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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소리들
—손정란, 유명숙의 수필
강외석 문학평론가
1. 울림의 글쓰기
수필은 거창한 글쓰기가 아니다. 작은 것, 사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수필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그 깊은 내막은 작고 사소한 것이 곧 세상을 움직이는 큰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수필은 인간적인 주변의 일상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정조준하여 꽂는 글이다. 그 시선은 결국은 탐구와 발견의 눈이다. 그래서도 수필은 창작이다. 창작invention은 라틴어로 inventio인데, 그것은 ‘생각이 떠오르다’ 혹은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 사실 따위를 찾아내는 것 곧 탐구와 발견의 뜻이다. 따라서 창작은 어떤 대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숨겨져 있거나 은폐되어 있던 것을 발굴해내는 것인 만큼 소중한 인식 행위인데, 작가는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명민하게 발견해서 그것을 감추거나 숨기는 일을 한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탐구하여 발견한 것을 재발견하는 행위인 것, 이때의 발견은 사연의 읽음이고 속내의 명쾌한 밝힘이다. 마땅히 그 맨 밑바닥에는 울림의 소리가 잠재해 있다. 수필은 결국 울림의 소리의 출처를 찾아 울림의 사연을 듣고 본 그대로 쓰는 글쓰기로 정의된다. 수필이 시나 소설에 비해 우월한 영역을 제시하라면 바로 이 울림이라는 고유 영역이다.
2. ‘찔레꽃머리’ 열전列傳 혹은 생명의 봄날
초가을이 시작되는 구월 말경에 우송된 손정란의 《찔레꽃머리》(선우미디어, 2021)를 읽곤 그 울림의 소리를 듣는다. 제명인 토박이말 “찔레꽃머리”가 진한 여운을 날리며 다가온다. 수필집의 체재도 그렇다. 목차를 보면 작품별로 4부로 묶어 각기 제목을 붙였는데, 〈열두 송이〉, 〈열한 송이〉, 〈열한 송이〉, 〈열세 송이〉의 특이한 제목이 그것이다. 처음엔 갸우뚱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제목은 꽃이나 열매를 세는 단위인 ‘송이’를 통해 한 편 한 편의 글이 ‘송이’라는 식물성의 강한 생명력을 환기하는 효과를 제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글 한 편 한 편을 찔레꽃머리에 피는 꽃 한 송이의 생명의 존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사전에 꽁꽁 갇혀 숨이 틀어 막힌 토박이말을 대거 가동시켜 생명의 언어로 되살리면서 한 편 한 편의 글에 생명성을 드높인다. 나름 독자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글쓰기 기획이다.
그런 기호성의 ‘송이’에 주목하게 되다 보니 내 읽기 대상의 글로서 〈땅빈대〉가 가장 먼저, 그것도 〈땅빈대〉의 첫 대목인 “풀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곰파보면 사람살이와 많이 닮아있다.”라는 언술이 강한 인상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놀랍게도 이 언술에서, 이방원이 자연 현상에서 인간 삶의 원리와 이치를 발견, 접목하여 정몽주를 회유하려 지었다는 〈하여가〉의 “만수산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ᄒᆞ리/우리도 이ᄀᆞᆺ치 얼거져 百年까지 누리리라”는 대목이 환기되어 겹친다. ‘만수산 드렁츩’이라는 자연물과 ‘우리’로 지칭되는 인간이 일종의 계열축의 원리에 따라 그 관계의 논리가 등가적이라는 것인데, 〈땅빈대〉의 그 대목과도 등가적 논리가 성립된다. 풀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사람살이는 두 개의 계열이 하나의 축으로 통합됨으로써 등가적이다. 이 등가의 원리가 곧 유사성의 원리 그러니까 은유가 되는 것이다. 손정란의 수필에는 풀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빗대어진 사람살이가 무수히 창작, 장착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각각의 기표로서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병렬로 늘어선, 일종의 평행성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풀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곰파보면 사람살이와 많이 닮아 있다.”는 언술에서 ‘풀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풀들에 유추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한 그의 작품들인 것이다. 그것이 곧 사람살이와 닮았다고 통합시킴으로써 그의 전언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일종의 열전列傳이다. ‘열전’ 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부상되는데, ‘사기史記’하면 본기本紀 기술이 주인데, 그는 왜 본기本紀 기술에 이어 부副이자 차次격인 열전을 지었을까. 사마천은 바른 것을 북돋우고, 재능이 뛰어나며, 자신에게 주어진 때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우는 사람들을 위해 열전을 짓는다고 했다는데, 열전의 대상 인물들의 전기가 사람살이에 있어 영원히 역사적인 귀감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비단 높은 지위의 이들만이 그럴까. 사마천의 열전의 대상은 백이숙제와 관중 안영을 비롯한 노자 한비자 등 역사적 명망의 인신人臣들임에 반해 손정란의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은 인신과는 무관한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 가령,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자매, 보릿고개를 넘어가면서 고되고 힘든 삶을 살았던 이웃들이다. 그래서도 그의 열전은 열전의 관습적인 틀을 깬 셈이다. 열전의 기존 틀은 당연히 사마천의 열전이다. 사마천의 열전이 상층 계층들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의 틀을 제시한 데 반해 손정란의 열전은 어쩌다 인간의 연을 받아 태어난, 잘난 것도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크게 주목되지도 주목받지도 못하는 흔한 사람살이지만, 그러나 절실한 삶의 틀인 것이다.
