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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離邊 그리고 적중的中

-오하룡吳夏龍 시선詩選 評說

 

有山 尹在根 문학평론가, 한양대 명예교수

 

 

내가 오하룡吳夏龍시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인이 되신 신상철(경남대) 교수님의 소개로 비롯되었다. <도서출판 경남>이 마산에서 문을 열었던 그해(1985)였지 않았나 싶다. 마산에 들르면 문우들을 자상하게 알려주었던 분이 신상철 교수님이 한 문인이 출판사를 열었다고 안내해주셨다. 층계를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난히 살갗이 희고 동그란 안경에 웃음 띤 동안童顔으로 우리를 맞아 주신 분. 그렇게 오하룡 사장을 만났고 신교수께서 걸걸한 목소리로 다시 오하룡 시인이라고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신교수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경청傾聽만 할 뿐 입을 떼지 않던 시인은 모습이 순한듯하면서도 매운 데가 있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붐비는 세파世波를 나름대로 겪어보고 숨겨둔 치수로 선하게 달아보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순둥이구나! 이것이 내가 받은 오사장吳社長의 첫 인상印象이었다. 그 후 마산에 가면 꼭 출판사에 들러 오 시인을 만났다. 그냥 잠깐 차를 마시면서 마산의 출판사정을 묻고 인사를 전하는 담담한 만남을 근 40년 계속해 오지만 첫날 내 나름 읽어둔 그 관상觀相을 지운 적은 없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내 어설픈 관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이 평설을 빌어 처음으로 털어놓는 셈이다. “시인 오하룡 당신은 분명 선한 순둥이지만 속 줏대만은 단단하오.” 이것이 내가 솔직하게 내리는 인간 오시인吳詩人의 인품人品이다. 만날 때마다 한 결로 구김살 없이 선하지만 순하면서도 매섭고, 매사 꼼꼼히 살아가는 인간 오하룡이 나는 좋다. 그렇다고 오 시인이 유난히 나에게 정을 듬뿍 주는 편은 아니다. 인간 오하룡은 인간관계에서 거리를 알맞게 유지하면서 좀해서 마음을 여는 쪽이 아님을 내 나름 짐작하며 지냈다.

아마도 그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런저런 사람냄새를 맡아 보았기에 좀해서 마음을 쉽사리 열지 않겠지 여겼다. 생각지도 못한 아픔들이 저미어 오는 세파世波를 겪어보았는지라 저만치 거리를 두고 사람을 반기는 편을 오히려 나는 더 좋아한다. 오시인은 늘 저리고 아프게 하는 세정世情들을 선한 쪽으로 저울질하며, 속으로는 삶의 길을 시로 넓혀가고자 남몰래 몸부림치는 줄 내 나름 간파(看破)한지라 나에게 그는 진국 곰탕 같이 다가온다. 그의 시는 인간人間이며 인생人生이 애달파서 다리고 다려 어렵사리 달래고 사무치는 마음이 물씬물씬 묻어나니 그 또한 나는 좋다.

시인으로서 오하룡은 마냥 인간을 쓰다듬어주려는 시를 짓는다. 어느 누가 쓰다듬어줌을 싫어하겠는가? 그의 시들은 서글픈 인간사人間事가 우리를 망가지게 할까 두려워 삼가고, 조심조심 어루만져 쓰다듬어주고자 애쓴다. 그의 시를 만날 때마다 시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 시원始源이 열지고언지(說之故言之)임을 어렵사리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이를 터득한 후 거침없이 나 시인 올시다한국문단에 자립선언하고 등장했다는 사실을 오 사장을 알고 지낸지 15년 쯤 뒤에야 알았다. 이처럼 오하룡은 산천山川에 저절로 나서 절로 사는 산목山木 같이 스스로 기립起立한 시인이다. 이는 내가 오랫동안 오하룡의 시들을 만나본 덕으로 내리는 증언證言이다.

한국문단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추천제도란 것이 있다. 문단에서 문인행세文人行勢하자면 어디로 등단했느냐에 따라 문인족보文人族譜가 있고 따라서 문단파文壇派에 동참해야 이른바 문단주류文壇主流를 타고 여기저기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어떤 문예지로 누구의 추천등단이냐 어떤 신춘문예등단新春文藝登壇이냐 따지고 마치 자격증을 따야 문인이 될 수 있는 듯한 문단풍토文壇風土가 문단패도文壇覇道를 깔아 기세등등한 데가 한국문단이다. 나 역시 추천 제도를 거치지 않고 발표할 수 있는 지면誌面을 스스로 만들어 평론이랍시고 세상에 내놓았던 터인지라 추천을 거치지 않은 오 시인에게 호감이 갔다. 그렇게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셈이다. 한동안 그의 시를 만날 수 없다가 우연히 <도서출판 경남>에서 <작은文學>을 보게 되었다.

