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正見 그리고 放下

- 목영 이광석의 시 세계

 

尹在根(문학평론가. 한양대 명예교수)

 

 

여러해 전에 木影作詩를 살피면서 中正라고 밝힌 바 있다. 木影作詩는 예전부터 지금껏 그 짜임새를 의도적으로 꾸며보고자 한 적이 없다. 물길이 절로 길을 잡아 흘러가듯 詩心感動한 그대로 詩想을 자아내어 木影作法은 억지스러운 데가 없음을 살펴본 바 있었다. 이제 다시 木影 詩 作法을 두고 이러고저러고 批評할 생각은 없다. 그는 이미 한평생 詩作을 두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 이러면 가 되고 저러면 가 안 된다는 本能을 이미 삭일대로 삭여 一家를 이룬 지 이미 오래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一家를 이루게 해준 그의 詩心을 따라 속내를 찾아 살펴보려 한다.

 

지리산에는 주민등록증이 없는 나무들의 마을이 있습니다 ---- 뿌리 내려 살아온 백 년, 벌거숭이로 살아갈 또 다른 백 년을 예약하는 천 년 푸른 저 고사목들의 울음을 보라 발신인도 없는 우표를 마디마디 가지마다 잔뜩 매달고 장터목 칼바람 혼자 받아 봄편지 택배 길 멈춘 저 늙은 집배원. , 텅 빈 하늘로 눈 먼 세월 다 보내고 이제는 입고 벗고를 초월한 탁발승이 되었네 [고사목 맨 앞과 뒷부분]

 

木影老詩人이지만 詩心은 여전히 유유히 청청하게 흘러가는 강물이다. 젊어서부터 지금껏 詩心은 강물 같았지 솟구치거나 내리꽂히는 분수의 물줄기를 닮고자 하진 않았다. 그래서 는 유장하면서도 감칠맛이 돌아 사람들의 마음속을 휘감고 은근히 맥놀이하게 하는 中正의 멋이 항상 든든하다. 지금은 더욱 그의 詩心心中心琴으로 누리게 해준다. 늙어서도 자신의 詩心을 한결같게 갈무리하고 있음을 [고사목]이 잘 드러내준다. 이미 그는 山門을 나섰다고 로 밝힌 적이 있나니 여기 [고사목]은 자신이 세상바람에 띄워 보내는 편지글이다. 인생의 편지글이란 절절할수록 단락 짓지 못한다. 염주 알들이 한 줄에 꿰여 한 고리가 되듯 [고사목]도 줄줄이 이어져 본래 인생이란 單幕임을 마주하고 저마다 인생을 되돌아보라 한다. 젊어서는 永生할 줄 알고 입고 벗고설치지만 삶은 반드시 늙음이란 골목을 향해 내리닫고 있음을 틈새 없이 절절하게 전해준다.

[고사목]을 눈으로 읽지 말지어다. 입으로 처렁처렁 소리 질러 귀로 [고사목]의 흐름을 따라 들어볼 일이다. 그러면 누구나 딱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는 人生임을 사무치게 될 터이다. [고사목]은 지나온 세월 이런저런 입고 벗고했던 온갖 매듭들을 풀어서 훌훌 놓아버릴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장을 잊지 말라고 절절하게 탁발승이 되었네로 편지를 멈춘다. 木影詩心은 강물 같아도 詩想을 자아내 그 강물에 띄움은 매우 섬세하다. [고사목]詩行으로 가름하지 않고 한 줄이듯 연이어 구두점을 극도로 피하다가 탁발승이 되었네끝내놓음을 보라. 길든 짧든 한 인생이란 한 줄기 외길이고 늙은 다음 죽음이란 종착역에 닫기까지는 끝남이 아닌지라 되었네로 편지글을 멈추어 마치 山寺梵鐘이 맥놀이 하듯 내버려둔다.

 

밤새 바람 날에 문초당한 뱃전에도

해탈의 감빛 같은 새벽이 닻을 내린다

오래된 방황, 더 누구를 기다릴 것인가

새벽 바다에 묻는다

-----

우리가 찾는 삶의 푸른 입질은

어느 손끝에서 만날까 [조간의 식탁 7~10, 끝 두 행]

 

