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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그래도 우리는> 평설

 

 

영원한 자유인그 삶과 세계

정재관 론

 

남부희 전 언론인,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정재관 선생, 그분은 대학교수이자 신문논설위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분의 삶의 언저리에는 문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한 시대의 궤적軌跡을 남기고 간 지성인으로서 칼날 같이 번득이는 비판정신은 쉬임 없는 강물이 되어 세인의 갈증을 풀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는 용기는 이성으로 다스리지 못한 빙판 위의 인물로도 표현된다. 어쨌든 그분은 이 있으면 벗도 있다는 논리의 소유자였다.

필자는 그분의 문학세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추모비 건립을 위한 준비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삶의 일부를 조명할 따름이다.

그분의 문학세계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다산의원茶山醫院의 장남

 

선생의 부친 이름은 다산茶山이었다. 원래는 경욱京郁이었으나 일제 때 개명하라는 독촉에 다산茶山이라고 고쳤다. 다산은 조선 정, 순조대純祖代 실학實學의 거성巨星 정약용丁若鏞의 호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명改名 독촉에 사야마라는 다산茶山으로 고치자 일본인도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냥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말로써는 비록 사야마라 할지라도 한자漢字의 뜻은 다산茶山으로 민족성을 간직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이러한 뜻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금융인으로, 공무원으로 활동하던 끝에 가장 원하던 한의사로 탈바꿈하게 됐고, 이때부터 다산(茶山)은 그분의 이름이자 호가 되어 일생을 같이했다.

마산시 중성동 112번지 뒷골목, ‘다산茶山의원이라면 이 지역에서 한약깨나 달이던 집안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의 학식이 남다르고, 처방전이 유명할 뿐만 아니라 덕망이 높다는 것 말고도 그 이름에서 풍기는 향기까지,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선생은 다산공茶山公3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또 다산공이 인술仁術을 베풀었던 중성동 그 사랑방에서 끝까지 지역의 흙이 되셨다.

필자가 다산茶山이라는데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선생의 세거지世居地가 유배지로 이름난 남해요, 본관이 진양晋陽이었고 그 가까운 선조대先祖代에서 적어도 통정대부通政大夫 정도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대부 집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선생의 부친이 유독 다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데 대한 매력과 호기심에서였다.

18년이 넘는 유배생활을 통해 고독과 투쟁의 한계를 초월했던 정다산丁茶山의 삶의 세계, 그 속에서 인술仁術과의 무엇을 짚었길래 다산茶山이란 호를 한의韓醫의 대명사로 내걸었을까? 그것은 정다산이 의술에도 뛰어났다는 사실과는 별개문제다. 의사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다산으로 개명했던 것으로도 증명된다. 순수한 인간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가 내재해 있음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생활은 고뇌를 통한 자기완성의 창조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현실사회로부터의 단절이요, 역사적 고아로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아픈 생활이 없었던들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근대사상으로서의 맹아를 후대에 뿌리 내릴 수 있었겠는가.

선생은 호가 없었다. 호에 대한 관심을 기피했던 사람이었다. 다른 이름이 있었다면 어릴 때 집에서 불렀던 정재일鄭在一이 있었다. 철저한 유교적 사상을 이어받은 집안(그렇다고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인 집안은 아니다)에서 고풍古風의 면이 너무 없다는 점 등에 대해 필자는 선생의 생전에 몇 번이나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선생은 문제의 본론本論을 피하거나 잘 모른다는 답변으로 넘기곤 했다. 집요하게 관심을 가졌던 필자였지만 선생의 시원한 답변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그에 대한 변변한 해답 하나 얻지 못한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다산이라는 데서부터 출발시키지 않으면 안 될 무엇이 마음깊이 숨겨져 있음이 사실이다.

 

 

운명적인 만남

 

선생은 호 쓰기를 거부했다. 그것도 강력한 거부의사였다. 다산이라는 호에 대한 거부반응인지도 모르지만 하나쯤 쓸 나이도 됐다.”는 주위의 권유는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시인, 묵객들이 흔히 쓰는 필명이나 예명藝名조차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중앙일보 신춘문예 응모 때에는 어릴 때 이름인 정재일鄭在一을 썼다. 이때 동아일보에 정재관鄭在寬을 썼기 때문에.

그런데 선생의 유배생활(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해직교수라는 운명은 그 부친이 썼던 다산의 의미와 어쩌면 그렇게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질 수가 있을까? 정다산 같은 운명을 지극히 싫어했던, 그래서 다산뿐만 아니라 어떠한 호에 대해서도 외면하려 했던 선생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승인한 채 다산이 겪어야 했던 길을 스스로 밟고 말았던 것이다.

