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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시론의 작시 실제

 

전문수/ 문학평론가 창원대명예교수

 

 

농부가 토지(공지)에 농작물을 재배하는 실제처럼 시인도 백지(공지)에 시()를 재배하는 방식을 통해서 작시를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시적 인식 형식을 구안해 보고자 한다. 이 세상 천사만물을 이해하는 인간은 반드시 일종의 인식 형식을 다양하게 가져야 하는데 가급적 보다 효율적인 그런 인식 형식을 통해서 인간 서로 간 소통이 좋은 방식과 원리를 구안하는 차원이라 생각해 본다.

그간 우리는 문예창작 개론서들이 많아도 실제 글쓰기 능력 향상에 그리 큰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오랜 강단에서 느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쉽게 작시법을 누구에게나 이해시키는 논리(형식)를 생각하면서 이미 제시한 앞 선 백지시론을 보다 더 쉽게 부연 해설하면서 이 작시 론을 전개해 가 보고자 한다. 우리는 끝없이 기존 방식에서 보다 좋은 새로운 길을 찾아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실행해 보는 것이다.

백지란 색채의 한 계열로서의 흰 종이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누차 강조해 왔다. 백지는 우주라느니 마치 토지의 공지(空地)처럼 공지(空紙)며 동시에 공지(空地)라고 주장 해왔다. 밭이란 공지에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심의 간절함처럼 공지에 시심을 심어서 가꾸는 장소가 바로 백지란 뜻이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하 우리들이 사는 현상계의 천사만물은 이상계에 존재하는 이데아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라고 하고 끝없이 그 이상계의 이데아를 지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현상계의 모든 고통과 미완성은 이 이데아에서 멀어져 있어서 그렇다는 것인데 플라톤의 아카데미즘은 이래서 생겨난 것이다.

화가들에게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은 그림의 소재이다. 이와 똑 같이 문인들에게도 모든 작문의 소재이다. 그러나 이를 그리거나 글자로 글을 만들어 백지(공지)로 옮기는 것은 실제 토지에 생명체로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기에 실물이 아닌 종이 란 공지의 사진 같은 가짜이다. 그래서 이를 플라톤은 이데아 모방에서 한 단계 더 멀어진 현상이니 이는 해악한 일로 보고 특별히 시인 추방론을 내 놓았다. 그림은 종이 위의 가짜라도 어느 정도 외형은 진짜에 유사하지만 시는 시인의 생각을 함께 듬뿍 덧붙이기에 더 가짜라고 본 것이다. 물론 그 후 시가 더 이데아에 접근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수정됐지만 실제로 빈종이 위의 말로 만든 가짜 실물임은 맞다. 원예 작물 재배는 공지에 이들을 심거나 잘 배치하고 이를 관리하면 현상계의 실물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를 예술세계로 보지 않는다. 이 실제 사물들을 그림이나 글쓰기는 백지란 공지에 실물을 옮겨 심을 수가 없음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통한 문장으로 다시 백지에서 길러 내는 재배법(예술적 기법)을 통해 얻은 것만 예술계로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사물의 진짜 실체는 우리들 예술 정신이 달려들지 않고는 이상계의 이데아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철학의 3대 영역 중 한 중앙의 것으로 보았다.

단순한 원예는 아마 보편적 제1철학이 될 것이다. 2철학은 시학이 될 것이고 제3철학은 형이상학적 이론 철학이 될 것이다.

농부가 실제로 작물을 기르는 것은 순수 농부의 창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연의 법칙이 주인이고 그저 보조자이기에 예술적 차원과는 너무 먼 지식 차원의 재배 기술이다. 따라서 생산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철학 내용의 수준이 전혀 다르다. 토지의 공지와 백지의 공지의 근본 차이를 확실히 알게 된다. 농지에 생물을 재배하는 노력과 백지에 시를 재배하는 노력과 기법은 달라야 한다. 그러나 비록 재배법이 다르더라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철학하는 인식의 구조는 같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제 시인도 시를 백지란 공지에 진짜 식물처럼 재배하는 시작 농부가 되는 것이 옳다고 본 것이 본고이다.