다음 대목은 열전의 텍스트 계기를 시사하는, 사람과 풀의 다층적이면서 등가적인 계열축의 관계가 표명된 언술이다.
ⅰ) 사람살이와 닮아서 그런지 앞차게 살아가는 풀도 있고 그저 작은 크기로 살기를 꿈꾸는 풀도 있다. ⅱ) 어뜩비뜩 어긋나기도 하고 얼랑누굴랑이 없어 어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ⅲ) 자신만의 잡 도리를 세우기도 하고 애면글면 밑바닥을 기면서도 어우렁더우렁 산다. ⅳ) 앙살하는 것이 싫어서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제살이로 사는 풀도 있다. 돌봐주는 사람 없이도 앙세게 살아간다. (※로마자는 필자 임의로 붙임)
—〈땅빈대〉에서
사람살이는 대략 위의 몇 가지 풀의 생존 형태로 가름된다. 그런데 《찔레꽃머리》의 열전형은 주로 ⅰ)과 ⅳ)의 형태가 압권이다. ⅱ)와 ⅲ)의 삶의 형태는 가장 보편적인 유형으로, 물론 압도적이지만, 개개인의 성격으로 인한 것—ⅱ의 경우는 열전의 항목이 되기는 어렵다—이거나 텍스트화하여 탐구하기는 가치 부여가 어려운 삶—ⅲ)에서 ‘애면글면 밑바닥을 기면서도 어우렁더우렁 산다’는 대목은 줏대 없이 쓸려가는 삶의 태도가 연상되어 그렇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일독한 뒤 가치 기준에 부합되는 인상적인 열전은 〈주름살〉 〈길쌈〉 〈내사 고마 오래 사랏제〉 〈들딸네〉 〈살강〉 〈풀꾹새〉 〈꽃 누르미〉 〈첫눈〉 등인데, 한결같이 열전의 기본 구도 아래 애잔하지만 건강한 삶의 사연을 전한다.
그런데 〈땅빈대〉에서 다양한 풀들에 대해 거론하면서 글 제목은 왜 ‘땅빈대’라고 붙였을까. ‘땅빈대’의 글 비중은 전체 글의 분량 5쪽 가운데에서 한쪽 분량 정도의 비중이다. 분량의 비중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제목으로 삼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나름대로 추정해 본 결과, 다음 대목에서 그 단서가 포착된다.
풀은 해 쪽으로 잎을 펼치고 하늘을 쳐다본다. 사람은 옆옆이 돌아보면서 살아가고 풀은 늘 위로 뻗으며 산다. 풀이 위로만 자라려고 하는 것은 햇볕을 맘껏 받으려 함이다. 드물게 땅에 납작 붙어 자라는 풀도 있다.
—〈땅빈대〉에서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 〈아테네학당〉(1509)을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함께 걸어 나오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각각 옆구리에 책을 끼고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데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펴 지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하늘 쪽은 플라톤의 수직적 이데아론을, 후자의 지상 쪽은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인 만큼 자연과 현실의 중요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평적 인식을 표명한 것으로 해독된다. 두 쪽 모두 인간의 삶에서 동반되어야 할 만큼 필수적이지만 사람에 따라 선택적일 수 있는 요인이다. 수평적인 포즈를 취한 ‘땅빈대’는 현실적 삶의 조건 하에서 그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보편적인 인간 존재를 표상하는 기호체이다. ‘드물게’라는 관두어를 쓰고 있긴 하지만 실은 그 경우는 통상적인 사례이다. 한국인이 그 뚜렷한 전형이다. 이 단정적 명제는 한국인의 비극사에서 추론된 것인데, 과거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황막한 중앙아시아에 내팽개쳐진 한국인들이 강한 정신력과 의지력으로 그 고난을 극복하고 민들레처럼 살아났다고 한 역사적 사실이 그 추론 근거이다. 땅빈대는 민들레의 계열체로서 ‘땅에 바짝 붙어서 기는 힘이 아주 옹골지’고 ‘어디든 뿌리만 내리면 그 자리가 제바닥’으로 만드는 강한 생명력의 존재이다.