선생은 운명론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인과론因果論에 대한 현대의 불신이 운명관의 재생을 초래했다는 슈펭글러를 반박했다. 운명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역사에서 비과학적인 것이 운명이요, 이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숙명은 아무리 위태로운 것일지라도 그리스의 비극처럼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이 바라고 있듯이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적어도 그 일부분은 우리의 이해,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 〈현대문학과 Fantasy의 기능(원제 FantasyRealism)

마산교대논문집 3, 1972. 6

 

이렇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운명론은 선생이 유배생활에서 해를 거듭하게 되자 회의를 낳기 시작한다. 주역을 펴 들고 인간의 운명을 살폈고 풍수지리에 심취하여 밤을 새우는가 하면 인체와 우주만물의 기의 관계를 규명해 보려고도 했다. 자신의 운명을 부당한 운명이라 외치면서도 우주의 음양에서 행과 불행不幸을 엮는 자신의 운명적 이치理致를 찾기 위하여 방황했다.

-선생은 부당한 운명의 타당성을 찾으려 했던 것인지 모른다. 운명의 비과학적이고 허위적인 비학秘學을 밝히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크블록처럼 운명의 과실이든 부당한 운명에 의한 일시적인 패배이든 스스로의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다산에 대해 무관심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선생은 그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어쩌면 신이 써 놓았을지도 모르는 각본에 따라 파란만장한 드라마 속의 운명적인 인물로 선택됐는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수많은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의 유배의 아픔은 다산이라는 호가 중성동 뒷골목 돌담집에 새겨졌던 수십 년 전, 혹은 그 이전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선생은 또 그 운명적인 요소 때문에 오늘과 내일까지 수없이 회자될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이야말로 그 스스로에 대한 모순이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운명에 의해 자기가 밀려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정재관 저, 그래도 우리는, p.101, 자기가 만드는 운명

 

선생은 성품이나 학리적學理的으로 합리적인 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합리적인 것에 대해 무한한 저항을 서슴지 않았다. “세상은 꼭 합리적이고 논리정연하게 이루어져 나가기보다는 우연이나 부조리하게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훨씬 많은 것이라 했다. 이는 합리성의 불합리한 일면을 꼬집는 것이기도 했다. 또 이러한 합리를 막는 것은 이해利害를 초월하는 마음이라 했다.

 

엄밀히 계산된 합리주의와 언제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획일주의, 오직 하나의 논리로만 통하는 메커니즘 등으로 나타나는 현대의 병적징후에 대하여 이해利害를 초월한 마음으로 현실에 숨구멍을 찾아야 한다.

― 〈현대문학과 Fantasy의 기능, 마산교대 논문집 3, 1972. 6

 

합리적인 것, 그것이 세상의 많은 이치를 포용하려 하고 대세大勢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선생은 합리적인 것 속에 무수한 개성이 매몰되고 묵살당하는 일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원만한 것, 그것은 가장 개성을 잃어버린 결과와 통한다는 이치였다. 또 가장 합리적인 것, 그것은 동시에 가장 책임을 지지 않는 사고방식이라고 매도한다. 그래서 가장 이질적異質的인 개인주의, no를 강조했다.

 

자각된 국민,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과 개인주의를 자각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국민은 no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인류의 발전은 이 끊임없는 no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는 신에 대해서 no라 하고 이 명령을 불복종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자유를 찾게 된 것이다. 의 노리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으려면 이것이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첫 출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래도 우리는, p.88~89, 부정의 철학

 

필자는 선생을 한마디로 자유인自由人이었다고 규정하고 싶다. 철저한 자유인이 되고 싶었던 그러한 분이었다. 그러나 끝내 그 자유의 덫에서 자신의 자유를 구속해 버린 자유인일지도 모른다.

선생은 인간은 자기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드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그 스스로가 바라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만드는 존재이며 또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작품은 현실과의 충돌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단순한 반복만은 진정한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타성惰性이 붙은 반복은 체험으로 의식될 수 없다. 체험은 낯선 현실과의 충돌이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어둠이며 해답이 요구되는 질문이 된다. 길들여진 것, 즉 낯익은 것이란 삶을 안이하게 하고 생명력인 본질과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은 늘 물음이며 실제로 우리의 삶은 물음 속에서 이루어진다.