시인이 시를 제멋대로 만든다는 아주 잘 못된 저간의 생각을 이러지 않고는 시의 정도를 찾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시는 사물(구체적 존재)을 시의 작물로 가꾸고 길러서 그 실체를 진정으로 이해는 노력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그야말로 백치에서 백지를 다루는 어리석음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불완전한 현상계의 식물의 실제 재배보다 더 이데아에 접근한 실체를 길러서 백지에 옮기는 특수한 시인 농부가 돼야 한다. 만일 지금처럼 많은 어떤 작시들처럼 식물의 외형이나 여러 형상들을 그대로 글로 옮긴다면 전혀 이데아 실체에 조금도 접근 못한 가짜 시인이 될 것이다. 실제 농부와 다를 바가 조금도 없다.

요즈음 필자가 너무 실망한 것은 소위 유튜브 라는 방송으로 신춘문예 시를 해설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시를 보는 기본에 소홀한가 하는 것이었다.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시를 쓴 사람보다 그 차이가 더 심해서 너무들 한가고도 생각 했다. 시가 인식하는 기본 형식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물의 기본구조를 모르는 것과 똑 같다. 사물의 생성구조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시가 존재 실체를 붙잡아 내는 기본을 알 것 같아서 차제에 시적 재배법을 더 구안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백지란 공지는 시인이 사물의 실체를 사물의 생성 기본 구조를 토대로 시를 길러 내는 토지이다. 그래서 이번 글은 특별히 2021년 신춘문예 시들 중 서울 신문 <최초의 충돌>에 대한 시를 해설 해 보기를 제세해 두기로 했다. 유튜브의 해설들과 반드시 비교해서 시를 보는 눈을 모두 길러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1. 백지 공지의 다양성 이해

 

그런데 이 백지란 공지는 실로 다양하고 그 공지의 성격에 격이 있다는 점을 또 다시 인식해야 한다. 우리들이 접하는 백지의 공지 이전에 앞선 단계에 공지들이 매우 다양하게 더 있다는 것과 그에 따른 그 공지의 단계적 자격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현재 접하는 백지는 원래의 진짜 공지를 대신해 주는 인공 제작 공지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사물의 실체를 길러 가꾸는 곳의 공지 즉 텃밭은 역시 사물이란 원재료의 공지가 이미 먼저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원재료로 하는 목수는 나무가 바로 공지이고 백지이지만 시인은 살아서 숨 쉬는 사물들을 원재료 토지의 공지로 사용하기에 거기서 일단 새로운 실체를 길러 가꾸어 다시 언어로 인공 백지의 공지로 옮겨 놓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인공백지로 옮길 때에는 사물의 실체가 사물의 공지에서 다 자라 난 그 때이고 백지 공지로 옮기면서 더 문장을 잔손질하여 실체를 보다 절실하게 느끼도록 형상화한다.

아주 알기 쉬운 간단한 예를 하나 보기로 한다. <인생>이라는 누구나 겪는 사물 현상을 공지로 보고 오랜 시간 거기서 인생의 실체를 찾기 위해 생각을 재배하여 길렀는데 그 결과 인생은 한정된 시간 내의 그네라는 것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고 전달 효과를 높이기 위해 표현을 잔손질 한 형상 작업을 한 것이 다시 인공 백지라는 공지로 옮겨졌다. 드디어 백지 위에 그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란 한 구절이 옮겨졌다고 보자는 것이다. , 이런 간단한 표현 한 구절 작업을 두고 그리 복잡하게 단계를 나누며 중언부언하는 해설하며 난리 치느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날 저 문장론들의 주장처럼 많은 원리를 들면서 표현력이야 말로 작시의 생명이라고 하지만 이런 표현의 심층에 자리 잡은 사고 과정과 사유 체계를 깨닫게 되면 작문의 천리를 금방 깨닫게 되고 무한히 다른 사물의 실체를 찾는 길에 전이가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인식형식을 하나 완전히 익히면 역시 별 것 아닌 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백지의 공지가 우주라고 굳이 깊은 뜻을 둔 것은 모든 사물이 다 백지의 공지 역할을 하고 거기다 새로운 사고를 길러 온 시인은 다 자란 사고를 비로소 전달용 백지로 옮겨 발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지는 겉만 백지이지 그 백지는 사물의 수만큼 다양한 색채의 백지인 것이다. 그래서 제 1차 백지 공지는 사물이고 제2차 공지는 다 자란 사유의 백지 공지로 작시가 살아서 숨 쉬는 각종 색체의 생명체 공간이다.