인간은 늙어도 그 詩心虛靜하면서도 섬세한지라 詩人은 여전히 젊다. 그의 詩心이 강물 같다하여 詩想을 두루뭉수리로 싸잡아 그럭저럭 한다는 것은 아니다. 평생 詩人으로 살았지만 知性이나 感性이 남보다 뛰어남을 과시해보려고 를 이용한 적이 없다. 한국현대시가 예기(銳己) 경쟁을 하느라 소용돌이칠 때도 木影은 한발 물러서 삶이라는 현장 속에 묻어나는 生苦를 고달프면 고달픈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때로는 넌지시 때로는 세차게 詩想을 엮어냈지만 自己를 보란 듯이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 如來가 한평생 내내 生苦했듯 木影도 그대로 본받아 詩道<生苦正見>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詩心生苦의 장본(藏本)이라 불러도 틀릴 것은 없을 터이다. 뿌리를 꼭꼭 숨겨둠을 일러 장본(藏本)이라 한다. 그런 詩心인지라 새벽 바다에 묻는다고 삶을 보살피지 밤새 바람 날에 문초당한 뱃전을 대낮이 오면 들고 나가 항변하라 삿대질하지 않는다. 그에게 는 그 무엇의 수단도 목적도 아니다. 로서 인생을 말하여 인생의 참모습에 다가가게 우두질함이 詩人良心임을 木影를 만나보면 알고도 남을 터이다. 이른바 參與詩氣流란 풍랑이 세찰 때에도 자신의 詩道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淸明한 대낮 같지 못하고 항상 밤새 바람 날에 문초당한 뱃전같은 것이 삶의 現實이다. 그렇다고 절망하지 말라. “해탈의 감빛 같은 새벽이 닻을 내린다니 온갖 문초누구를 기다릴 것없이 새벽 바다에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픈 삶을 체념하고 포기함은 아니다. 왜냐하면 詩人으로서 우리가 찾는 삶의 푸른 입질은 / 어느 손끝에서 만날까이렇게 끈질긴 희망의 닻줄을 끊지 못하게 하는 바라밀이 동아줄 같기 때문이다. 詩人僞善이나 虛勢의 늪으로 던져서는 안 된다는 詩精神木影에게는 剛健하다. 온갖 문초 당한 뱃전같은 삶의 현실을 새벽 바다에 묻는다고 하되 그래도 삶의 푸른 입질은 / 어느 손끝에서 만날까自問하면서 문초당한 뱃전을 떠나지 못하는 연민(憐愍)을 가슴에 담아보라 한다. 이처럼 木影詩心生苦憐愍을 떠난 적이 없다. 詩人으로서 평생 詩心의 길을 벗어날 수 없었던 因緣은 이미 그의 3 이전에 있었다.

 

한끼의 가난은 구걸해도

한끼의 양식은 거절 당했네

저녁 밥상 못 받은 겨울 썰물 바다 같은

불공정한 허기 때문에

여덟 식구 입 풀칠 경쟁도

동네 청문회 감이었네

전사통지서 없는 아버지 주검 앞에

밑머리 다 빠진 어머니 함지박 행상은

내힘든 고3 시절을 알바 휴학으로 돌려 세웠네

고무신 공장에서의 야근 1,

미군 병참선 하역 작업 중

헌 군화 밑창에 숨겨 나온 쌀 한 줌, 그리고

밤새 씹어 삼킨 오징어 다리 냄새

때문에 부두 검문소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던

또 다른 노동의 현장도

내 젊은 날 거친 시의 바다였네 [60년대 알바 全文]

 

이것은 흥부가에 나오는 가난타령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이 끌어다 준 노동의 현장거친 시의 바다가 되어 그로 하여금 한평생 인생의 바다에 正見詩道를 넓힐 수 있게 한 根基였음을 증명(證明)한다. 10대를 모질게 몰아붙였던 가난을 풀어내는 詩心을 보라. 가난을 향한 분노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다. 오히려 한발 물러나 마치 가난의 실꾸리에서 가난의 실을 풀어낸 映像들이 파노라마로 드러나 하염없이 마음속을 휘저어 사무치되 분노하지 않는다. 두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별것이 아니다. 마음속을 적시는 또 다른 눈물이 있음을 절절한 生苦가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바로 正見의 현장이다. 이미 십대에 밤새 바람 날에 문초당한 뱃전에 매달릴수록 詩心은 삶의() 괴로움을() 마주하면서 사무치지 분노하지 않았다. 진정한 詩心이라면 분노하지 말라고 詩聖 杜甫들이 이미 밝혀두지 않았는가. 물론 木影도 사람인지라 때때로 슬쩍슬쩍 憤怒의 낌새를 로 비친 적은 있었지만 그의 本分은 아니었다. 그런 분노를 안으로 새겼지 한 시절 유행했던 대자보처럼 자신의 를 헐값에 世俗化하지 않았다. [60년대 알바] 같이 世波가 험악해도 저만치 한발 물러서서 詩人은 인생을 사랑할 일이지 인생을 메치고 되치는 거간 노릇이란 할 수 없음을 사무쳤기에 흔들리지 않으니 그의 詩心生苦의 뿌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세상 천지에 최초로 <生苦正見>해주신 如來를 모신 절집에서 生苦正見을 자신의 詩心에 담고자 마산포교당을 맴돌았던 木影20대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은 셈이다. 삶의 현실이 세찰수록 세상은 거친 시의 바다로 내몰았지만 詩心은 무르녹아 生苦詩精神은 더욱더 혼후(渾厚) 心德을 두텁게 해 준 것도 如來의 말씀을 귀담았기 때문이리라. 70년대에서 90년대 서양에서 수입해온 온갖 思潮들 탓으로 한국현대시가 저마다 송곳 같기를 경쟁할 때도 木影詩心을 날카롭게 하고자 숫돌에 얹어 갈려들지 않았다. 詩心初心대로 가야 길어내는 언어들이 깊고 그윽하게 聞香함을 의심하지 않았고 변함없이 初心 그대로 木影은 자신의 詩道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게 허용된 눈물의 잔고가 얼마나 될지