― 〈침묵과 언어, 마산교대논문집 5, 1974. 7

 

선생의 자유관自由觀은 이같이 니체의 말처럼 인간은 고정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신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태어난 뒤에는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자유가 주어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또 파스칼이 인간을 짐승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고 했을 때, 인간이 자유의 존재임을 확인했다는 점을 중시했다. 그래서 인간 중심의 생활에서 확고부동한 것은 오히려 모순이라고 규정한다.

 

지식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그리고 추호도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는 명제命題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인간을 해석하는 일이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의 삶은 완전히 거기에 구속되어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확고부동한 이론은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 〈침묵의 언어, 1974, 7

 

선생은 자유인이 되고 싶어했다. 다채롭고 다양한 존재가 되고 싶어했다. 법관法官이 되라는 부친의 간절한 바람도 선생의 이러한 인간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선생이 호를 마다한 것도 자신의 이름 그 위에 또 자신을 고정시키는 매개체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자유사상은 만년에 노자老子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노자가 지적한 물의 무정형성無定形性, 무규정성無規定性에서 인간생명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이 세상에서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은 물의 부드럽고 약함을 이길 것이 없는 까닭이다”-인간은 다채롭고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점이 물의 상징적 의미와 통한다.

― 〈노자에 있어서의 언어관,

백사白史 전광용(全光鏞) 박사 화갑기념논총華甲紀念論叢,

서울대 출판부 인쇄, 1979. 3

 

노자老子가 삶을 출렁이는 바다와 같고 멈출 줄 모르는 바람과 같다고 할 때, 선생은 그것을 인간의 규정되고 구속당하려 하지 않는 자유와 해방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대해大海의 무수한 파도라는 노자의 비유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선생은 막스 셀러를 등장시킨다. ‘인간은 신이 출현하는 유일한 장소라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탱하고 있는 본질적인 뿌리가 자유라고 믿었다. 인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는 가능성 그 자체, 어린이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유는 인간의 생명력이라고 보았다.

 

 

문학 예술은 가능성의 몸부림

 

선생이 문학이나 예술, 교육을 추구하는 근본태도도 앞에서의 자유의 생명력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현실에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늘 현재가 달라지기 바라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향해 몸부림치는 행위가 문학 등이라 했다. 문외한인 필자에게 문학이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도전하고 반항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창조하는 애절한 꿈이라고 설명했을 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유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필자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만 선생의 글을 통해 나타나는 문학의 규정비슷한 글귀를 일부 인용해 보겠다.

 

시가 일상적인 통념에 대한 반항이며 항상 모순성에 대한 도전인 것임을 안다면 반드시 운명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모순은 우리들의 다양하고 활발한 시의 탐구를 낳게 할 수 있는 자본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시는 어쩌면 지난至難한 작업 속에 그 사명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현대 동양시인의 운명, 마산교대논문집 2, 1971. 5

 

문학은 기존언어를 수단으로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언어를 창조할 수 있고 그 창조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이는 어렵고 느리기 짝이 없지만 이 방법은 가장 평화적이고 가장 가치 있는 세계의 변혁이다. 문학자의 임무는 실로 막대하다.

― 〈문학과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 유고遺稿 중에서, 1983. 10. 10

 

여기에서 하나 생각나는 것은 선생은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아니, 아리랑의 정신을 싫어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네.”에서 버림을 당한 패배의식과 체념 속에서 발병이 날 것을 말하는 약자의 승리는 실로 패배도 아닌 것이고, 승리도 아니라는 해석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임이 나를 버린다고 하면 나도 대등한 위치에서 임을 버리든가 아니면 임이 못 떠나게 꽉 물고 늘어지든가 하는 명확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서, 할 수 없이 임을 떠나게 버려두고는 발병이나 나라고 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눈치만 살피고 애매모호한 태도인, 약자의 반항이라고 지적했다.

선생은 그렇다고 해서 냉소의 각설이 타령은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나를 만들었소, 어머님 술청에서 퇴주잔으로 만들었지각설이 잘못돼야 각설이밖에 더 되겠나고 하는 타령도 현실의 슬픔을 초월하여 체념한 서민문화의 폭넓은 인간성이기 이전에 그것은 패배와 현실도피의 한 변명의 수단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설사 좌절이나 패배라 하더라도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은 처음이요, 종말은 시작이라는 말과 통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은 이러한 문학정신보다는 차라리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지지했다. “진정한 예술은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아내처럼 유별나게 분장을 할 필요가 없다. 사이비의 예술은 매춘부처럼 언제나 성장盛粧을 하고 있어야 한다.”.

