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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실체론의 실제

전 문수

승화란 말은 사전적으로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을 의미한다. 과학에서는 고체가 액체 단계를 거치지 않고 기체로 변화하는 순간을 가리킨다고 한다. 어떤 연구자는 오늘의 자기를 어제와 달리 지속적으로 혁신해가는 용기와 신뢰가 바탕이 된 한 층 높은 정신적 고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세 가닥의 큰 줄기로 이 승화를 모든 사물에 적용한다면 필자는 매우 쉽게 훌륭한 시적 실체론의 이해에 이르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물의 실체는 똑 같이 어떤 가치 있는 승화를 지향하고 있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눈 덮인 푸른 소나무는 지금 당당한 인내의 승화를 스스로 진행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사물을 어떤 형식으로든 가치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려 할 때 그 기본 과정은 실제 단계와 실체 단계란 이 매우 폭넓고 깊은 강을 건너야 한다고 본다. 곧 한 차원 높은 승화 과정을 거쳐 도달한 자리의 쾌락 같은 것이 수반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문학의 쾌락과 지향은 은 이 지혜와 미적 고양의 정서가 혼합된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1. 실제와 실체의 차이는 무엇일까

 

라이터가 없어서 초에 불을 켜지 못해 주방 가스 불을 향해 급히 갔어도 이 불을 옮겨 줄 매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디고 종이 한 쪽이면 쉬운데 급히 온 이 가스 불 앞 뒤에서 이내 이 하찮은 헌 종이 한쪽 얻기 힘 든다. 그러다 그릇 진열장 안 한 구석에서 우연히 묵은 놋그릇 사에서 빛바랜 신문지 한쪽이 뾰족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불과 5센티 정도의 아주 작은 쪽지가 아직 끼어 거기서 수명을 연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종이가 한 순간에 가스 불을 촛불로 옮겨 주고는 재로 사라져 버린다. 그 때 우리는 낡은 헌 신문 쪽지 한 쪽의 종말을 촛불이 빛을 밝게 밝히며 아주 평화롭게 타오르는 것과 대비해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게 된다. 가스 불에서 헌 신문지 불로, 다시 촛불로 옮겨 간 한 순간의 변화 과정을 보면서 불현듯 종이의 승화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헌종이란 사물 속에 숨은 속성 중 한 부분의 실체가 현현되는 순간의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물론 헌 종이는 어디서 또 제 실체를 다른 형식으로 실체를 드러낼 경우는 무한이다.

그저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옮겨가는 것은 흔히 일상에서도 있을 수 있는데 단순한 문제로 여겨 넘겨 버리기는 경우가 많다. 설령 좀 깊은 관심 정도였다고 해도 이 중요한 변화를 이내 적확한 답을 버리고 만다. 비철학적인 태도라고 할 것 같다. 만일 우리 인간의 어느 죽음이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하고 생각해보면 우리들 삶의 실제는 그래도 보다 차원 높은 실체에 접근하다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아주 큰 생각을 할 수 있다. 자기를 재로 태우고 이쪽 실용적 불을 한층 더 높은 저 가스통 바슐라르의 예술적 촛불로 옮겨 준 헌신문지 한 쪽과 물에 빠져 허우적이는 한 사람을 위해 순간 뛰어든 사람이 구하고 자기는 죽음을 맞았다면 이 둘의 차이는 희생인가 승화인가 또 적확한 답을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실로 우리들 삶의 매일은 이런 연속적 시간 접기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 온몸에 전율이 일수 있다. 전혀 의도하지 않는 우연한 순간의 일이 더 높은 가치를 가져 왔을 때 그 결과는 누구의 몫으로 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은 헌 종이 쪽지의 이용 가치와 그와 다른 매우 귀한 존재의 결과의 두 경계 지대에서 어찌 이를 갈라 볼 것인 가의 문제는 아무래도 철학적 문제고 문학의 경우 중요한 미적 인식 문제다.

돌멩이 한 개가 날아가 사람을 살인 시킨 것과 칼이 날아가 살인 시킨 것은 어떤 차이일 지도 간단치 않다. 둘 다 우연이라면. 그러면 우리들 삶에 필연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에 문제가 다시 제기 된다.