서울로 오는 기차 속에서<작은文學>에 실린 오하룡의 시를 처음 만나 참으로 반가웠다. 지금 그 제목은 잊었지만 시상詩想을 엮어가는 말의 흐름이 졸졸 흘러가는 실개천 같았던 이청耳聽의 기억은 선연하다. 시상詩想이 서글펐고 애달파 사무치게 다가와 오하룡이 엮어가는 말의 흐름에 불쑥 나도 모르게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다던신라新羅헌화가獻花歌한 가락을 중얼거렸던 기억이 상기도 생생하다.

이것이 오하룡 시와의 첫 만남이었다. 왜 어인 일로 내입에서 시나위의 중얼거림이 툭 튀어나왔을까? 냉정하다 싶게 차근차근 말을 술술 이어가는 이런 시를 모양새만 보고 요즈음은 산문시散文詩라 하지만 전혀 산문散文으로 만들어진 시가 아닌 것이 오하룡의 시였다. 오히려 그날 내가 만났던 그 시는 감칠맛으로 나를 휘감아 우리네 가사歌詞가 담아주는 서정抒情이 물씬했다. <작은文學>에 실린 오 시인의 작품들은 歌詞의 깊은 맛을 다시 맛보게 해주어 좋았노라고 오 시인께 딱 한번 전화로 내 소회所懷를 비쳤더니 내 시는 시일 뿐인데 가사歌詞 같다니요?’ 불쾌하다는 낌새가 묻어나는 반응을 보였다. <작은文學>에 발표한 그 시는 입으로 소리 내 읽어서 귀가 절로 듣게 하는 가사이지 눈으로 죽 훑어가도 되는 요새 말하는 그런 산문시散文詩는 아니었다. (여기 시나위란 전라도 무악巫樂을 말함이 아니라 외래악外來樂에 대한 토속악土俗樂을 뜻하고 신라향가新羅鄕歌 사뇌(詞腦)를 말한다. 그리고 요새 말하는 장시長詩니 산문시散文詩니 하는 조어造語들은 오히려 가사歌詞란 우리 본래술어本來術語가 지니고 있는 깊은 뜻보다 훨씬 못하다. 왜냐하면 진정코 시라면 그것은 이미 산문散文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출판문화라곤 없던 마산에서 출판문화를 일구어가는 오 사장이 고맙고 그의 인품에 끌려 마산에 갈 때마다 자주 들렸지만 오 시인이 나에게 시를 보여준 적은 없었고 시를 두고 담소談笑할 기회도 없었다. 아마도 시인으로서 오하룡은 시를 만나고 싶으면 찾아서 읽어보면 될 터이니 자기 시를 읽어보라 떠들 수는 없다는 마음가짐이리라. 그 편이 오히려 좋았다. 자가발전自家發電하려는 사람 만나면 반가울 것 없고 부담스러울 뿐이다.

오시인을 <작은文學>을 통해서 만났으니 시인으로 등장한지 거의 40년이 되어서야 처음 그의 작품을 만나본 셈이다. 그후 지금까지 정기구독자가 된 덕으로 뜨문뜨문 오시인의 작품들을 <작은文學> 지면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이처럼 여러 해 동안 보았으니 내 나름 그의 시를 알 수 있을 만하다. 그래서 오 시인께 혹시 시집을 내게 되면 그 말미末尾에 내 평설評說을 붙여도 되겠느냐고 자청自請했다가 묘한 미소微笑를 지을 뿐 거절당했던 일이 있었다.

나도 평론한답시고 판을 벌인지 50년이 넘었지만 발문跋文 쓰겠다고 했다가 딱지 맞기는 그때 딱 한 번뿐이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지난 5월 중순께 시집을 하나 낼까 하는 데 발문을 부탁해도 되겠느냐고 오시인이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그러마고 쾌히 대답하고 보니 나에게는 그의 시집 한권이 없기에 자료들을 부탁했다. 며칠 뒤 우송되어 온 그의 시를 처음으로 한 묶음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그 후 첫 시집 <모향母鄕>을 찾아 시인 오하룡의 시원詩源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고 <작은文學>을 통해 만났던 시들의 전술前迹을 살펴볼 수 있었다. <모향母鄕>은 인간 오하룡이 시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팔자를 마치 손금처럼 드러내 준다. 시집 <모향母鄕>의 첫 시로 등장하는 공단工團만 보아도 오하룡의 시인 사주팔자가 생생하다.

 

지겨운 이 농사 누가 짓고 싶어서 짓나

하늘이 돌본 게지

손발이 닳도록 신령께 빌고 싶다

뛰고 절고 까불고 미치고 싶다

工團은 돈단으로 보인다

 

<母鄕>‘工團둘째

 

공단工團이 농촌을 밀어내는 세상기미世上機微를 눈치 채고 세상이 돈바람으로 휘몰아치리라 미리 내다보고 괴롭고 두려워한 예지叡智에서 생겨난 시를 하나 골라보라 한다면 오하룡의 공단工團이 그 자리를 차지할 터이다. <모향母鄕>에서 공단바람이 불어오는 기미를 먼저 맡았으니 그는 시인태생胎生이 분명하다.