여기서 또 다른 작품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고자 한다. 머리 아픈 원리 해설보다 아주 이해가 쉬운 실제 작품 예가 될 것이다. 서 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는 아마 누구나 다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국화(사물)를 시적 사유의 공지로 보고 국화의 새로운 실체를 찾아 고된 시간을 보내며 시를 가꾸기 시작 했다. 국화의 생물학적 재배는 농부의 일이고 시인은 시작 기르는 공지(토지)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봄이 되니 소쩍 새가 울었다. 이때 국화는 소쩍 소리로 싹이 트고 소쩍 새는 국화를 위해 운다는 두 사물 상호의 대자적 실체를 길러내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발견한 것이다. 새는 새일 뿐이 아닌 국화와의 관계적 존재로 자랐고 국화 역시 국화는 국화 너머 타 존재와의 관계적 실체로 자랐다.

새로운 국화꽃의 실체와 소쩍새 울음의 실체를 한 순간에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비로소 사유의 체계를 얻고 나니 천둥과도 똑 같고 누님과도 같고 나와도 그런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천리로 터득한 것이다. 사물의 예술적 개연성이 이런 것이란 점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다. 소쩍새가 국화꽃 피우기 위해 울었다고 농부에게 말하면 정신병자로 취급할 것이다. 예술은 차원이 다른 미적 사유를 재배하는 최고 자유사고를 누리기에 종교의 신도 초월한다.

철학보다 더 철학적이다. 따라서 시인의 시적 제일차 사유 공지 즉 사물 텃밭은 그 구체적 사물이 중심이 된 여타의 관계적 사물들의 상징적 의미의 보조를 통해서 중심 사물의 생명현상을 재배해 내야 한다. 국화꽃 생명현상은 식물학적 꽃 너머에 존재하는 소쩍새. 천둥, 누님, 무서리, 나의 불면 등이 국화꽃 공지에 모여 꽃이란 현상을 미적 실체로만 시를 재배해 낸 것이다. 바로 구체적 사물 시의 원조이다.

이를 발표할 백지 공지로 옮기고 다시 언어 표현을 잘 다듬는 독특한 시적 색지가 소위 백지 공지이고 이것이 독자에게 제공된다.

모든 사물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사물의 존재 의미는 한 순간도 정지되지 않고 미끄러져 흐른다. 그래서 실체란 타 사물과 관계되는 순간마다의 변하는 존재를 말한다. 우리들이 생활하는 실제와 구별하자는 것을 저간에 계속 강조해 왔음을 다시 상기하여야 한다. 시는 의미 구조와 구성 관계로 행과 연이 길어져도 실제로는 한 순간의 시적 시간이란 특성으로 실체를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다음의 <최초의 충돌>시 해설에서 숙지 하기 바란다.

바다가 시적 공지이고 하늘이, 아니 삼라만상이 시가 재배되는 제1차 공지이다.

 

2. 시적 공지의 인식과 형식화

여기서는 실제 시 한편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시저 공지의 텃밭 이론을 다시 더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발표된 한국일보 올해 신춘문예 작품을 대상으로 이 시적 공지 이론을 심화시켜 보고자 한다.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신이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오리너구리,//한 번도 본 적 없는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손아귀에 쥔 것 그대로 //보이는 대로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가//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

//알고 계셨나요?//기슭에 떠내려 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끊어낼 수 없는 주렁주렁//전구 없는 필라멘트들불을 켜세요//외쳐보는 겁니다 //, 이상해.​​//

이 시는 시인이 정작 작명소가 없는 마을을 원하지만 시의 전편은 작명소 안에 있는 현실의

우리들 인간의 삶의 문제를 역설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작명이란 사물에 이름 짓기이다. 이름이 없는 사물은 존재가 가능한가 하는 것부터 먼저 생각

해보기로 한다.