우리들 환경 속의 모든 관계 사물들은 끝없이 서로 실제 하면서 실체를 향해 승화돼가고 있다고 보자는 것이 이번 챕터의 실체시론 전개이다. 우리 인간은 물론이고 이 세상 모든 사물들은 무수한 경우에서 실제 현상하는 것은 보다 승화된 실체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의 삶의 실제들은 매우 다양하고 즉흥적이고 단순하다. 그러나 어떤 실제는 그 사물의 실체를 쨍하고 건드려서 한 순간 한 층 높은 인식 단계로 고양시킨다. 문학적 미의식은 바로 이 단계의 산물이다. 아마 시의 창작은 다른 장르보다 이런 현상의 주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모든 문학 장르가 다 그렇다.

사람을 포함한 현상계의 모든 생명 현상들은 다 주어진 조건에 우선 맞추어 사는 매일의 실제를 무수히 실행하며 산다. 그러나 이들 실제가 다 실체에 이르지는 못하고 끝없이 반복될 때 질식한다. 특히 인간은 기억과 꿈으로 형성된 존재이다. 이런 개성적이고 주관적 인식이 거의 본능적인 존재다. 보다 높은 단계의 놀랍고 새로운 승화 단계 없이 사는 것은 지옥일 것이다. 아마 다른 생명체들도 삶의 이치는 똑 같다고 본다. 폭풍이 왜 바다에는 필요한가를 알면 짐작이 된다.

그러나 실체는 보다 높은 수준의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 이 우리들 주관적 인식이 증명돼야 한다는 뜻을 암시해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능력은 가상과 현실을 가를 힘이 넉넉지 않다는 것이 이 큰 문제임을 이제 다시 생각해아 한다. 장자의 호접몽은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환상적 꿈이라 생각한 장자의 철학이다. 흔히 인생은 무대 위의 연극인 환상이라고들 하는데 그러면 이 연극은 어디서 배워 그리하는 것인가 묻는다면 그 답은 원래의 연극을 보고 배운 것 아니겠어요 답하면 우리 생각은 저간의 사고들을 어찌 고쳐야 할지 난감해진다. 속절없이 지금 사는 것이 연극이기에 이를 모방한 것이 무대의 연극이기 되기 때문이다. 인생 실체가 송두리째 뒤집어진다. 장자의 철학에 우리는 다 합류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꿈속처럼 연극하고 있는 것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진짜 연극이라고? 도저히 믿어 지지 않을 것이다. 무대에서 내려와 사라지는 배우가 곧 내 주검이 분명 해진다.

이렇게 열심히 버둥거려 산 것이 배우 짓이라면 너무 허무하다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환상과 실제가 동시에 존재하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모든 실체는 이 두 세계가 합친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실체 추구의 노력과 용기가 없다면 분명히 우리는 연극하다 가는 존재가 맞다. 지금이 우리들 실제가 실체를 추구하는 꿈속이라고 해야 옳다. 그렇다면 문학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고 비로소 삶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위한 학이시습(논어의첫처구절) 없이 시 창작 한다는 것이 그간 가당했던 것인 가를 깊이 자책해 봐야 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 양태 모든 삶의 형식들은 양면성이 상호작용의 역동 구조이다. 실체는 환상이나 상상의 힘을 바탕으로 개연성으로 접근되는 곧 이데아이다. 이러자면 사물들은 이미 이 환상이나 상상의 요소를 실체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느 것이 무라고 실제 한다면 반드시 유가 그 배면에 깔려있다. 모든 사물은 이 양면성으로 세상의 존재들 다루는 원리를 그 자신 안에 갖고 있다. 시간과 공간 역시 이 두 양면성은 상보적 겹치기 존재다.

문제는 인간이 이를 어떻게 들여다보는 능력을 기르느냐 이다. 해석해 낼 학습이 돼 있느냐 이다. 아무리 날카로운 감각된 질료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승화된 실체를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의 감각 너머에 있는 인식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과 지속적인 혁신의 용기를 길러가야 한다. 실체는 어디로도 무한히 열려있으나 타 존재와의 관계 조건이 그 사이를 어떻게 이해하게 하느냐를 아는 능력만큼 최선의 실체 상태에 이를 것이다.