글머리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땅빈대’의 강한 생명성을 부각시키는 손정란의 치밀히 계산된 듯한 기획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손정란 글쓰기의 백미적 요소이기도 한, 외래어 또는 외국어는커녕 우리말인지조차도 혼동되는 한자말 하나도 철저히 배제한 토박이말의 구사이다.
ⅰ) 가분재기로 뜬돈이 생기면 마침몰라 다툼으로 막서고 자리가 높아지면 떠맡는 일이 무거워진 다오. (〈말비침〉)
ⅱ) 풀은 우리에게 재없이 우꾼하게 엇선다. (〈땅빈대〉)
ⅲ) 어머니는 엇박이 자식 다섯의 끄레발을 거니채고도 주름지고 간간한 치마폭에 품으면서 정짓 간으로 들면 날면 하였다. (〈살강〉)
ⅳ) 깔맵게 다림질하여 뒷거두매 하였더니 횃댓보가 새뜻하다. (〈바늘 그림〉)
ⅴ) 물오름달과 잎새달, 푸른달에 날아왔다 열매달 즈음 대만이나 베트남, 필리핀으로 날아간다. (〈발맘발맘 걷다〉)
ⅵ) 멸치젓 푹 곰삭는 오지그릇, 된장독과 자배기, 옹배기와 중두리, 바탱이와 버치, 두멍에 아무 때라도 어머니의 손길이 머문 빛살이었다. (〈가지무늬 항아리〉)
눈에 불을 켜고 애써 찾지 않아도 《찔레꽃머리》를 한 장씩 넘기면 그냥 쉽게 접하게 되는 토박이말이다. 토박이말은 정체성이라는 뿌리 의식이 강한 언어인데, 물론 읽기는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사전을 옆에 두고 하나하나 뜻을 찾아서 읽지 않고서는 낱말에 대한 이해도 그렇지만 글의 맥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읽기의 과정이 더디고 힘들긴 한데, 그 힘듦은 어째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우리말이 이렇게 풍요롭다니, 내 언어의 빈약함을 통째로 폭로하고 있는 손정란의 놀라운 토박이말은 한 마디로 우리 언어의 자산이 곳간을 넘치도록 넉넉함을 알려주는 미디어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젠 일상어로선 폐기되거나 불사용 또는 미사용으로 인해 사전 속 언어 곧 죽은 말이 되어버린 그 말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재적소에 딱 맞게 그 말을 부려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일상어 수준으로 자유자재로 부려쓰고 있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그래서도 땅빈대 같이 강하고 질긴 생명력의 존재가 바로 토박이 순우리말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나아가 우리 삶의 질긴 생명력으로 유추되기도 하면서 비약된다. 그의 수필은 이것만으로도 그 소중한 값어치가 충분히 매겨진다. 여담이지만 생뚱하기도 한 물음이 하나 솟는다. 만약 훈민정음이 여성들이 아니었으면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살아남았을까. 그 가능성은 거의 무無에 가깝다. 당시 양반사대부로 통칭되는 지식인 남성들은 훈민정음을 폄훼하여 철저히 외면하거나 도외시하고 오로지 한자 코드에만 집중했던 것, 만약 남성들에게 훈민정음을 지키라는 신명이 내려졌다면 되레 그것을 철저히 죽여 지금의 한글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당대 쟁쟁한 문인이었던 박지원이나 정약용도 한글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지금 다행스러운 일은 토박이말을 구사하는 손정란 역시 여성이라는 사실인데, 그가 있는 한 위기 국면에 처한 우리말은—우리말은 현재 위기 국면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우리말을 지켜야 마땅할 방송사에서 자막에 외국어로 도배를 하거나 국적 불명의 뜬금없는 조어 등을 만들어 우리말 훼손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그 위기를 버티고 헤쳐 나갈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다. 그 문제는 인내심에 관한 것인데, 과연 그 인내심이 언제까지 지속되느냐에 대한 우려가 배인 관심의 촉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손정란의 글에는 토박이말이 일상어 수준으로 부려지고 있는 바, 그들을 조우할 때마다 인내심을 가지고 사전을 찾거나 인터넷을 검색해서 읽느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선 토박이말이 나타날 때마다 부지런을 행하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포기하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인내심이 강한 독자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부친다. 죽어가거나 죽은 말의 과정을 밟고 있는, 마땅히 되살려야 할 좋은 우리말은 사전을 뒤지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인내와 수고로움을 통해서만 재생의 길을 밟을 수 있다는 당위성을 부친다.