 

 

시험을 통한 변화 추구

 

선생의 삶은 늘 시험을 통한 변화의 추구에 있었다고 하겠다. 선생은 삶의 시험은 진정한 자기의 증명이라고 말한다. 선생이 1975년 동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서 동시에 당선됐을 때, 필자가 세인世人들과 함께 놀란 것은 선생의 능력이나 그 영예의 기쁨과는 다른 일면이 있었다. 사실 선생이 길러냈던 제자들 중 벌써 그 몇 해 전에 이 같은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 문학평론가로서 활약하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선생은 고령(?)이라 할 만한 41세의 나이였다. 게다가 당시 현직 대학교수였고, 기존 문학평론가로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신문사 논설위원까지 겸하고 있었다.

 

선생님, 만약에 낙선됐다면 어쩌시려고 그런 모험을 하셨습니까? 그것도 2개 신문사에 말입니다.”

거짓 없는 알몸인, 순수한 나를 시험해 본 것이네. 그래서 그 평가를 기다려 자신의 모습을 다시 정화淨化시키고 싶었네.”(선생은 당선 소감에서도 이 같은 말을 썼다.

 

선생은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현실은 늘 돌발적이며 일방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뒤집어 엎는다.”고 했다. 그래서 쉬임 없는 자기시험을 통해 삶의 가치를 구현하려 했다.

 

우리의 눈은 변화를 싫어한다. 눈은 정지된 것만을 잘 보는 것이며 속도가 빠른 움직임을 잘 볼 수 없다. 즉 변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고정화固定化시키고 공식화公式化시켜 버린다.

― 〈문학과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유고遺稿 중에서, 1983. 10. 10

 

선생의 역사의식은 이러한 변화의 자각으로 일관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변화한다고 하는 사실, 그것만은 변화하지 않는다면 않는 것이다.’는 논리에 근거를 두었다. 역사가 있다는 것부터가 인간이 변화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역사 그것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증거물이라 했다. 딜타이Dilthey인간이 무엇인가는 오직 역사만이 말해준다. 역사적 연구를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을 단념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곧잘 썼다.

그러나 선생은 변화를 그대로 따르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인간이 그 변화를 의식하든 아니하든 간에 변화는 계속되는 것이지만 그 변화에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문화는 없고 발전도 없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장애障碍와 겨룰 때 저 자신을 드러낸다.”는 생텍쥐페리(인간人間의 대지大地)의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했다.

선생은 강에 대한 문화는 거기에 다리를 놓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시간적인 변화가 라면 그 변화에서 원인과 결과 또는 그 경과를 의식하고 미래지향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역사歷史라고 규정했다.

선생은 이러한 역사 추구의 정신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다. 그러나 깨어남으로써 제의식으로 돌아와서 비로소 본래의 자기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이며 생생한 삶이 되는 것인가?” 하고 반문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픔은 생명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변화다. 새역사의 창조란 모방과 답습이 아니다. 조화란 이질적인 것의 통일균제다. 획일적으로 굳어질 때 그것은 썩고 만다. 리듬이란 알고 보면 질서적인 변화가 아니겠는가? 프로메테우스는 명령을 어기고 불을 훔쳐 인류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와 인류의 문화는 비로소 꽃피울 수 있었다.

― 《그래도 우리는, 부정의 철학

 

확실히 역사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화의 본질은 그 변화의 누적성에 있음이 틀림없다. 변화의 누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화의 창조란 있을 수 없다. 당당한 현실은 언제나 과거로 변한다. 역사적 시간은 부단히 현재를 과거로 만드는 누적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 선생은 이러한 변화를 중시하고 과거를 생생한 현실로써 재생시키는 힘이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했다. 포크너의 말처럼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마저도 아니다.”라는 것을 믿고 싶어졌다. 과거 자체의 의미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 그 속에서 인간적 냄새를 찾지 못한다면 죽은 과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선생은 알고 있었다. 선생은 그 냄새를 찾는 것을 휴머니즘의 하나라 했다. 선생은 이러한 휴머니즘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모순이 정화淨化될 때 비로소 실현가능하다고 믿었다. 또 그러한 모순이 발견될 때는 현실과 맞서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현실과의 대항, 그것은 새로운 문화창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보호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금지禁止하라를 금지禁止하라.’는 대중적大衆的 반역사주의反歷史主義에 많은 호감을 지녔다. 아무리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고 제약하더라도 영원한 어제의 잠에서 극복해야 한다고 외쳤다. 전통의 권위, 제도화의 수익자受益者에 대한 쉬임 없는 도전의식을 선생은 위대한 no’라고 규정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데카르트, 괴테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현대 행동주의자 편에 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누적을 통한 변화인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미래를 여는 생성임을 배제할 수 없다. 역사를 통해 제2의 대리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적의 변화, 그것을 통해 제2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면 인간의 미래는 결코 순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선생은 그 전환의 기로에서 깊은 수렁에 빠졌던 인물이었다. 아니 변화變化화 대리경험을 자각하면서도 생성의 과정에서 몸부림치다 열매를 맺는 시기를 놓친 인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목裸木과 잡초의 철학

