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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선생의 은거지 백운산은 말한다
김교한 시조시인 전 김해교육장
1.
노산 이은상 문학관의 건립 사업은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마산시 당국이 이 사업의 추진에 나선 지 3년을 넘겼다. 문광부의 건립비 지원 승인이 났음에도 문학관의 명칭 문제로 장고長考를 거듭해 왔다. 노산 선생의 행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지역 의회와 방송사에서 두 차례의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노산 선생의 일제 말기의 행적에 대한 부정적 상상은 이 글을 통해 완전 해소되기를 바란다.
문학관의 건립이나 문학관의 명칭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객관적인 자료에 의거 그 이름을 제자리에 놓이게 해 주는 절차가 먼저인 것이다. 노산 선생의 행적 중 특히 어두웠던 시절 일제 말기의 행적에서 친일, 항일에 대한 논쟁은 막연하게 우겨댈 것이 아니라 그 시기의 구체적이고도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 투명하게 걸러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의 행적은 한자리에 모으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지면 관계도 있고 해서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한다.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으로 1942년 홍원경찰서, 함흥교도소에 구금되었다가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된 이후 해방 때까지의 노산 선생의 행적에 대하여 일부 사람에 의한 친일 논란을 계기로 마음 다잡아 선생의 백운산 은거에 관한 여기저기 기록을 모아, 진실 규명을 위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백운산(광양)을 여러 번 답사하여 진실이 살아 있음의 결과를 《경남문학》 2001년 가을호에 구체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발표한 바 있었다.
그 주된 내용은 노산 선생이 일제 말년에 광양경찰서에 재구금되어 옥중 생활 중 해방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 근거는 《노산시조선집》 중의 기록과 광양시 ‘진상중학교 사적비’의 관련 기록, 은거지 마을 주택 답사 등에서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노산 선생이 백운산(광양) 여러 곳을 방랑했으나 주로 오래 은거한 곳은 진상면 신황마을 황호일 님 댁과 지랑마을 김현주 님 댁이었으나 두 분 다 고인이 되었기에 황호일 님의 장남 황하운 님(77세, 전 광양시향교 전교)의 안내를 받아 두 곳 은거지와 ‘진상중학교 사적비’를 직접 보고 온 것이다.
그 뒤에 다시 광양을 방문했다.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었다. 노산 선생의 자취는 남모르게 잠들고 있었다. 두꺼운 책 속의 한두 줄의 글은 그냥 묻혀버릴 수 있고, 노산 선생을 알고 있는 한두 사람도 세월이 좀 지나면 있어 주지 않는다. 증언도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한 역사의 진실이 아득히 매몰될 위기의 시점에 서 있다. 세간에 떠도는 유언流言은 이제 엄연한 진실 앞에 조용히 잠들게 되었다. 이번 광양 방문에서 획득한 소중한 자료를 추가하여 발표함으로써 노산 선생의 일제 말기의 행적에 대한 논의는 일단 마무리 짓고자 한다.
2.
《노산시조선집》에 〈새앙쥐〉라는 단수 시조가 있다.
혼자 앉아 조용하매 빈 방인 줄만 알았던지
새앙쥐 새끼 기어 나와 까불댄다
바시락 소리도 못 내고 숨소리마저 죽여준다.
광양 칠성리에서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조를 보면서 백운산 밑 진상면 신황마을과 지랑마을 외에 광양읍 칠성리에서도 은거한 사실이 짐작되어 다시 더 심도 있는 광양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
1938년 노산 선생이 조선일보를 나온 후 해방 때까지 백운산 밑에 8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으며, 두 차례 일제에 구금 옥중 생활을 해 온 사실 등을 고려해 볼 때 새로운 자료를 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지난해 12월 21일 창원역에서 열차를 타고 또다시 광양을 찾았다. 광양은 이제 친근감마저 들었다. 광양에서 새로 발견한 것은 노산 선생의 행적을 입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자료였다. 《광양군지》와 《이경모 사진집》이 그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다.
1983년 광양군지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광양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노산 이은상 선생에 관련된 해당 기록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1. 解放과 政府樹立
해방 당시 光陽의 여러 상황에 대한 객관적 파악은 좀더 시간이 흐른 뒤에 다각적이고 신중한 검토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 이른바 좌파와 우파의 활동과 그 활동의 목적이 각각 달랐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1945년 8월 16일 鷺山 李殷相(1938년부터 광양에 은거하여 광양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음)을 중심으로 우파의 한 단체가 성립되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상황은 좌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治安의 무방비 상태에서 여러 단체가 결성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측은 8월 17일 오전 10시, 합동으로 光陽西國民學校에서 郡民大會를 열었다.
—《광양군지》에서
노산 선생이 1938년부터 광양에 은거하여 광양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이한 생생한 증언의 진본이 여기 있었다.
《이경모 사진집》은 1995년 10월 출판사 ‘눈빛’에서 간행한, 1945년에서 1995년까지 찍은 사진을 모아 해설을 붙인 사진첩이다. 이경모 님은 1926년생으로 광양에서 생장한 사진작가로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한다. 제9회 한국사진대전 심사위원장(1990년), 화관문화훈장 수훈(1992) 등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경모 사진집》 중에서 노산 선생에 관련된 기록을 발췌해 옮겨 본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양경찰서 무덕전에서 노산 선생이 참석한 시국수습 군민회의 장면 사진도 사진집에 적혀 있는 해설 그대로 복사해 붙여본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과의 인연
필자가 본격적으로 사진계에 발을 딛게 된 계기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광양 지방의 유지였던 아버님의 심부름으로 밤이면 가끔 손가방이나 배낭에 쌀을 담아 광양읍 칠성리에 있는 일본 큐슈 제국대학 연습림 사무소(현 서울농대 실습림) 뒤쪽에 있는 아주 작은 세 간짜리 초가집에 갖다 드리곤 하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안 일이었지만 이 분이 바로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셨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선생은 광양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셨으며 해방 후에 전남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 광주로 올라가셨다.