사투리와 입말의 형식이 그대로 교합되어 있는, 이른바 구술적 언어 형식이 강한 텍스트인 〈내사 고마 오래 사랏제〉에 눈길이 간다.
인자는 심이 드러 일도 몬해 묵것서. 다덴기라. 무다이 흑내가 나는기 땅이 부리는 기지. 아홉 살 때부텀 삼 삼고 열서너 살부텀 품엣시하고 날마당 지심이나 메고 일만 시킷서. 핑상 지심만 멧서. 울 아바이가 내한테 글이나마 쪼맨 갈치주시믄 우뜩케든 배와갓고 글벵신은 면햇을낀데. 상골짝에 서 크서이 핵교도 몬갓지 머. 허연 옷은 가매솟에 불떼가 재물을 내가주고 칼커리 빠라 입엇제. 직 금 사램들은 그란거 다 모리제. 고르케 사러서이 운제 머 글짜 디다볼 여가 잇거더나.
—〈내사 고마 오래 사랏제〉에서
한평생을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의 사연이 혼잣말 투로 발설되고 있다. 무학에 슬하에 자식도 없다. 남편은 세상을 떠난 지 십 오륙 전이다. 시쳇말로 부부간의 정은 ‘든 정은 읎시도 난 정은 잇’는 관계이다. 든 정 난 정 운운의 이런 말투는 실은 부부 관계가 그다지 썩 원만하거나 사랑이 오가는 관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미와도 우짤 수 읎제. 곡 다햇지 머.’와 같은 말이나 ‘내 고상 찌지리 시킷서도’ 같은 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냥 함께 애정이나 사랑도 없이 살았다는 말의 에두른 표현이다. 시집가기 전에도 친정 아버지는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했고, 그래서 바깥 세상이 어떤지는 전혀 모르고 시집을 왔다가 “버부리 삼 년, 기머구리 삼 년, 봉새 삼 년”의, 지금으로서는 기막힌, 그러나 당시로는 전형적인 시집살이를 했다. 그 기막힌 시집살이가 구술체의 언어 형식으로 십분 효과적으로 적절히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수필이라는 것은 사상이나 정조 등이 기묘하게 개인적이며 때에 따라서는 시의 경우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거의 서정적인 표현을 지니고 있으며 그 표현이 서정시에서처럼 어떤 통찰이나 직관적인 독특한 표현이기 때문에 거기에선 이야기하는 방법 속에 이야기된 의미가 절반쯤은 내포되고 있다 는 사실을 생각해야 될지도 모른다.
—어윈 에드만, 《예술과 인간》에서
수필은 그 표현이 “어떤 통찰이나 직관적인 독특한 표현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방법 속에 이야기된 의미가 절반쯤은 내포되고 있다”는 에드만의 발언은 〈내사 고마 오래 사랏제〉의 독특한 이야기체를 해명하는 데 적절하다. 통찰과 직관적인 표현인 구술체의 사투리와 토박이말의 교합 구사와 같은 이야기 방법은 그 속에 이미 그렇게 이야기하는 의미가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소쉬르는, 가장 긴요한 것은 구술로 하는 말이며, 구술로 하는 말이 모든 말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근저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는데, 구술적 성격이 강한 〈내사 고마 오래 사랏제〉는 소쉬르의 말에 그대로 적용된다. 언어의 구술성으로는 한 지역의 말 곧 사투리를 들 수 있고, 다음으로는 토박이말이다. 사투리나 토박이말은 외국어가 끼어들거나 혼성될 여지가 원천적으로 배제된, 순수한 정체성의 미디어인 셈이다.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명쾌한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대체로 언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글자로서의 언어보다는 입말로서의 언어의 성격이 압도적이다. 그래서 언어는 글자보다는 말 곧 구술에 의존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찔레꽃머리》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발화시를 기준으로 한 시제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행위태들이 지금 현재 발화시를 중심으로 현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형은 지금 현재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손정란의 수필은 비록 그 소재가 과거일지라도 발화시에 맞춰 현재형이다. “나는 문학의 참됨을 데알면서도 잘 아는 척, 어제도 내일도 글을 쓴다”(〈텃밭을 읽다〉)를 보면 어제일 경우, ‘썼다’로, 내일일 경우, ‘쓸 것이다’로 해야 하는데, 모두 ‘쓴다’이다. 그와 같은 시제형은 무엇을 뜻할까.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불연속적으로 나누었지만 실제로는 연속적이다. 시간의 본질이 그렇다. 그것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의 제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오래된 미래’는 ‘오래된’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연속성의 층위에서 통합시킨 기호체이고, 그 통합의 시간대는 곧 현재이다. 시간의 진행형은 인식의 표시이다. 과거의 지속에 대한 인식이 현재인 것으로,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 곧 시간성에 대한 뚜렷한 인식인 것이다. 가령, 〈길쌈〉의 경우, 길쌈이라는 과거 수공적 노동을 통해 어머니의 신산한 삶을 읽어내고 언어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철저히 현재형의 시선이다. 현재화됨으로써 어머니의 신산한 삶의 현장감이 절감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글의 주체는 길쌈으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삶을 직접 또는 간접 경험하는 형식을 통해 어머니의 삶에 최대한 근접하여 깊은 인식을 거쳐 제대로의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수필의 시제는 테제나 중심 제재에 대한 현재적 접근이 가장 제대로 된 얼굴이다.