 

인간은 사물을 인식하려면 제일먼저 어떤 형식을 갖추어 이름을 짓는다. 개체의 독립적 단위

 

를 우선 범주화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없는 경우 실제는 현상해도 타 존재와의 변별

 

을 기본으로 하는 언어 전달 행위를 할 수가 없다. 가는 것과 오는 행위 사실은 간다, 온다

는 각기의 이름이 작명돼야 어떤 인식과 전달이 가능하다. 결국 이름이 없는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는 말이 그래서 천리가 되고 언어의 발명이 인간의 위대함이 된 것이

.

 

그런데 이 시는 이 작명이 존재를 실은 괴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오리너거리라고 이름을 작

명하고 나면 이 존재는 엄연한 정상의 독립적 생명체인 동등의 사물인데 불구하고 오리도 아

 

니고 너구리도 아닌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고 만다는 시적 사유를 체계화 하고 있다. 이 시가

 

당선 감임을 이런 사유 체계화에서 인정받게 되었다고 본다. 시적 사유를 잘 재배해 낸 것이

 

기 되기 때문이다.

이 시인은 이 오리너구리 사물에다 시의 텃밭공지를 만들고 다른 사물들의 작명에 대한 실체

를 찾아 시적 시각과 심상을 다 재배해서는 백지공지로 옮겨 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사물의 작명이란 이 숙명적 실체를 우리가 이해해아 하는 문제이다.

 

가령 사과나무란 이름은 얼핏 보면 정상적인 것 같지만 감나무와의 변별적 힘 외에는 사과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역시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과가 열리는 특성 보다 더한 차별이 뚜렷

한 이름을 지을 수 있는데 이 사과나무란 한가지로만 인간은 제 편리대로 이름 지어 놓고

실존 존재들을 덮어 두고 있다.

 

이러니 시인은 그 가려진 실체들을 찾아 시적 재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더 넓은 시적 텃밭

공지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물들이 다 이런 현상이기에 모든 사물은 시인의 시를 기르는 텃밭일 될 수가 있다.

이게 사물의 기본 존재구조이다.

 

<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실오라기>가 되는 허망한

 

사물들의 존재 인식을 작명소라는 이름의 형식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시는 그렇

게 누구나 믿던 이름에 다시 공지텃밭을 만들고 다시 시적 사유를 길러낸 것이다. 결국

인생과 이 세상의 존재는 참 이상하다는 외침으로 시를 종결짓고 있다.

 

오리너구리의 사물 이름을 중심으로 사유 체계를 세워서 모든 사물의 이름을 괴물 만드는 이

상한 현실 현상계 대한 시적 재배를 잘 성공시켜서 백지공지로 옮겨 발표한 것이다. 구체적

사물에 텃밭을 만들어 시를 재배하는 기본을 지킴으로서 성공한 수작을 한 편 얻은 것이다

모든 사물들의 실제 실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어느 사물이고 시의 재배가 가능한 텃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시는 시인이 사물의 공지 텃밭에서 시적 사유를 미적으로

길러 가꾸어서 백지란 인공 공지의 장으로 옮기는 정신적 창조 작업인 것이다.

이제 시를 시인의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을 추상적 관념으로 어떤 관념을 미적이라고 만들어

내는 것은 구체적 상징을 얻지 못해 미적 표현의 옷을 입힐 수가 없어서 넋두리가 되고 만다

는 것을 재인식해야 한다. 내 마음대로라고 자유사유를 우겨대는 무책임은 버려한다.

우리는 어떤 인식이든 형식화해야 인식이 가능하고 효율적이다. 삼각형이니 사각형이니 하

는 것은 어떤 기준에 의거해서 형식화는 인식 행위이다. 그건 토끼 모양이라고 말할 때 토끼

모양은 형식화 인식 방법이다. 물결이 파도였다고 했을 때도 형식화이다. 시는 사물에서 재배

하는 것이야 했을 때도 재배라는 형식을 통한 시적 인식을 형식화 하려는 것이다. 제배라고

하면 공지란 사물의 밭의 힘을 얻고 재배란 노력을 들여서 잘 가꾸는 의미미가 있기에 객관적

인식 형식화가 된다는 유용성 때문이다.