본래 진실한 마음이 우려내는 시일수록 이미 드러나 버린 것들을 이러구러 하지 않는다. 닥쳐 올 기미가 모질고 세찬 것을 짐작할수록 시인은 미리 아파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시를 마련하고자 한다. ‘손발이 닳도록 신령께 빌고 싶다이보다 더 절실하고 애달픈 기구祈求의 서정抒情이란 없을 터이다. 우리네 본래 서정은 저마다 깊은 마음속에 서리서리 숨겨둔 애달픔을 퍼내어 그냥 절로 장단 맞춰 훨훨 털어내고 맺힌 마음 홀홀 풀어냄인지라 간절한 빌기로 드러난다. “신령께 빌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보다 더 절절한 서정抒情은 없음을 공단이 사무치게 증명해준다. <모향>의 첫 시를 마주하면서 문단에서 홀로서기를 단단히 했던 오하룡은 사주팔자四柱八字가 시인이구나 다짐이 갔다. 어디서나 본래 자신이 든든하면 남에게 검증檢證받지 않고도 홀로 기립起立해 갈 길을 스스로 터 가는 법이다.

시인 자신의 정을 본떠 달라는 시보다 독자 당신의 정을 퍼 올려 하염없이 방하放下해 보라는 시가 훨씬 더 긴 두레박줄을 요구하는 깊은 우물이기 마련이다. 시인 자신의 정을 고여 두고 퍼 올려 보라는 시는 그 자의 명함쪽지에 불과함을 알기에 오하룡은 그의 첫 시집 <모향>에다 자 여러분 마음속에 담아둔 온갖 아픔들을 다 퍼내볼 수 없느냐고 구성지게 마흔다섯 시편들을 엮어 두었다. 그래서 <모향>을 펼쳐든다면 그 누구이든 저마다 한바탕 육자배기를 뽑듯이 숨겨둔 온갖 정한情恨을 퍼 올려() 후련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모향母鄕>에는 문단을 기웃거리지 않고 홀로 시를 절실하게 연마해온 연유가 여실하게 드러난다. 30대로 접어든 시인 오하룡은 이미 시품詩品을 스스로 거량하면서 작시作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공단이 돈단으로 보인다고 예언豫言만 할 뿐 열 올리지 않고, ‘공단을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심기心氣를 나름대로 퍼내보라고() 터를 마련해두고 스르르 물러난다. 마주하는 이마다 마음을 열게 하는 시일수록 사람 따라 서정抒情하게 맡겨둘 뿐이지 이편저편 갈라서게 해서 티격태격 하게 꼬드기지 않는다. <모향>은 세파世波가 이쪽저쪽 너울을 쳐도 세태世態를 마주하는 시인 오하룡은 까딱 않는 이변離邊의 시인임을 밝혀준다. 이쪽저쪽() 갈라서 아옹다옹하면 소중한 인간의 삶만 상처를 입을 뿐이니 앓기는 이도저도 아닌 우리 모두임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모향>은 극단을 벗어나(離邊) 소중한 삶을 어루만지는 깊은 정을 퍼내도록 시를 끌어가는 물매가 어긋나지 않아 시품詩品이 높다.

<모향母鄕>이 나올 무렵 순수純粹니 참여參與니 설왕설래 논전論戰이 시끌벅적한 판에서 공단工團이란 시제詩題라면 참여參與 쪽 전매특허 같은 걸개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호口號 하나 없이 실타래 풀어가듯 구슬프지만 구성지게 술술 서정抒情해 보라는 공단工團<모향母鄕>의 맨 앞머리 시로 정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오하룡은 이변시인離邊詩人임이 분명하다. 이는 시단시류詩壇詩流에 아랑곳 않고 자기가 가야할 길을 넓혀가는 단단한 시관詩觀을 말해준다. 시단시류詩壇時流 따라 공단이란 시제詩題로 시를 내 걸었다면, ‘공단은 고래고래 외쳐대는 구호를 앞세워 대자보 같은 시가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시인 오하룡은 차분하고 절절히, 차근차근 구성지게 공단을 끌어가면서 우리 모두 애달픈 심정을 두레박질해 소중한 삶만 상처 입지 않을까 아래 같이 다독여 준다.