《찔레꽃머리》에서 송이 송이의 삶들은 대체로 손정란 특유의 감성에 바탕한 유려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토박이말을 장착하여 인간적 가치를 지닌 고도의 언어적 연행을 연출하고 있는 점은 그만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수필 세계의 특징이다. 《찔레꽃머리》는 생명의 봄날이니 봄날의 생명을 탐구한 열전을 대상으로 한 울림의 소리 편이다. 앞으로도 또 새로운 ‘열전’으로 울림의 소리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대를 부친다.
3. ‘희망꽃’ 열전 혹은 관계의 미학
한여름이 서서히 걷히는 구월 첫날에 우송되어온 유명숙의 《희망꽃이 피었습니다》(책과나무, 2021)에서 단아한 울림의 소리를 경청하였다. 제명에서부터 수필의 전체 흐름이 시사되고 있다. 그 흐름의 핵심은 인간의 선하고 아름다운 행위, 그리고 긍정과 희망의 세계관, 그것이다. 그래서 일언하면 ‘희망꽃 열전’이다. 희망의 빛이 되는 현상 세계의 주체가 어디 특정한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밝은 눈의 주체에게만 허용되어 일상의 주변에 두루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 밝은 눈은 《외디푸스 왕》에서 소포클레스가 낳은 티레시아스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눈인데, 그는 장님이지만 진실을 꿰뚫어보는 힘은 눈 뜬 외디푸스보다 훨씬 강하다. 글쟁이로 통칭되는 눈이 티레시아스의 눈일 것인데, 그런 눈의 글쟁이는 안타깝지만 극소수에 불과한 실상이다. 인간의 삶의 진실은 건강한 것일 것, 진실은 건강하기에 절망과 염세가 아닌 긍정과 희망의 세계관일 것, 그 세계관의 소리가 유명숙의 수필을 읽는 내내 배음으로 들린다.
그의 수필은 제목부터가 ‘희망꽃’답다. 목차만 훑어보아도 수필집의 제명이기도 한 〈희망꽃이 피었습니다〉를 필두로 〈도토리묵이 놓아 준 다리〉 〈사랑이 익어가다〉 〈애인이 생겼어요〉 〈걱정 대신 염원을 심다〉 〈화로, 삶을 데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당신의 날개돋이를 기원하며〉 등등, 넘기는 족족 제목에서부터 ‘희망꽃’이 선연히 발견된다. 가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의 경우, 두 개의 성분에서 앞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무언가 불길한 사건을 전제하면서 그것의 치유와 극복의 전언을 동시에 알리는 상용구이다. 그 뒤의 ‘오늘도’는 그것에 호흡을 맞춰 강단으로 내딛는 행보를 시사한다. 다른 글의 제목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독되는데, 내가 굳이 ‘희망꽃 열전’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이다.
