이 서서

어머니 아들 되어

몇 번이나 절하옵고

우러러 다시 보오매

웃고 서 계신 저 어머니

 

그에게 효심은 애향 애국정신의 바탕이었다. 1932년에 발표한 앉은뱅이는 다음과 같다.

 

노비산 모롱이는 어린 내 자라던 곳

이 봄도 그 언덕엔 앉은뱅이 피련마는

따 담던 그날의 책가방은

버린 데도 모르겠네

이 단시조를 읽으면서 그의 호가 왜 노산인가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같은 해에 발표한 가고파는 전 국민이 애창하는 애향의 노래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데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전편 10수 중 첫째, 둘째 수를 옮겨보았다. 지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든 이미지군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런 언어들이 시조의 가락을 타고 흐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명가곡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고향사랑은 국토사랑, 조국사랑, 인류사랑으로 확대된다. 십이폭, 옥녀봉, 오산장터, 선죽교, 당신과 나, 나의 조국 나의 시, 고지가 바로 저긴데,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옥중시조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 〈ㄹ, 공습, 해바라기, 그리고 77세에 남북 분계선을 답사하고 쓴 소제목 42205수로 구성된 서사시조집 기원은 그의 이런 정신을 증명하는 최후의 창작물들이다.

언론인이요, 사학자요 국문학자요 교수요 시조시인이요 등산가일 뿐 아니라 우리말을 지키다 투옥된 애국지사이기도 한 노산은 조국 광복 후 일체의 권력을 탐하지 않고 자신의 민족주의 사상을 펴고 창작과 애국선열 기념사업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그의 그런 고결한 정신과 헌신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성인의 기준으로 그의 생을 비판하며 문학적 업적마저 냉소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기준이 합리적이라면 이 땅의 어느 문인에게도 문학관이나 기념사업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노산의 애향, 애국의 혼령은 아직도 풍찬노숙하며 안식할 거처를 찾아 헤매고 있다. 고향은 이제 대답해야 한다.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