 

돈 자루의 허황한 꿈이 절감 된다

팔자고 운명이고 너절하다

그러나 工團은 열리어라

덜컥 가슴내려앉게 열리든

화알짝 아무도 몰래 열리든

열리어라

祈求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母鄕>‘工團>

 

당시 문단시류文壇時流 따라 기승을 부렸던 이른바 참여시에 아랑곳 않고 공단은 구성지게 술술 흘러가는 말소리로 서러운 사람마다 담아둔 정한情恨을 퍼 올리도록 맡겨둔 채 시인은 저 만치 물러서 있다. 이처럼 그는 양단兩端을 벗어난 이변離邊의 시인으로 당당하게 한국문단에 첫 시집을 내놓았던 셈이다. ‘공단은 독자에게 마치 신라新羅 헌화가獻花歌의 한 가락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던 그 노옹老翁의 간절한 속마음을 홀연히 짐짓해보게 한다. 오하룡은 시란 그 어떤 것의 수단이 아님을 처음부터 새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참여시가 대세이고 서정 순수시抒情 純粹詩야 한물갔다며 아우성 대던 와중에도 외쳐대지 않고 구성지게 술술 읊어가는 가락을 잡아준 공단을 시집의 문패로 삼아 둔 점으로 보아 <모향母鄕>은 이변離邊의 시들이 모여 있음을 당차게 고하는 셈이었다. 이에 더하여 아마도 시인 오하룡이 경북 칠곡 인동(漆谷 仁同) 이라 하니 그의 시혼詩魂에는 신라적 사람들이 주고받던 시나위 가락이 맥놀이하고 있을 법도 하다. <모향母鄕>의 시편들은 한결같이 이변離邊하여 융화融和하고 서정抒情하자고 아니리 없이 구성지게 소리하고 있다.

 

모두 실신失身한 지금

얘기는 어디고 통하지 않는다

아무 意味도 없다

 

기대期待에서 소원所願으로

차츰

애원哀願에서 내젓는 몸뚱아리들

 

간신히 가다듬어 내어 미는 손

닿는 곳이 없는 손

 

<母鄕>‘가뭄

 

4.19, 5.16을 거치면서 세상은 어디서나 양변兩邊으로 나뉘어 아우성치고 두 손은 이편은 저편을 저편은 이편을 향해 삿대질하던 때 간신히 가다듬어 내어 미는 손은 어떤 일까? 보수保守의 손도 속셈 다르고 진보進步의 손도 속셈 다른지라 간신히 가다듬어 내어 미는 손은 마음 편히 잡아볼 세상물정世相物情이 없다. 본래 창랑滄浪의 물이 깨끗하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지만 그래도 소중한 것이 삶인지라 더럽다고 뭉개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편저편 갈라서서 서로 탈탈 털어버리고 실신失身에서 깨어나 정신 차리고 우리 함께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간신히 가다듬어 내어 미는 손닿을 곳이 없는 손이라 말하는 시인 오하룡. 그는 이변離邊의 시인이다. ‘닿는 곳이 없는 손이야말로 주먹 쥐고 삿대질하는 손보다 서로 털어버리고 우리 삶을 보듬어 가는 이 더 소중하지 않겠느냐 자문自問한다. 그래서 가뭄닿는 곳이 없는 손을 잡아보라 하는 것이다. ‘닿는 곳이 없는 손은 두 패로 나뉜 세태의 어느 쪽 손도 아니다. 그 손은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의 손임이 분명하다. 이쪽저쪽을 떠났다 해서 중간치가 아닌 손인지라 기회를 엿보는 그런 손도 아니다. 밀고 당기고 지지고 볶아 삶을 난도질하다 보면 진실로 소중한 삶은 갈가리 찢기고 말지니 우리 삶이 소중하지 않느냐고 애달파하는 손길이 분명하다. 소중한 삶을 움켜 쥔 손은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슬프게 떠났던 시루골에서 (1)’ 간절하게 드러난다.

 

이제사 알겠어라

빛에도 내 소스라치게 놀람을

 

故鄕

여기 이렇게 외로이 누워

손 까딱 못하고

병든이 같이 누워

 

뙤약볕 아래

타기만 하고

뙤약볕 아래

보채기만 하고

 

내가

어머니에 이끌려

아무도 바램없이

이곳을 떠나던 날

 

그 때 같이

기운 하나 없이 풀죽어 흘러라

 

너도

뭔가에

무던히 지쳐있는

오늘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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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밤에 더욱

훌쩍이며 흘러라

 

<母鄕>‘시루골에서 (1)’ (8~11생략)>

 