특히 ‘희망꽃 열전’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희망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하여 〈골목 끝 학교에는〉 〈새싹 유치원〉에는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유치원생들이 등장한다. 유치원생은 유명숙 수필가가 그들을 대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활동’을 하는 관계로 자주 등장하고, 그래서 그의 눈에 깊고 은근하게 포착된다. 〈골목 끝 학교에는〉도 제목에서부터 희망의 기운이 감지된다. 좁고 긴, 그래서 미로의 인상이 강한 골목 끝에 있는 학교라는 해석이 이상하게 ‘고생 끝에 낙’이라는 속담과 대응 체계가 되는 듯한 인상의 제목에서 낙관적이다. 학교의 주체는 어린이이고, 세대 의식으로 보면 어린이는 미래적 존재이기에 어린이는 작가가 내세우는 희망꽃 캐릭터인 셈이다. 노발리스의 말이 선히 기억된다. “어린애처럼 구김이 없는 바로 그런 소박함이 우리의 세속적인 일들의 미로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훨씬 더 확실하고 올바른 길을 알려 주지 않을까요?” 13세의 소녀 소피를 사랑하고, 소피를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보기도 했던 그이기에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어린이들에게 집중하는 유명숙과 서로 소통되는 노발리스의 말이다.
유명숙의 수필 세계에서 ‘희망꽃’ 전언과 맞물리면서 주목되는 목록은 관계라는 프레임이다. 관계는 반드시 만남이라는 미학을 전제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 이해와 배려가 우선시되는 관계의 미학은 “삶은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당신의 날개돋이를 기원하여〉)이라는 명제에서 명시되는데, 그 관계는 가장 먼저 인간과의 관계일 것이고, 이어서 자연 세계와의 관계가 그 뒤를 받친다. 관계의 미학이 절실성을 확보하는 것은 현금 나타나고 있는 이웃의 실종 사태에서이다. 지금 시대는 이웃이 사라지고 없는 시대이다. 비단 이웃 실종의 대표적 공간인 아파트가 아닌, 개인 주택에 산다고 해도 이웃은 찾기 어려운 시대이다. 원론적으로 인간이나 사회는 관계의 망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축자적이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인간人間은 혼자로서는 인간이 될 수 없고, 사회社會 역시 형성될 수 없는 일, 서로 얽히고 무수한 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 그 사실에서 관계의 우선은 소통이다. 소통은 서로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성립된다. 유명숙은 소통을 위해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있다.
소통의 관계에서 우선은 부정보다는 긍정의 정신을 갖는 일이다. 그 관계의 정신에 대한 유명숙의 다짐은 〈내 마음의 갖풀〉과 〈던짐줄〉에서 피력된다. 〈내 마음의 갖풀〉에서 글의 주체는 ‘거멀못’을 통해 인간의 모습, 곧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제 역할을 하는 집안의 맏며느리를 떠올리곤, 다음과 같이 벼른다.
거멀못은 내 안에 자연스럽게 자라 잡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색하고 민망한 곳을 붙여 아우르는 갖풀이 될 거다.
—〈내 마음의 갖풀〉에서
비단 한 집안의 ‘거멀못’ 역할을 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 바깥으로 확대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아우르는 ‘갖풀’이 되겠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중대한 선언이다. 책임성과 윤리성이 부각되는 선언으로서, 수필의 본질인 글과 사람됨의 일치성 여부가 걸린 중대 사안인 것이다. 시나 수필 장르를 앞두고 늘 꺼림칙하게 여겨 왔던 것은, 이 말을 하는 필자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글과 그 글을 쓴 주체의 삶과의 일치 여부가 늘 문제였던 것인바, 유명숙 수필가의 ‘거멀못’ ‘갖풀’ 운운을 접했을 때, 사뭇 긴장감이 동했던 것이다. 글은 일단 윤리적 선언인 셈이다. ‘거멀못’과 ‘갖풀’은 유명숙의 진실과 정체성이 부여된 언어 기호일 것, ‘던짐줄’ 역시 거멀못과 같은 위상의 기호체이다. ‘던짐줄’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다. 거친 바다에서 돌아와 접안하려는 선박을 정박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던짐줄’인 까닭이다. 그런데, 뜻밖에, 글의 주체는 ‘던짐줄’에서 한 인간의 모습, 그것도 “날렵한 던짐줄을 보면 친정어머니 생각이 난다.”(〈던짐줄〉)고 하면서, ‘던짐줄’을 통해 어머니의 역할을 충분히 상기하고 있다.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강단 있게 큰 집 살림을 꾸려나가고, 몸을 돌보지 않고 집안의 좋은 일 궂은일 마다않고 앞장서서 집안을 이끌어 왔던 어머니, 마치 항해를 마친 크고 작은 배가 ‘던짐줄’로 말미암아 쉽게 접안하여 정박할 수 있듯이 사는 동안 윗사람, 아랫사람을 대하는 푸근한 미소와 마음 씀을 통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신 어머니는 글의 주체에게 ‘별똥별 같은 던짐줄’의 존재로 부각된다. “누구에게든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던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한 유명숙은 그래서 유소년들에게 선현 미담을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활동을 하게 된다. 