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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만 칼럼집 <달걀로 바위를 치다>

 

 

 

 

저자 소개

 

저자 이진만은 반평생 동안 교단을 지킨 교육자다. 그러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많은 분량이 교육 관련 칼럼이었지만 그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체육 등 전공을 따지지 않고 여러 분야에 걸쳐 글을 썼다. 저자는 1957년 정유년에 울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 통영으로 옮겨가서 살았고,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대구에서 공부했으며, 고성 철성중학교에서 37년 동안 교단에 섰다. 저자의 태몽(胎夢)은 ‘자라’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삼태기에 새끼 자라를 가득 떠 담는 꿈을 꾼 후 저자를 뱄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에게 투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큰놈 한 놈만 잡았으면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큰 인물이 될 건데, 새끼만 왕창 잡았으니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제대로 이루는 것이 하나도 없잔아요.” 그래도 태몽 덕택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저자는 발 딛고 선 땅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언제 어디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다. 교육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국정교과서 집필 위원을 두 차례 지냈으며, 현재는 새교육공동체 고성주민모임 회장, 제정구 고성 기념사업회 회장, 고성신문 논설위원, 고성군 교육발전위원회 이사, 고성군 사회복지협의회 이사, 대한민국 수석교사회 회장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차례

 

서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chapter 1

좋은 지도자의 덕목

결혼 연령을 앞당기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통일의 당위성과 통일 편익

고학력 실업자를 만드는 학교 교육

훌륭한 지도자는 갈등을 만들지 않는다

김지하, 타는 목마름이 해소되었는가

교육 문제, 임기응변식 해결책은 안 된다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다름을 말하지 말고 같음을 이야기하라

말이 주는 인과응보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갈등을 부추기는 잘못된 목욕 문화

부모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

달걀로 바위를 치다

어느 칼럼니스트의 독백

통일호는 어느 바다 아래 가라앉아 있을까

 

chapter 2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

이론과 실제

배신의 계절

백수(白手)의 시대

착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에서

교육 현장에 교육이 없다

도덕 교과서 밖의 세상

이산가족의 슬픔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소통과 포용의 정치를 보고 싶다

왜 북한의 군인들은 바다로 나가는가?

시인이 죽은 사회

돼지감자 예찬론

아이들이 가는 길, 그 비탈 너머에

19세, 컵라면, 두 단어에 울었다

정치인의 변신은 무죄이다?

법보다는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치고 싶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chapter 3

국민들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

평양을 지도에서 없앨 수 있을까

거짓말을 가르치는 사회

신년인사회를 다녀와서

모두가 따뜻한 설날이 되면 좋겠다

온전한 우리의 들에서 봄을 맞이하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지 말자

돌팔이 전문가가 망친 나라

무녀도(巫女圖)

슬프고 못난 나라 ‘대한민국’

무너진 교육 현장에서 방황하는 아이들

가끔은 누워서 세상을 보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꾼 제정구

플라스틱의 역습

산으로 가고 있는 페미니즘

공룡을 얻고 이순신을 잃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본문 속으로

 

1992년부터 지역 신문에 칼럼을 싣기 시작하여 약 27년 동안 180여 편의 글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일 년에 두어 편씩 쓰다가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집중적으로 글을 썼다. 국가나 지역 사회에 주요한 일이 생겼을 때마다 신문사의 의뢰를 받아 글을 썼으니 작은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칼럼이라는 것이 시사성을 가진 글이다 보니,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이미 글의 향기를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 쓴 글을 버리려고 했더니 주변 지인들이 몇 편을 골라 책으로 엮어보자고 한다. 고민 끝에 책을 내기로 했지만 글 선배들의 주옥같은 저서 속에 졸작 하나를 슬그머니 보탠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책의 마지막 쪽까지 읽어주는 독자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저자의 〈서문〉 중에서

 

무너진 교육 현장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본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못된 교육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제는 반성해야 할 때이다. 아이들을 무한한 경쟁 속에 몰아넣고 하나의 길로만 달리게 해서는 안 된다. 줄 세우기로 인간의 값어치를 따질 것이 아니라 인간 한 사람마다 다른 존엄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걷고 있는 모든 길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 사회적 낙오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제라도 올바른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 〈무너진 교육 현장에서 방황하는 아이들〉 중에서

 

자녀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를 돌아보라.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및 바람직한 인성과 체력을 가진 일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휴일도 없이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혀두고 ‘고학력 실업자’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교육을 하고 있다. 이게 건전한 생각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키우는 학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高의 뜻을 새겨 보라. 말 그대로 ‘높다’는 뜻이다. 초등학교는 기초 교육을 받는 곳이고, 중학교는 중등 교육을 받는 곳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높은 교육을 받았음을 말한다. 그런데 또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리고 대학大學은 ‘최고급의 공공 교육 및 연구 기관’을 뜻하는 말로 소수가 되어야 희소성이 있다. 당연히 지금처럼 수많은 학사를 배출하는 한 대학의 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사회가 되려면 고등학교만 나와도 충분히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쩌랴.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교육에 대한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아집은 특별한 것이어서, 올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학부모들은 무작정으로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내 아이만은 정상頂上에 꿋꿋이 설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이는 취업자보다는 실업자 60% 안에 들어갈 확률이 더 높은 게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내 아이만은 반드시 성공하여 반듯한 직장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대학을 보낸다.― 〈고학력 실업자를 만드는 학교교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