시루골에서’ (1) (11) 두 편은 열두 번 시련詩聯을 가다듬고 유년幼年의 복받치는 설움을 물레질하듯 풀어내는 물매가 굽이굽이 잔잔하여 우리 모두의 사모곡思母曲이 되어 준다. 시인은 정한情恨을 자신의 푸닥거리로 삼지 않고 우리 모두의 정한情恨으로 승화昇華시키는 시나위 꾼이다. 그런 시인의 본분本分시루골에서마주하게 된다. 오시인의 시혼詩魂에는 어머니가 늘 생천生泉으로 깊숙이 잠복해 있다. 다른 시에서도 어머니가 등장하면 오하룡은 눈물을 지하수地下水가 흘러내리듯 묘하게 억눌러 더욱 저려오게 하는 시의 묘를 보여준다. 그런지라 시루골에서도 북받치는 회한悔恨을 강가에 서서 흐르는 강이 그냥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어머니에 이끌려 / 아무도 바램 없이 / 이곳을 떠나던 날그대로 강이 다가온다고 소스라친다. 어찌 그것이 오하룡 자신만의 회한悔恨으로 그치겠는가. ‘시루골에서를 만나보면 누구나 저마다 가슴속에 잠긴 어머니의 정한을 퍼내서() 흘러가는 강물 따라 씻김굿을 하게 될 터이다. 본래 시가 마련해주는 서정抒情이란 이런 것이다.

조선조朝鮮朝 당시 유행했던 시부詩賦의 고매한 시상詩想들은 지금은 모두 박제剝製되어 버리고 몇몇 기녀妓女들이 남겨준 시정詩情은 수백 년 후 상기도 살아 숨 쉬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 기녀妓女의 시정詩情이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서정抒情하게 하는 까닭이다. 진실로 서정抒情하게 하는 시란 시의식詩意識을 앞세우고 감수성感受性을 뽐내며 다듬기 하는 시보다 훨씬 윗길임을 시간이 흘러가면 절로 알게 되는 법이다. <모향母鄕>이 나왔던 당시는 뾰쪽한 송곳 같이 저항하는 참여시가 으스대던 때였다. 그 때 인기 있던 참여시參與詩들을 지금 읽어보면 그 시절 상황狀況을 찍어둔 사진 노릇밖에 못한다. 그 당시에는 시루골에서같은 시의 세는 밀렸었지만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는 시루골에서는 살아서 울림하며 숨을 쉰다. 시란 어떤 주의주장의 앞잡이가 아니라 늘 새물을 샘솟게 하는 생천生泉이어야 한다. ‘시루골에서’ ‘어머니는 딱 한번 나오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머니를 묻어내지 않는 소리란 없다. 그리하여 시루골에서는 사모곡思母曲의 생천生泉이 되고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회한悔恨이 샘솟아 그립고 아쉬운 마음을 적실 수밖에 없을 터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고인 모정母情이 사라질 리 없기에 고향산천에 가면 길가 돌멩이 하나도 그 정을 퍼 올릴 수 있음을 시루골에서울컥하게 맛본다. 이런 서정抒情을 낡은 투라 여긴다면 시의 본래인 서정을 타야 시가 한없는 미래로 흘러가면서 늘 숨 쉴 수 있음을 모르고 하는 단견短見일 뿐이다.

한국현대시가 서양 것을(modern poetry) 종주宗主로 삼는 탓으로 서정을 업신여기고 감성感性이며 지성知性이 날카로워야 시의식詩意識이 살아난다고 기승을 부리던 때, 그런 시류時流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네 본래의 시혼詩魂에 뿌리를 내렸기에 시루골에서같은 시를 묵묵히 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모향母鄕> 전후前後 그 당시 한국시단은 유럽사조思潮의 국제시장國際市場 같았다. 심볼리즘Symbolism이니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떠들썩했었고 그 틈으로 소시얼리즘Socialism이 밀고 들어와 참여시參與詩란 신조어新造語가 판을 치면서 시인들은 시를 자기주장의 수단으로 삼았다. <모향母鄕> 전후前後 시인들은 지성知性이니 감성感性을 날카롭게 뽐내고자 시를 다듬고 꾸미는 기교를 앞세웠다. 그러나 홀로 기립起立한 생목生木 같은 시인 오하룡은 시단시류詩壇時流 눈치 볼 것 없이 지게 목발 장단에 육자배기 가락을 뽑으면서 거침없이 귀가歸家하는 길을 텄다. 이처럼 모서慕西의 흉내를 한발 물러나 작시作詩한 편이다.

 

지게목발 장단에

밀리는 어둠

 

카바이트 불빛에

육자배기 가락

 

지게위 시름이

가락을 탄다

 

하루를 취기에

빼앗기우고

 

품삯은

鄕愁에 빼앗기우고

 

<母鄕> ‘歸家

 

 