 

2. 화이트 블록과 블랙블록

 

이 논제 표제어를 지극히 일반적 개념화로 만들어 보다 실체를 보는 방법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구안해 본 것이다. 좀 생소하지만 모든 사물의 실체가 가지고 있는 흰 영역과 검은 영역의 원환구조를 설정해 볼 필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물들은 밝은 긍정적부분과 어두운 부정적 부분이 한 고리로 연결되어 밝은 부분이 최고의 한 순간에서 시간이 연쇄적으로 접히면서 어두운 부분으로 기울어서 최고의 어두운 부분에 이르면 이제는 그 반대로 점차 밝아지면서 다시 최고의 밝은 부분에 합쳐지는 순환 고리로 무한수의 의미가 다양하게 대립되면서 실체를 환경에 맞게 그때마다 드러낸다는 뜻이다. 물론 현실의 구체적 실제의 리얼리티가 진실로 수반돼야 이런 접근과 효과는 볼 수 있다.

이런 두 세계 사이의 합의가 진리라고 보기에 편리상 화이트블록과 블랙블록으로 용어를 개념화 해 보았다는 점도 다시 강조한다. 가령 한 달 동안의 달의 움직임을 보면 금방 이 원리의 그 밝고 어두움 관계와 변화 원리를 모든 사물의 실체로 일반화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독립체인 겨우 어느 소나무 한그루처럼 여러 환경 변화의 생존 조건에서 실은 이렇게 적응해서 한 살이를 누려가는 것이다. 가령 우리들 삶의 궁핍이란 실체도 이 두 블록 사이의 역학 관계를 필연적으로 가질 것이다. 평화도, 진실도, 고통도, 슬픔도, 개념의 모든 언어도 그렇다. 그 실체 정도는 두 블록 사이의 무한이다.

작시를 한다는 것은 이 두 블록 사이의 메커니즘이 바로 이데아를 얻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삶이 그렇듯 그에 따른 해석에 대립 개념은 반드시 전제돼야 비록 실체를 온전히는 잡지는 못해도 가까이는 어떤 심상으로도 느낄 수가 있다.

시에서 이미지란 이렇게 귀중한 것이다. 화이트 블록과 블랙블록의 양면성이 실제로 거대하게 작용하는 힘이 실체 존재이다. 이런 양면적 인지작용이 실제로 수반 할 때라야 실체는 보다 더 다가온다. 시 또는 문학은 이런 실체 추구의 가장 대표적인 인식 양식이다.

이런 사변적인 진술로는 개념잡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과학의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사람의 인체의 실체를 보다 정확히 알려면 사람의 감각 작용을 통한 실제는 실체 접근에 한계가 있다. 우리의 눈의 실력은 2.0 이상으로 제한된다. 귀의 가청도도 역시 그 한계가 있다. 세균을 눈으로 못 보듯 개미의 숨소리를 우리는 못 듣는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기술을 탐구를 해서 각종 현미경, 특수 촬영기를 발명해 뇌 속을 들여 다 보고, 보다 실체에 가깝게 최적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해도 당연히 아직 실체의 완전 정복은 불가능하다.

이와 똑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생명 현상이란 삶의 실체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관계하는 모든 사물과 행위의 사실들을 현미경 대신으로 수단화해서 이들을 보조로 삼아 세밀히 분석하고 고찰해서 이들 구체적 사항들을 원관념으로 대신 인식기능을 하도록 간접적 언어 문장을 조직하여 실체 즉 원관념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 원관념이 완전히 다 잡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소위 실제의 리얼리티란 이런 개념이다.

이때 인문학적 상상력이나 환상력의 빛은 이런 유추 능력이고 개연성 발견이다. 정념이나 정서의 실체는 일반성이 전혀 없는 특수성뿐이라서 이런 힘으로 밖에는 실체에 접근할 길이 없다. 어찌 생명 속 안을 파서 볼 수 있겠는가.

왜 문학에는 표현이란 말이 지배하는가? 표현이란 설명이나 해석이 불가능한 것을 다른 사물로 대신하는 언어를 구성하는 방법을 말한다. 왜 굳이 설명이나 해석이라는 말을 금기시하고 표현이라고 하는 지를 확실히 깨우쳐야 한다. 한마디로 비유어이다. 사진기로 촬영하여 보여주기 식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법이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시적 철학적 방법이다. 모든 예술적 방법은 이리하여 사물의 실체에 접근해서 기존의 의미를 번복시키고 새로운 실체 존재에 보다 놀랍게 접근시킨다. 그래도 역시 실체의 정복이란 불가는 하다. 끝없이 이런 인식 방식이 추구되는 것이 문학의 존재 형식이다.