갈수록 단절되고 삭막해져 가는 현대 인간 사회의 ‘던짐줄’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이런 두 마음을 바탕으로 관계의 미학을 실행해 나가는 글쓰기가 행해진다. 귀촌한 지 10년쯤 된 그가 대체로 만나는 이들은 시골의 노인네들이다. 그의 이웃들인 그들에 대한 시선은 그들에게서 ‘순리의 세계’(〈무논의 하루〉) 곧 늙어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은 늙는다. 그것은 두려움을 촉발시킨다. 그 이후의 상황은 소멸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는 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다. 은발도 그렇지만, 지혜와 온화함을 갖춘 단아한 늙음은 아름답다. 그러나 대부분의 늙음은 추하다. 쭈글쭈글한 주름이 잡히고, 노인 냄새 풍기는 데에서 추한 게 아니라, 탐욕과 남을 배려하지 않는 아집과 말 많음, 추한 성욕을 드러내는 데에서 그렇다. 유명숙의 수필에서 늙음은 뜻깊다. 여든이 가까운 긍정적인 시누이의 주름을 일이 힘들수록 활짝 피우는 ‘접시꽃’ 곧 ‘아름다운 주름’(〈아름다운 주름〉)으로 인식한 것은 시누이의 삶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데에서이다.
관계의 미학은 관계의 대상을 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대상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삶의 진실성과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해 내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도 사물과 대상에 대한 그의 인식은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다. 아니, 수평을 통해 수직을 지향하기에 수직적이다. 그리고 공동체적이고 상호 연관적이다. 수평적인 삶에서 삶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동시에 그 가치 속에 수직적 삶이 배여 있다. 시골 늙은이에 대한 그의 시선의 집중은 그런 맥락선상에 있다. 그에게 있어 시골 노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일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치열한 삶을 사는 고상하고 의지적인 존재들로 인식된다. 한 마디로 〈풍경 속 한 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손도 ‘경건한 손’으로 발견된다. 시골 노인들의 손은 오랜 세월 동안 농사일에 지친 손이기에 손가락은 뒤틀리고 구부러진 북두갈고리 형태이다. 그 손의 발견은 관계 대상인 노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말미암은 것이고, 나아가 그는 북두갈고리가 된 노인의 손을 ‘삶의 나이테가 새겨’진 삶의 흔적으로 경건하게 읽는다. 이른바 ‘열전’의 형식이다.
‘누군가의 참 좋은 당신이 되고픈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참 좋은 당신〉 역시 주목되는 ‘열전’의 한 형식으로, 유명숙의 인간됨이 잘 드러나 있는 수필이다. 현대는 남을 소외시켜 타자로 만드는 세상인데, 남을 ‘당신’으로, 나아가 ‘좋은 당신’으로, 그것도 ‘참 좋은 당신’으로 명명하고 있는 〈참 좋은 당신〉은 사르트르가 가르생으로 하여금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극언하게 한 〈닫힌 방〉과 대비되는 한 판이다.
유명숙에게 있어 친구와의 관계, 친정 부모님과의 관계, 시부모님과 시누이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가 소통과 이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권태나 미움, 시기나 질투가 지배적인 불온한 관계의 사회이기에 그의 관계의 미학은 현대인의 삭막하고 단절된 관계 상실에 대한 통찰과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지팡이의 가르침〉이 그런 계기를 제공하는데, 대체로 지팡이는 불구의 몸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지만, 마음을 다잡아 세울 수 있는 목적의 지팡이도 있다는 통찰 끝에 이렇게 말한다.
쓰임에 따라 모양과 재질이 다른 여러 지팡이가 있듯이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흔들리 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말벗이 되는 것도 지팡이 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지팡이의 가르침〉에서
이런 지팡이는 ‘거멀못’과 ‘던짐줄’의 계열체로서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기호체이다. 지팡이는 이웃과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마음먹기를 벼리게 하는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지팡이에 전이된 성찰의 계기는 〈비움의 가치〉에서 발견되는데, 〈비움의 가치〉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현 시국의 현안을 나름 색다르게 해석, 긍정적인 시각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정한 거리두기는 적절한 삶의 지혜라는 것인데, 가령, 식물의 경우, “간격 두기는 땅과 그것에 밀착한 모든 식물이 취하는 오래된 살아 내기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거리두기를 겪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깨닫는다.