나의 안에 시의 꽃 같은 언어들이 얼마나

잠자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

----

아무리 물어도 답을 못 내는

나는 이미 늙은 낙타다 [낙타의 변 7~9--- 끝 두 행]

 

눈물의 잔고는 다름 아닌 시의 꽃 같은 언어들이다. 詩心이 자아내 詩想을 엮어내는 언어들눈물의 잔고에서 피어나는 시의 꽃이라 부르고 있음을 보라. 이처럼 그의 詩心에는 송곳도 없고 서슬 퍼런 칼날도 없다. “눈물방울방울이 生苦의 아침 이슬로 메마른 사막을 견뎌내는 낙타처럼 그의 詩心은 멈춤 없이 生苦觀音을 울리느라 나는 이미 늙은 낙타다自述이 후련하다. 悔恨餘恨도 없이 그냥그대로 하염없는 自畵像이다. “이미 늙은 낙타이는 평생 버린 적이 없는 生苦에 뿌리내린 詩心이 그려낸 正見의 자화상이다. 이제 詩心늙은 낙타의 등에서 生苦의 짐들을 풀어서 입고 벗고를 초월한 탁발승으로 돌아와 世俗의 사막에 바라밀의 水路를 내고자 침묵보다 더 깊으리눈물어린 언어의 목탁을 탁탁 치며 放下한다.

 

밤새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눈가에 졸음증을 푸는 수련

동녘 하늘 슬며시 다가와 말문을 열면

너는 금방 수줍어 얼굴을 가린다

평생 해맑은 웃음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겨우내 몸살 앓는 진흙 속 푸른 멀미

단 한마디 소리하지 않고

안으로만 몰래 품은

저 오롯한 사랑의 말씀

침묵보다 더 깊으리 [수련 눈 뜰 때 全文]

 

이제 熱沙의 모래바람에 눈을 감아야 했던 늙은 낙타는 메마른 사막도 밟아 건넜으니 馬頭琴의 선율을 뜯지 않아도 世波에 젖을 물릴 눈물이 맺히듯 詩心은 방하착(放下著)하고 저 오롯한 사랑의 말씀탁발승의 목탁소리에 맡긴다. [수련 눈 뜰 때]木影詩心이 이제 눈가에 졸음증을 푸는 수련이 되는 것이다. 온갖 예토(穢土) 즉 더럽고 거친() ()에다 뿌리를 내려도 청순하기 이를 데 없는 수련의 향기는 본래부터 저 오롯한 사랑의 말씀으로 如來의 자비로운 法音을 풍긴다. 여기 수련은 그의 詩心인지라 生苦正見을 더욱 징명(澄明)하게 하고자 온갖 거추장스런 것들을 훌쩍 내려놓은 放下 그것이다.

내일모레면 米壽를 맞는 詩心은 이제 무엇을 그 속에 담아둘 것인가.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입고 벗는온갖 잡동사니들을 그만 내려놓고(放下) “탁발승이 되어 목탁 치는 눈물의 잔고에는 이제 慈悲의 바라밀이 아닌 것이란 없음을 [수련 눈 뜰 때]침묵보다 더 깊으리眞言이 분명하구나! 이제 木影生苦正見을 목탁 쳐서 온 사람의 心中을 울리게 할 터이다. 여기 [수련 눈 뜰 때]침묵보다 더 깊으리란 귀에는 들리지 않는 心琴의 울림이다. 귀는 침묵을 못 듣지만 마음은 듣는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는 마음을 가야금줄로 돌려놓아 침묵으로 말한다.

木影詩心은 사람들의 心中心琴으로 돌려놓음에 걸림이 없다. 평생 이러했는지라 이제 탁발승이 되어 生苦正見世俗의 진벌에 眞言하고자 詩集(바람의 기억)을 마련했구나! 분명 老詩人木影는 우리에게 生苦正見을 겸허히 다음처럼 自問해 보라 하리라: <生苦正見이라! 삶의 괴로움에 관해 아시는가? 그 괴로움의 발생에 관해 아시는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해 아시는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아시는가? 누구나 겪는 生苦의 올바른 이해를(正見) 사무칠 줄 아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