빈자貧者는 선이고 부자富者는 악이라 양변兩邊으로 갈라놓고 빈자貧者의 분을 얼러대는 취향의 시류詩流가 범람하던 당시, ‘귀가歸家를 떡하니 내놓은 오하룡이란 시인은 나름의 줏대가 분명했다. 시란 유행流行 따라 이리저리 발맞추지 말아야 함을 그는 알았다. 시도詩道란 것이 있으니 열지고언지說之故言之가 바로 그 길이다. 열지說之란 온갖 괴로움을 녹여내는 심기心氣를 스스로 길어내는 즐거움이다. 비탄悲嘆하거나 분노憤怒하게 꼬드기는 시보다 그런 것들을 녹여버리게 하는 시가 오래오래 살아남아 사람들의 회한悔恨을 퍼내게 한다. 즐기니까(說之故) 말하는 것이(言之) 시의 본분이다.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온갖 괴로움을 차라리 즐겨버리는 통 큰 마음을 활짝 열어줌이 곧 시의 본분이다. ‘귀가歸家는 시의 본분 따라 가난의 고통을 넉넉한 마음으로 휘휘 날려버리는 힘을 만나게 한다. 또한 봄에 씨 뿌리고 여름 내내 길러내 가을이면 거두고 겨울이면 저장해서 한 해 단위로 인생을 펼치던 농촌 사람들은 도시에서 날품팔이 지게꾼이 되어서도 지게목발 장단에 육자배기 가락을 잃어버리지 않는 통 큰 마음을 지녔음을 읊어댄다. ‘귀가는 가난의 설움을 촌뜨기 냄새로 뿌리쳐버리게 하는 것이다. 시란 돈으로 가난을 물리쳐 줄 수는 없을지라도 심기心氣를 샘솟게 하여 물리쳐버리게 할 수는 있으니 타는 목을 적셔주는 생천生泉이다. 이런 시의 본령本領귀가는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또한 오하룡이 이변離邊의 시인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비의 젖은 손이

건성으로 등골을 탄다

 

흠투성이의

풍경을 열고

 

징그러이 드러내는

저 능글맞은 잇몸

 

쓰다듬고 싶지않은

저 주접

 

얼마나 다행이랴

조용히 막과 함께

귀먹는 거리

정결히 쓸어가는 어두움

 

<母鄕>‘都市

 

농촌은 멍들어 가는데 공룡처럼 부풀어 왁자지껄한 도시를 마주하는 시골뜨기 오하룡에게 아무리 이변離邊의 시인이라 하더라도 도시란 도저히 정들 수 없는 흠투성이의 풍경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촌이 그립고 도시都市는 징그러운 곳이니 서로 마음 주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촌락村落을 대신할 수는 없는 거처居處임을 뼈저리게 하는 시가 여기 도시都市이다. ‘도시로 오하룔이 결코 교언巧言하지 않는 시를 짓는 까닭을 알 수 있다. 그는 오직 인간을 위하여 시를 짓기에 작시作詩에 믿음을() 뿌리치고 아름다움을() 앞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교언巧言이란 발을 붙이지 못한다. ‘도시는 화장한 기미라곤 없이 민낯 그대로다.

추천이란 등단 절차를 뿌리치고 한국시단에 돌진하는 시발始發로 삼았던 <잉여촌剩餘村> 동인지同人誌 창간사創刊辭에서 자신이 시인으로서 선언宣言했던 말을 도시는 새삼 떠올려준다: “시를 지고 가기보단 나는 인간을 지고 가기를 굳게 다짐하면서 이 길을 출발한다.” 인간을 지고 가는 굳은 다짐이란 바로 <> 한 자로 드러나는 법이다. <신언불미信言不美>.

그의 첫 시집 <모향母鄕>에 수록된 시들은 이를 다짐하며 위에 인용한 도시는 믿음직한 말은(信言) 멋지게 다듬지 않음을(不美) 그대로 보여준다. ‘징그러이 드러내는 저 능글맞은 잇몸 쓰다듬고 싶지않 은 저 주접이런 도시를 벗어나 살아갈 수는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는지라 인간을 지고 가기를 굳게 다짐한 오하룡은 <모향母鄕>에서 지켰던 서정抒情하게 하는 시도詩道를 조금 벗어나 <작은文學>을 통해 속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새로운 시도詩道는 좀 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람 찾기의 길로 접어들어 시단시류詩壇時流의 작시유행作詩流行 따라 기웃거리는 기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변離邊의 시인이기를 저버리지는 않으니 사람이야기 쪽으로 과녁을 바꾸어 익석(弋射)’하여 그 정곡正鵠을 적중的中하고자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자술自述하는 시를 짓기 시작한다.