어쩌면 이런 필연과 실존의 순환적 자장 속에 뒤섞인 사물의 현 상태에서 우리가 희망하는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것 같다.

이 정도에서 이제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서 보다 더 구체적인 확인을 할 단계가 된 것 같다. 위에 언급한 여러 실체론과 현미경을 대신하는 여러 표현기능을 하는 사물 이해 법들을 고찰해 보기 바란다.

 

1.마루 밑/백상웅

어느 대에서 잃어버렸을 신발 한 짝과

신발을 찾던 쪼개진 장대와

수년 전부터 이어받았을 거미줄과

자루 부러진 삽과

 

두어 삽 퍼내고 싶은 어둠과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를 바람과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잎사귀가 있다.

 

옹이 빠진 구멍으로 쏟아지던 빛과

계절마다 색이 다른 먼지의 퇴적층과

그 위에 찍힌 개발자국과

마루 위에서 주저앉아 쏟아졌을 한숨이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를 가족이

초저녁에 막차를 기다리던 마을로 이주했을 때다.

마루 밑에서 들려오는 먹먹한 소리와

처마에 달린 알전구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이에

눈이 날렸고 발목까지 쌓이고 나는 뜨거웠다.

 

그렇게 스물에 마루 위에 앉아 서른을 기다렸다.
-창비신인상 당선작

이 시는 가난이나 궁핍이란 실체에 삶의 구체적 실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매우 리얼하게 제시되고 있다. 화이트 블록과 블랙블록의 원환 고리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우리들 삶의 실제들은 이렇게 어떤 실체를 향해 핏빛처럼 가고 있다. 다 잡히지 않는 끝은 영원하지만.

인간 의식의 여러 환상과 개연성이 현실에 실존으로 실제 하여야 실체에 최적으로 접근된다. 동전의 앞과 뒤의 거리가 서로 붙어 있는데도 의미상으로는 정반대의 어마어마한 무한대의 두 블록 세계 차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환상과 실재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장자의 호접몽이 계속 실감된다.

현실이라는 우리들 지금 실상은 그림자에 불과한데 이는 어떤 실체, 즉 이데아를 빛이 뒤에서 비추어주지 않으면 이마저 무이니 그림자라도 감지덕지한 것이다. 밤에는 이마저 숨어서 숨바꼭질이다. 우리들 감각 현상으로는 너무 생생한 현실인데 여기를 이데아의 모방인 가짜 꿈의 그림자 역할 뿐이라니 참 현실 자체가 이미 형이상학적이었다.

실체가 안 보이는 현실은 우리들 감각의 실제(매우 실체 같은데)일 뿐이라니 너무 혼돈이 온다. 확실한 것은 그래도 그림자와 실체는 서로 두 짝이 분명하다. 모든 사물은 다 양면의 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신비스러운 세계에 우리는 산다.

따라서 문학은 저 비문학적인 것들과 대림의 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보 상조하는 불가피한 짝이다. 철학의 3대 영역이란 실은 심위 일체의 관계를 편리상 나눈 것뿐이다.

이런 사유의 실제 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실체를 추적을 할 수가 있다. 문학은 환상이나 상상의 힘으로 즉 개연성을 발견하여 실체를 계속 재해석하는 분야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 시를 자료를 이를 더 고찰해 볼 수가 있다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김광민

미안해요,

당신을 윤리 책에 담으려 했어요 (=기존의 어떤 의지 실체 세계에서 빼내기 해야 한다)

당신의 신발을 신발장에만 가두려 했으니 (= 효용성 위주의 지적 세계에서 도구기는 빼내기 해야한다)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얼마나 기존의식에 가쳐서 애탔겠어요. 자유롭게 탈출해라는 뜻)

미안해요,

당신을 수학책에 담으려 했어요.(=당신의 하는 일을 현 시가로 계산해서 돈의 가치로 현실적 소유를 하려 했다).