—《이경모 사진집》에서
노산 선생이 일제 말 8년간 백운산 밑에 은거 중 광양읍 칠성리에서도 은거한 사실이 밝혀졌다. 노산 시조 〈새앙쥐〉에서 본 칠성리가 바로 이곳이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이경모 님은 어릴 때 부친의 심부름으로 밤에 쌀을 갖다 나른 인연으로 해방 후 노산 선생의 배려로 호남신문(광주일보 전신) 사진부장 직을 맡게 되어 사진계로 진로를 정했다는 것이다.
3.
2002년 3월 25일 다시 광양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광양읍 읍내리 거주 이용학 님(79세 전 교육장)을 만나게 되어 백운산 답사는 끝을 맺게 되었다. 노산 선생이 은거한 칠성리 주택을 알고 계신 유일한 분이었다. 노산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부친이 경영하는 한의원에 가끔 다녀 가시고 해서 알게 되었으며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고 했다. 이용학 님이 전북 고창보고에 다닐 때라고 했다.
이용학 님의 안내로 칠성리를 찾아갔다.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인은 장차남(79세) 할머니였다. 아직 건강하였으며 해방 후 노산 선생의 집을 인수하여 계속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나지막한 슬레이트 3칸 집이나 그 당시는 초라한 초가집이었고 조그마한 갓 방이 노산 선생이 쓰던 서재라 했다.
이용학 님은 말했다. 노산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받아온 민족 운동가로 알고 있다고 했다. 해방 직후 노산 선생의 지시를 받고 태극기를 여러 개 만들어 갔더니 광양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군민대회 때 나누어 주어 사용하게 한 것과 노산 선생이 단상에 올라 강연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친애하는 군민 여러분”을 외쳤을 때 감동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노산 선생의 일제 말기에서 해방 때까지의 행적은 광양의 현전 기록물에서 그리고 그 당시 인연이 있었던 생존 인사 두 분(황하운 님과 이용학 님)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노산시조선집》 중의 시조 제목 〈獄中吟〉의 서문(자료 1)과1) 노산 선생이 쓴 ‘진상중학교 사적비’의 비문(자료 2)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① 1938년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나온 후부터 해방 때까지 백운산 및 광양을 중심으로 은거 생활을 했다.
②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으로 1942년 12월 홍원경찰서, 함흥교도소에 구금되었다가 1943년 9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다시 백운산 밑에 은거하였다.
③ 일제 말년에 다시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중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1945. 2. 2~1945. 8. 15).
④ 1945년 8월 15일 오후 광양경찰서 무덕전에서 시국수습 군민회의를 열었다.
⑤ 해방 직후 광양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양군민대회에서 강연을 하였다.
⑥ 지금까지 드러난 은거지는 백운산 밑 신황마을과 지랑마을 그리고 칠성리였다.2)
4.
노산 선생과 광양(백운산)과의 관계는 참으로 두텁고 믿음으로 차 있었다. 인연 깊은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광양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광양은 그토록 해방 때까지의 생생한 선생의 자취를 기록으로 또 기억으로 말해 주어 부정적 가상假想을 잠재웠다.
특히 일제 말 1943년 함흥교도소에서 나온 후 해방 때까지의 노산 선생의 행적에 대하여 구체적인 문헌을 중심으로 그 객관적인 자료가 말해 주었다. 노산 선생은 항일 애국의 길을 걸었고, 민족 문학을 지킨 거목이었다. 선생이 남긴 수많은 산문과 2,000여 수의 시조에서 한결같은 줏대가 그것이었다.
언젠가 훗날 유서 깊은 가고파의 노비산에 노산문학관이 건립된다면 단순한 보존과 전시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지역 문학인 전체의 활동 공간과 청소년, 시민의 문화 휴식의 무대로 활용되는 생기 있는 문학관으로 운영되기를 바랄 뿐이다.
백운산(광양) 답사를 위해 남도의 동서를 다섯 번 왕래하였다. 노산 선생의 은거지 백운산 답사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꺼내 주신 광양의 유 선생님,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 황하운 님, 이용학 님 그리고 주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밖에도 관련 자료가 더 있지만 지면 관계도 있고, 조금은 아껴 두는 것이 어떨까 하여 다 수록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노산 선생의 시조 〈백계산 동백림〉을 붙인다. 광양의 〈마을 유래지〉(1988년 간행)에서 캐내었다. 시조집에는 보이지 않는 작품이다.
백계산 동백림
이은상
백계산 동백림3)에 봄이 하마 어지렸다
가슴속 옛 기억이란 이리도 쓰라린 건가
동백꽃 백년 핀데도 내사 어이 보겠나.
백계산 동백림에 꽃 한창 피거들랑
그대들 부디 와 눕고 앉고 거닐어 보세
내 차마 못 보는 뜻을 그제사 짐작하리.
—《경남문학》 59호(2002. 여름)
●참고자료
《노산시조선집》, 《광양군지》, 《마을 유래지》
《광양문화》, 《한글학회 50년사》,
《이경모 사진집》, 진상중학교 사적비 등
단행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