 

 

3. 획일화의 일반적 삶의 실제

 

우주의 만물은 독립적인 것이 없다 이것이 진리이이고, 법칙이고 질서이다. 연기로 보는 것은 양변으로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안목이 나온다. 라는 존재도 실체도 없는 연기로 존재하고 우주 만물도 본래 연기로 존재할 뿐이다.” 연기로 존재하는 나와 우주 만물은 그대로 완전하다고 하는 선지식들의 이런 가르침은 지금 우리가 논하는 이 양변적인 현실 인식은 고통과 적자생존의 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나보다 큰 힘의 논리에 의해서 획일화되는 그야말로 플라톤적 현상계의 무지와 비극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사물의 관계적 연관 존재를 실체로 본다면 다분히 미적 개연성은 무한으로 만물이 소통한다. 빈 토지에 나타나는 무수한 종류의 잡초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어떤 개별적인 계급적 독립성이 전혀 진리나 법칙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홀로는 진정한 존재는 없다는 것이 미학의 기반이다. 또 미학의 윤리적 가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시를 재배한다는 것은 사물의 독립성을 벗어나 무엇과도 관계적 의미를 공유하는 실체가 내재해 있다는 존재론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된다.

시는 사물의 실체를 끝없이 찾는 작업이다. 그래서 사물을 홀로 혼자 두면 모든 존재는 제로가 된다.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사람만이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먹이의 본능으로만 타 존재가 소유된다. 사람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형식 능력 있어서 다양한 사물의 존재를 소유하고 누릴 수가 있다. 시는 새로운 사물의 실체를 찾아 미적 정념을 누리는 집이다. 그래서 사물은 이 시를 기르는 시인의 텃밭이다. 빈 공지요 토지이다. 즉 제일차 공지가 사물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저 홀로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는 천리를 끝내 믿기 때문이다. 지금보다는 관계 양상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그 존재성을 획득할 때 까지 참고 시의 새싹을 기다리고 가꾸어야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른 존재와 특수하게 관계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 시적 시각과 이미지가 빛나게 발생한다. 이 때면 시는 거의 반은 다 쓴 셈이다 가장 핵심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인공 백지로 다시 옮겨 구성을 갖추어 내고 이데아의 표현작업을 적확한 언어로 실행하면 시는 탄생한다.

사물의 관계 양상의 파악은 두 개 이상의 사물 세계에서 필요에 따라 연쇄적으로 다른 사물들이 연계될 것이다. 시의 세계 확대는 이렇게 해서 일어난다.

그런데 이런 시 작업에서 시가 될 내용은 사물에 대해 내가 기른 내 생각만을 가지고 백지란 공지로 데려와서 차분히 작업하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미 일상의 실제에서 실용적으로 사물의 것이 된 것들을 가지고 와서 백지 공지에 함께 끼워 넣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미 시로 써먹은 것을 내 것인 냥 표절해서도 안 된다.

가령 소나무는 집을 짓고 연료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소나무가 선점한 것이고 내가 처음으로 알아 낸 것이 아니니 훔쳐오지 않아야 한다. 물론 그간 시에 쓰인 다른 이의 내용들은 더더욱 안 된다. 온전한 내 힘과 내 것이 아니라면 시에서는 쓸 수가 없다. 여름의 나무 그늘이 아무리 유용해도 그것은 이미 소나무 소유이다. 나는 고마워할 것뿐이다. 온전히 내 것이 새로 찾아져 미적인 존재가 된 것만 내 시의 것이다.

가령 소나무에 달이 꼼짝 못하고 걸려 있어서 내가 반대편 도랑으로 건너가서 달을 보니 달이 공중으로 훤히 떠올라 소나무에서 달이 쑥 빼내졌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히 내가 한 미적 정념이고 형상화이다. 소나무가 달도 잡아 둘 수 있고 달도 나뭇가지에 걸릴 수 있다는 새로운 실체를 양편에서 처음 찾아 내 것은 내 것이라 내 백지공지에 옮겨 놓고 독자에게 보여줄 특권을 갖는다. 이게 최초의 내 생각에 충돌을 주어 새 이름을 얻어낸 쾌거다. 내 생각에 폭풍을 일으키는 충돌을 가하는 행위가 시적 연기법이다.