당신의 모든 걸 계산하려고 했으니(=이렇게 사는 것을 계산적 삶이 얼마나 자신을 효용성 도구로 계산하는 것이냐는 뜻 )
당신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매일 같은 계산을 하니 똑같은 삶의 지루함이 계속된다는 뜻)
미안해요,

당신을 국어책에 담으려 했어요(=기존의 교과서적 어떤 표준에 시나 수필 등 관습화된 것을 미적 작품으로 생각한 것 )
당신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 살게 했으니(=익숙한 일반적 상투적 삶의 이야기속의 한 주인공으로 이해라고 사는 것)
당신은 얼마나 심심했을까요.==한 가지의 모델에 담긴 냐요으로 너무 변화가 없이 산 것)

미안해요,

당신을 음악책에 담으려 했어요==같은 노래로 불러대기.(=익숙한 한가지 작곡 속에 가두기한 것 )
당신의 눈에 들리지 않는 음표들만 늘어놓았으니(= 새로운 의미가 해석되고 노래되는 음표를 보여주는 것이 미안하다 )
당신은 얼마나 짜증났을까요(=난해한 시의 음표들을 지적한다고도 할 수있다).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인데(=여자, 곧 시적 대상은 어떤 고정된 하나의 의미로 가두아 둘 수 없는 열린 생명인데 온갖 옷을 입혀 순수한 알몸 실체로 알지 못하게 한 것, 세계의 생명 성과 정념을 잃게 한 것)

당신은 책이 아닌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데(=지금 세계 내 현존한 바로 그 세계 내 존재인데 어디에도 생명의 생생한 순간의 실체를 가두어 둘 수 없다)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죠
, 정말 미안해요
또 다시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네요

(=진정한 답은 당신에게 이미 기존해 있는 잘못된 것을 찾은 것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생각을 바꾸어야 참된 당신을 보는 것 인데란 강조의 종말제고 방식의 종경처리, 시는 나부터 기존관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개연성을 여는 것이라는 일반화다. 개연성의 선취작업)
---정지용문학성상 당선작

이 시의 주제의식을 가장 높은 의미 단계로 유추해서 요약하면 시는 실물을 종이 위에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미적인 것만 언어로 그릴 수 있다는 것. 미적인 것은 다 그림기라는 것이다. 손에 잡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언어로 그림기리기가 시라는 것. 실물이 백지위에 심기거나 담길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언어놀이이가 시이고. 결국 환상과 개연성이 시의의 바탕이 된다는 거다.
문학은 정념의 구가(謳歌)이다. 다음 시를 하나 더 보자. 사물과 실체가 어떤 언어 표현 기 능의 예술적 실체 가치에 기여하는 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둘기에 관한 가벼운 시선>/ 김풀

나는 그를 눈여겨보았다
자기 영혼을 위안하려
한 발짝마다 붉은 발등에 머리를 조아려
스스로 축복해야 했는지
겨울 광장을 쪼아 둥그렇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빵을 뜯어 던져주며 보내는 오후
중심을 벗어난 나를 중심으로
절반의 균형을 팽팽히 잡아 주는 그가
평범한 새가 아닌 것을 나는 믿는다
그를 눈여겨보는 일이란
세상의 가장자리를 돌며
시간의 부스러기를 쪼아 먹어야 했던
내게 스스로 위안을 주는 일이다

더 이상 던져줄 빵 조각이 없자
그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광장의 절반이 가벼워졌으나 곧 어두워졌다
가로등 불빛 파닥이는 작은 원 안에서
팽창을 잃은 찌그러진 내 안에서
나는 그를 다시 기다린다
-시와소금> 신인상 당선작
(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미는 사물 실체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마을을 읽어내는 것이다. 즉 예술이란. 技術이다. 언어 그림은 그 사물의 실체가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게 하는 기술이다. 인간이 마음을 제 맘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 최고로 아름다운을 잘 드러내도록 하는 둘의 합작 품, 그 최적의 기술 추구이다. 사물의 실체에서 인간의 미적 감정과 요소를 발견하는 기술이 예술이다. 시인은 언어 표현 기술자이다.

따라서 시인 앞에는 사물이 살아서 한껏 생명을 구가하는 존재로 있어야 한다. 정념을 구가(謳歌)하는 자로 살아 있어야 한다. 거리낌 없이 즐거움을 누리는 자이다. 이를 시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러도 볼 수도 있다. 사물의 실체는 사람과 서로의 사랑에 대한 그 정념들 문제이기도 하다. 정념이나 정서는 그 심리적 배경이 개연성의 자유란 엄청난 세계의 열림이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개연성의 세계에 문학은 우주를 만들고 재주 부리기를 한다. <다음호 계속>

 

전문수; 창원대명예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