 

아이고, 군인 중에는 부자父子가 한 부대에 근무한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아이고, 의사 중에 부자父子의사가 한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아니 실제 본 일이 있다. 이 지방에서 제법 유명한 정형외과 병원인 Y병원. 아이고, 父子가 한날 한 시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사실은 신문에 날 일이 아닌 모양인지 아무도 관심조차 가져 주지 않는다. 나는 둘째 아이의 차를 타고 가다 5중 추돌에 끼여 입원하게 되었다. 앞 범퍼가 부서질 정도였으니 틀림없이 어디가 잘못되어도 잘 못되었을 거라는 가족들의 성화에 입원을 하였다. 며칠 지나도 별 후유증이 없어 다행이긴 하였지만 아이고. 나와서 가만 생각해보니 별 탈 없이 입원했다가 나왔으니 이거 나이롱환자 노릇한 거 아닌가. 내가 나이롱환자 욕하며 살았는데

 

나이롱환자’ <시집 밖의 시>

 

세상에 선하고 순한 사람들만 산다면 생고生苦란 생겨나지 않을 터라고 그는 확신確信한다. 그리고 사람살기가 날로 어려워지고 각박해 짐은 사람 탓이라고 진단診斷한다. 로 인간을 지고 가겠다고 선언한지라 세상이 각박하게 몰아치도록 하지 않으려면 바로 시가 인간진단서로 드러나야겠다고 시도詩道를 겨눈 것 같다. 오시인은 사람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자술해간다. <모향>에서처럼 술술 구성지거나 구슬프게 읊어가지 않고 독백조獨白調로 자술하는 취향趣向을 선보이기 시작하니 나이롱환자가 바로 그런 시이다. 무엇을 핑계 대거나 주장하고자 자술하지 않는다. 사람을 살펴 알아가는 진맥診脈을 찾아내 사람 속을 들여다보고 그냥 이야기 삼아 담소談笑로 엮어 독백하고 던져둔다. 호소하거나 구호를 외치거나 대자보를 내 건들 무슨 소용이랴. 속이고 속아본 세상사인지라 우리 모두 불신不信의 늪에서 허우적이는 꼴을 보았으니 도란도란 회포懷抱를 풀어주는 것이다. 사람 찾기를 위해 자신부터 나이롱환자 노릇했음을 이실직고以實直告하고 우리 모두 아이고숨기고 감춘 것들을 털어버릴 수 없느냐고 능청스레 반문反問한다. ‘털어 먼지 안날 놈 어디 있느냐 변명하지 말라대질러 본들 쇠귀에 경 읽기임을 뼈저리고 있기에 말작난이 될세라 조심스레 슬적슬적 건드리기만 한다. 그렇게 나이롱환자에는 아이고가 굽이마다 발림도 되고 추임새 노릇도 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나이롱환자 노릇한 자신을 밝히고 내가 나이롱환자 욕하며 살았는데토를 달아서 시비 걸 것 없다고 한다. 이는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 힘든 세상을 안타까워함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흉보는 세상으로 몰고 가는 속셈들이 역겨워 나이롱환자는 자꾸 아이고하는 것이다. 이처럼 능청스레 담소談笑해서 우리로 하여금 숨긴 것들을 감추지 말고 자술自述하게 은근슬쩍 권한다. 그래서이지 싶은데 오히려 나이롱환자는 한사코 익불석숙(弋不射宿)’하라고 대질러온다. 주살질을 하되() 잠자는 새를(宿) 쏘아 잡지 않는다(不射). 때로는 본의 아닌 나이롱환자까지도 주살질 해 버리면 진짜 나이롱환자 정수리에 절로 주살이 적중할 것이 아니냐고 자문自問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고란 말씨가 묘하게 모두를 찔끔하게 한다. 는 이런 맛을 낼 때 더욱 깔끔하게 주살질() 노릇하게 된다. <모향母鄕>에서 만났던 구슬프고 구성졌던 순둥이 오시인이 아니다. 사람 찾기에 나섰기에 넉살 부리지 않으나 때로는 능청스럽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가끔은 호통 치듯, 여하튼 오시인의 담소談笑하는 시들은 차근차근 사람의 마음에 적중的中한다. 이제 익석(弋射)의 시인으로 자리바꿈 한 셈이지만 여전히 이변離邊의 시인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는다.

 

대륙 깊숙이 자리 잡았을 때

단단히 국경선 못 긋고

다들 어디 갔는가

 

저 억울한 역사를 보고도

남과 북 사이 철벽 못 걷고

다들 어디 갔는가

 

그 기른 힘 어디 쓰려고

저리 눈감고 입 다물고

지금 다들 어디 갔는가

 

[다들 어디 갔는가] <시집 밖의 시>

 

하도 답답하니 호통 치는 시를 가끔 내놓기도 한다. 백두대간 삼천리금수강산에 터를 잡고 살아온 우리 한겨레가 이처럼 남북으로 갈라서서 아옹다옹 한 적이라곤 단군왕검檀君王儉 이래 처음이다. 이사람 저사람 통일-통일 하고 분단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여전히 통일될 기미는 오리무중인지라 다들 어디 갔는가호통 칠 수밖에 없다. 두만강이나 압록강 중국 쪽 강변에 서서 북한 쪽을 향해 우두커니 서 본 경우이거나, 아니면 동서로 쳐 있는 DMZ를 영상映像으로라도 본 경험이 있다면 다들 어디 갔는가이런 외침이 철렁 울림 해 올 것이다. 통일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저리 눈감고 입 다물고꽁하니 맴돌기만 하는 삼천리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 다들 어디 갔는가외침은 어느 한쪽을 향한 절규絶叫가 아니다. 오시인은 정치시인도 아니고 사회시인도, 저항시인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을 지고 가는 시인인지라 이 땅에 사는 우리를 시달리게 하는 분단은 지금 시인자신이 자학自虐하는 다들 어디 갔는가의 울림으로 모두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절규하는 시는 오시인에게는 흔하지 않는 경우로 사람 찾는 시라면 외치지 않고 도시의 불빛처럼구슬퍼도 차근차근 마음을 적셔가는 자술시自述詩가 제격이다.