이제 이 단계에서 2021년 서울 신문 신춘문예 작품, 김민식의 <최초의 충돌>을 이런 내 백지시론 실제의 구체적 예로 주요 부분을 해명 해 보기로 한다. 모든 시 해석은 반드시 시작품에 근거해서만 객관적으로 펼쳐야 한다. 근거 없는 해석자 임의의 주관적 해석은 금물이다.

먼저 이 시의 기본구조를 개략하여 시 전체를 이해하는 인식 형식을 먼저 제시한다. 이 시의 시적 시간 구조부터 형식화 해보면 tv에서 아나운서가 테니스 경기를 중개 하는 한 방송 순간의 시적 시간 구조의 시간으로 형식화하고 있다. 그 다음은 인식 기본 구조인데 라겟과 공의 역학구조이다. 라겟을 언어구조 유사성에 입각한 소위 언어유희로 ‘로겟’의 추진체로 보고 공을 우주로 날아오는 새로운 인공위성 본체로 보는 인식 형식 구조이다. 그 다음은 이 시의 구성에 대한 기본 인식 형식 문제인데 tv 첫 화면으로 시작해서 종결부에 다시 아나운서 중개 마침 화면을 제시하면서 완벽한 닫힘의 액자 구성 구조로 매우 계획적 구성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의 핵심 이데아는 카메라 화면의 화소가 가진 해상도가 그물눈이란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빈 공중에 안 보이는 것을 붙잡을 정도의 카메라의 해상도는 천사도 붙잡아 내고 성령의 자리도 잡아낸다는 것이다.

이정도면 이제 시의 해설 기본 형식은 거의 완벽하게 잡혔다고 본다. 아무 인식 구조 틀을 시에서 전혀 못 잡아내고 횡설수설 하는 것은 시를 보고 싶은 대로라는 무책임이다.

 

** <최초의 충돌/김민식> 시 해설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해설부호)공은 라겟(로겟)의 추진 체 힘으로 공은 공중을 충돌한 만큼 의미를 얻는 공중을 만들었다. 최초의 두 충돌은 공중에 충돌한 만큼의 새롭게 빈 공중이 어떤 실체가 되는 세계를 열었다. 이것은 시인이 관찰하고 생각한 것이다. 본래 공은 치면 나는 능력은 제 것이고 라겟도 치는 능력은 라겟 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전혀 달리 본 것은 시인의 것이다. 화면 너머를 본 것도 시인 것이다. 화면은 tv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화면 너머 테니스 경기를 본 것이다. 이것은 비록 테니스와 시인 공유지만 역시 새로 시인의 펼친 화면이라 봄이 맞다.

<고래의 힘줄/산양의 창자/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라켓을 짠다/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태어나는 눈/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
=이 두 교직 또는 직교 점을 눈으로 만든 것은 직공이지만 넓게 보면 고래, 산양 등의 합작 라겟(로겟)이다. 이것들이 공중에 공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본 것은 시인의 예리한 눈이다. 시인의 것이다. 시인 것이라야 시이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천사를 이런 교직의 그물이나 체로 걸러낸다는 것은 시인이 프랑스인을 통해서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이 교직의 직교가 성령을 얻는 좌표란 시각은 신이 내려앉는 자리라는 위대한 발견인데 이것은 이 시의 높은 내적 사유 체계 덕이다. 카메라 화소가 네모의 교직이란 것을 다 아는 바대로 이는 해상도라고도 한다면 구체적 사물 실체는 일찍이 우리들이 써오던 체이다. 체로 쳐서 걸러냈었다. 프랑스 인이 아닌 우리 민족이 먼저다.
<의심 속에서>=천사를 체로 걸러 내다는 것과 성령의 좌표란 생각들을 의심하면서도
<의심도 없이/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