더 많이 비울수록 소유한 것들의 가치가 드러나고 삶의 만족감이 높아진다는 것을, 비움과 단순함 을 따르는 것은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는 삶의 방식임을. 앞으로는 비우는 일에 부지런해지고 채우 는 일에는 게을러질 참이다.
—〈비움의 가치〉에서
지팡이의 기능이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롭게 바라보기와 건강한 깨달음으로 전환되고 있다. 비움의 철학은 인간의 세속적인 삶에서 가장 실천이 어려운 단계의 것이지만 한 번은 감당해야 할 단계이지 싶은데, 가장 좋은 것은 타율적 감당 이전에 자율적 감행이다. 그래서도 ‘비움의 가치’에 주목한 유명숙의 삶은 감당이 아닌 감행일 것으로 예견된다.
유명숙의 수필은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소재 선택을 하는 편이다. 누구에게든 자신에게 과하게 넘치는 소재는 그 뒤처리가 늘 문제이다. 넘치는 소재에 대해 적절하게 소화를 하지 못하니 공허하고 허황된 소리만 남는다. 자신에게 맞는 소재를 선택하면 그 문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작가들에게 한 권고가 그것이다. 유명숙의 수필은 일단 소재 선택에서 적절하고, 소재가 적절하다 보니 그 소재를 풀어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주제에 맞게 균형되고 순조롭다. 그리고 유명숙 수필의 미덕은 건강한 인간 사회를 꿈꾼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에서
건강한 사회의 핵심은 사회적 유대와 상호 의존을 권장하는 사회라는 것인데, 유명숙이 추구하는 관계의 미학에 그대로 적실하게 닿아 있는 언술 담론이다. 지혜로운 노인은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처럼 희망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것이어야 한다. 유명숙은 희망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스스로 짓고 있다. 해마다 그의 ‘희망꽃’이 더 많이, 더 환하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부친다.
4. 인간에 대한 탐구
손정란과 유명숙의 수필 제명은 공통적으로 ‘꽃’이다. 공교롭게 노발리스가 쓴 소설도 《푸른 꽃》이다. 그가 형상화한 푸른 꽃은 누구나의 가슴속에 있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일 텐데, 찔레꽃과 희망꽃 역시 그런 그리움을 담고 있지 않을까. 물론 하나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꽃이고, 다른 하나는 관념을 불어넣은 관념적인 꽃이다. 두 수필집의 ‘찔레꽃머리’에 희망꽃 송이의 ‘열전’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서의 ‘열전’인 것이다. 한때, (지금도 그럴 것),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의 흐름을 탔다. 세상에 대한 비관이나 절망, 염세가 핵심 코드이다. 조어되어서는 안 되는 황당한 말이 어떤 이유로 조어되어 청년층에 공안처럼 오르내렸을까. 그들을 나무라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그런 말을 조어하게끔 조장한 이 사회를 먼저 따지고 나무라야 할 것이다. 상심한 그들에게 이 두 수필집을 권하고 싶다. 상심한 사회적 자아를 치유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자신에게 닥쳐진 거친 현실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필의 힘은 일상에 있다. 그런데 일상의 구체성은 하나같이 같지는 않다. 가령, 재벌급 부자들의 일상은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르다. 앙리 르페브르에 따르면, 상층 부르주아지에게는 일상생활이 없다는 것이다. 일상의 가장 중요한 목록인 고정된 주거지도 없다. 천문학적 돈의 힘으로 호사스럽게 자유로운 유랑생활과 유목생활을 즐기면서 요트에서 살기도 하고, 이 성城에서 저 성으로 옮겨 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 관점에서 탈일상의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일상은 논외로 하고 일상에 대해 논한다면, 문제는 일상은 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상이 깨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로 상정되는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거나 여행의 경우, 잠시 일상에서 이탈하지만, 오히려 일상에 대한 성찰의 좋은 계기가 되는 데 반해 일상을 처참히 박살내어 뭉개는 반인간의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경우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정상적인 궤도의 일상에서 만들어진다는 것, 그 일상이 곧 인간 사회를 지탱하고 지속하게 하는 비의秘儀 체계인 것이다. 수필이 일상의 인간 세계를 탐구하는 장르인 이유이다.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는 소설가는 거짓을 통해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려고 애쓴다고 했는데, 수필가는 일상이라는 현실의 역학을 통해 인간 세상에 대한 진실을 탐구한다.
손정란과 유명숙 두 수필가 역시 일상 세계의 역학에 착안,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꽃으로 상징되는 그리움의 소리와 건강한 삶의 열전 또는 열전 속 울림의 소리들을 발굴하여 뚝심으로 환하게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