 

늦은 저녁 시내전체 촘촘히 별빛처럼 전등 밝힐 무렵

추산공원 문신미술관 앞 지나다 그 불빛으로 하여 문득

가슴 저림을 느끼며 나는 발길을 멈추었는데요

장소는 다르나 잠시 70여 년 전 한 젊은 여인의 처지로

환치됨을 어쩌지 못하는데요 그녀는 생계를 좇아

어린 아들을 친지한테 맡기고 부산의 한 직장에 머물렀는데요

어쩐 일인지 그녀는 시내불빛만 보면 막무가내

하염없이 눈물은 쏟았는데요 잠시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이런 일이 연일 계속되자 주변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아무리 물어도 눈 짓무르도록 눈물만 쏟았는데요

직장도 좋지만 이러다가 병나겠다고 주변사람들이 서둘러

그녀를 선산 구미의 아들 곁으로 돌려보냈다는데요.

 

도시의 불빛’ <시집 밖의 시>‘

희수喜壽를 넘긴 오시인이지만 여전히 시루골에서 (1)’에서 / 너는 밤에 더욱 / 훌쩍이며 흘러라고 했던 어머니와 아들로 남아 여전히 그 때 그대로의 삶을 함께 누리고 있다. 마음속에 그러한 각인刻印 하나 없는 사람은 산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애달픈지 모른 채 덤덤하기 쉽다. 마음저리고 애간장이 탈수록, 세월 따라 묵어갈수록, 애끓는 설움일수록, 삶이란 것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까닭을 모른다면, 삶을 두고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 걱정할 것 하나 없이 호의호식하면서 산다고 살맛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미건조한 막대기는 아무리 땅에 깊이 박아 물기를 흠뻑 적셔주어도 꽃은커녕 잎사귀 하나 피어내지 못한다. 막대기 같이 사는 인생은 도시의 불빛이 남몰래 훔치게 하는 눈물의 뜻을 알 리 없기 때문이다. ’도시의 불빛이 다독거리는 소곤거림을 듣고서도 마음이 울림하지 않는다면 더불어 말할 것은 없다. 삶이 애달파 눈물겹고 안타까워 눈물짓는다고 해서 청승맞다 여긴다면 그 역시 더불어 말할 것이 없다. 밤 도시를 내려다보고 도시의 불빛이 오래 전에 간직했던 이제사 알겠어라 / 빛에도 내 소스라치게 놀람을그냥그대로 마주하는 오하룡. 그랬던 그도 이미 늙었지만 그 유년을 그대로 마주하며 그의 독백獨白은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늙지 않아!‘ 눈물겨운 진실 바로 그것이 되어준다. 의 진실한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눈물겨운 진실을 저마다 마음속에서 퍼 올리게 하는 도시의 불빛을 요즈음 말로 산문시散文詩라 명명命名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독백獨白이 청승스럽다 말하지도 말라. 본래 인생人生의 눈물겨운 흐름은 눈물방울이 이슬 맺는(結露) 그냥그대로(自然) 바로 그런 것이다. ‘도시의 불빛은 이 마음 저 마음을 가리지 않고 익석(弋射)하여 적중的中시키고, 저마다 나름대로 눈물겨운 삶을 퍼 올리도록 따독따독 소곤거린다. 인간 오하룡은 희수喜壽를 넘겼지만 시인인 덕으로 여전히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보채는 코흘리개 유년幼年에 머물러 사람을 울컥하게 할 수 있는 시를 짓는다. 우리로 하여금 삶의 눈물겨운 진실을 퍼 올리게 하는 <모향母鄕>의 시인으로서 본분本分을 따랐듯이 그의 도시의 불빛같은 자술시自述詩역시 시인의 본분本分 따라 삶을 미더움으로써(以信) 마주할 뿐이다. 그래서 시인 오하룡은 아름다운 말로 다듬고 꾸미지 않고서도, 북받쳐 울컥하게 삶을 어루만져 살맛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해줄 시선집詩選集 <오하룡 시선>에 평설評說 삼아 발문跋文을 붙일 수 있게 돼 매우 기쁘고 <오하룡 시선>이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