 

선생은 4계절 중 겨울을 사랑했다. 봄 여름의 화려함이 아니라 고통이 수반되는 겨울을 사랑했다. 봄의 꽃이나 가을의 낙엽은 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떨어져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훌렁 벗어버리는 용기, 고통을 견디어 내는 근원, 그것을 찬바람의 나목裸木에서 찾았다. 뼈가 드러나듯이 진짜의 제모습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맑은 거울과 같은 계절이 겨울이라 했다.

 

동양화東洋畵에서 흔히 나타나 있는 앙상한 뼈와 같은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겨울의 이미지와 상통相通하고 있다. 숲이 무성한 광경이나 넓은 초원들은 동양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고담枯淡한 세계가 드러나 있고 잡다하고 자질구레한 군소들은 전부 잘라내 버리고 만 세계이다. 이런 뜻에서 보면 겨울은 결코 추운 것만은 아니다.

― 《그래도 우리는, 겨울과 동양화의 세계

 

선생은 봄의 향기로운 꽃이라기보다 겨울 찬바람 속에 버티는 나목裸木으로 비유된다. 녹음 우거진 싱그러운 대지 속의 오곡백과라기보다 특유한 생명력을 발산하는 잡초로 비유된다. 선생의 필치와 음성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때 우리가 깜짝 놀란 것은 탁월한 식견의 명성이나 흠모에 앞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보는 심정이 짙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자와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제자들의 선생에 대한 인식은 항상 경외敬畏의 담장 속에서 외로운 삶을 지켜온 분이었다. 정신세계를 활짝 열고 제자들을 모두 불러들인 적이 거의 없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로움은 거대한 대지大地를 지키는 잡초로 상징된다.

대지大地는 어차피 돌과 흙의 메마름에서 시작한다. 황량한 대지는 그러나 푸른 잡초가 무성할 때 비로소 대지다운 생명력을 내뿜는다. 만약 대지가 온통 흙과 돌투성이뿐일 때를 생각해 보자. 비바람이 몰아칠 때, 홍수가 휩쓸 때, 대지의 흙과 돌은 인간을 몇 번이고 사정없이 뒤덮어 버리고 말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홍수와 산사태를 막아주는 대지의 향기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진정 대지를 대지답게 꾸미고 그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대지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것이 있다면 그 무수한 잡초가 아니겠는가. ‘대지의 푸른 초원이란 초원 없는 대지의 무의미를 반증한다. 그리고 초원草原의 향기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귀중한 곡식이 대지 속에서 양식이 될 때까지 논두렁, 밭두렁은 그 방파제가 된다. 그러나 그 논두렁, 밭두렁을 지키는 힘이 잡초에 있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잡초가 없는 논두렁, 밭두렁을 생각해 보라. 바람이 불 때마다, 홍수가 져 사태가 날 때마다 논두렁, 밭두렁의 힘없는 흙과 돌들은 여지없이 무너져 곡식을 뒤덮어 버릴 게 틀림없다. 그러나 잡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명의 위기를 맞는다. 밟히고 뽑히고 불타 없어지기 일쑤인 것이다. 곡식을 지키는 방파제가 논두렁, 밭두렁이라면, 대하大河의 강물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둑이라면, 잡초는 그 두렁과 둑을 지키는 파수꾼인 것이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향기로운 꽃이나 미소 띠는 백발의 노스탈자가 아니라 처절한 생명력의 잡초 같은 분이었다. 한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선생에게 느끼는 사랑은 이러한 생명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해결된다면 이 세상에는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삶이란 알고 보면 낮과 밤처럼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그는 다시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을 삶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는 말이 되겠지만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죽어서도 살 수 있다.

― 《그래도 우리는, p.232, 과 사

 

창원대 사학과 겸임교수

전 경남신문 상무이사

남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