=귀신의 눈은 실은 맹인 같다고 본다. 신보다는 한수 아래 존재다. 그러나 순수하게 귀신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복합적 인식으로도 본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부둣가에 쌓여 있다>
=교직의 어부 그물망에 눈알을 파 먹혀서 그물에 걸려든 생선들을 뜻한다. 천사도 걸려드는 카메라 해상가 그물인데 고기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눈먼 고기 나시질 얘기는 이미 다 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위대한 동물들의 눈이 아무리 밝고 단단해도 이는 교직의 화소 눈처럼 공중에 이름을 분이는 것에 비하면 그저 허공의 빈 눈들일 뿐이라는 것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이 구명은 교직의 눈이 아니고 허공이다. 그러나 호랑이가 걸려드는 미음의 그물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도 다 허상이라는 것이다.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고직의 의미 있는 화소들을 구하려 했으나 역시 인간 허공의 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설화적이라도 교직의 눈과 같은 최초의 충돌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 속에서/믿음도 없이/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이런 믿음들은 결국 믿음이 되는 것이 없는 삶이라 혁명이 필요할 뿐이다 즉 최초의 충돌이 아니라는 뜻인데 새로운 눈을 낳는 화소들이 아니라 것이다. 이제 우리들 사고체계에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이런 설명식 주장은 비시적이긴 하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의미있는 교직의 눈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신뢰가 안 된 것들이다 그러나 교직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인 돌, 불, 물의 교직은 그래도 충돌의 힘이 된다는 것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천개의 방은 천개의 교직을 이루는 화소의 그물눈이라서 신적의 돌이 된다. 다 시적 최초의 충돌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천개의 마음의 눈과 그물 교직을 상상할 줄 알아야 천사를 걸러내는 신전을 만들 수 있다는 강한 주장을 비유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최초의 충돌이 갖는 의미가 강조되는 설명이 부연되고 있다=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계획 속에서/계획도 없이/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이런 모습들은 다 화소가 없는 카메라들처럼 허황한 우리들 일상의 비좁은 사고구조를 반성하자고 한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이런 것이 우리들 일상의 그저 맹물 같은 사람들에 대한 견해로 보는데 어리석은 멍 때리는 tv시청자들을 지적하며 우중들을 연민하고 있다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종목의 공인구였다>

=드디어 시인은 이 시의 이데아를 제시한다. ‘내 주머니에서 꺼낸 빛나는 하얀 공, 아직 최초의 충돌을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새로운 교직의 눈으로 공중이나 어디에 새로운 이름을 달기 위해 충돌을 이룰 구기 종목의 공으로 공인을 받을 공이라는 것. 이것을 카메라고 잡으라는 지신 만만한 태도를보인다. 최초의 충돌 공과 라겟의 교직공처럼 빛나는 나의 흰공을 보라는 운변이다. 충돌의 교직 내용은 첮 연의 그걸 공식종목으로 하자는 뜻이었다고 보이나 종말의 제고나 승화 차원의 안정된 종결 법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시적 테니스 종목이 생겨난 것이다. 공중에 높은 화소의 해상도를 잘 갗춘 시도다. 이제 시도 질 좋은 카메라가 되는 구기종목이다. 그래서 빛나는 하얀 공이라 했는데 빛나는 하얀 시를 앞으로 쓰겠다는 뜻도 된다.

이제 이 시의 기존구조에 대해 답해야 한다. 이 시의 첫 연이 화면에서 시작해서 맨 종말의 끝이 화면으로 끝나고 있음을 간과하면 이미 시해 설을 한마디로 다 꽝이다.

tv 화면은 화소로 이루진다. 실물이 아니다. 카메라가 화소로 잡은 영상사이고 사진이다. 화면은 해상도라는 것이 기본임을 다 알 것이다. 화소의 특성을 말한다. 화소는 그물망이다. 사각형의 아주 작은 교직의 그물눈이거나 그물코이다. 라겟이나 체의 힘줄 바탕이 횡선과 종선의 교직으로 이루어진 그물눈이고 그리고 이는 일종의 다양한 이미지들의 보고이다. 라겟이나 체는 그래서 화소이고 카메라 기능이 있다. 공중에 나는 공이 또 다른 화소이다. 따라서 당연이 공중이 어떤 이름을 단 실체가 화면이 될 것이다. 공중을 찍는 카메라 기능을 나는 공이 할 것이다. 이 시의 종말에 호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내는 것은 새 구기종목을 발견했기에 공인구가 된다. 시의 새 종목, 즉 장르를 발견한 것이다. 시 해석은 이런 시의 형식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면 다 견강부회, 횡설수설, 다 헛소리다. ,<,다음호 계속>

 

경남문학 2021 여름호(통권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