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 다른 동양적 사유관의 한 특징은 외부세계에 대한 관조의 체험을 통해 자아와 세계가 일체를 이룸에 있는데, 이는 불교 선종의 직관적 정묵관조(靜默觀照)의 태도가 그 바탕이 된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창작에 있어서는 응신관조(凝神觀照; 정신을 응집시켜 관조함)와 침사명상(沈思冥想; 깊고 아득히 생각함)과 같은 선 수행이 강조되고, 천상묘득(遷想妙得; 생각을 돌려 묘하게 득함)한 의(意)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관심을 두었다. 그런 경지에 이른 북송(北宋) 시대의 소식(蘇軾)은 그의 시 송참요사(送參蓼師)에서 다음과 같이 읆음으로서 시 선(詩禪) 합일의 묘를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시구가 묘하도록 하려면 비고 고요한 곳울 삻어하지 말라. 고요한 까닭에 뭇빈 것을 수용하고 비어있는 고로 만 가지 경계를 받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일러 '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만 여겼던 불가의 가르침은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에 이르면 더 한층 오묘해 진다. 관념이 아닌 직관을 중요시 하는 선(禪)의 세계에서 그 섬세한 깨달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 아닌 절제된 언어인 '시(詩)', 이른바 '선시(禪詩)'이다. 일상의 언어를 초월하고 논리적 도구로서의 언어조차 최소화 하려는 선의 세계에서 화두의 전개방식과 선시의 표현은 사뭇 엉뚱하기조차 하다. 그런데 그 엉뚱하도록 역설적인 데서 화두나 선시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어찌하랴. 결국은 '궁극적인 실체가 무엇인가'로 집약될 수 있는 선시의 언어들은 그래서 오롯한 정심(靜心)으로 물심일..
디지털 시대 각종 영상 매체를 통해 넘쳐나는 이미지 언어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해봤다. 인류 정신사의 위대한 발명품인 문자언어 역시도 우리 마음의 섬세한 가닥을 오롯이 잡아내는 데는 역부족인가. 여전히 우리의 생각이나 정서는 언어라는 기호체계 밖에 존재하여 표현은 늘 목마르고, 존재의 실상은 아직도 오리무중인가. 그래서 옛 성현들은 어설픈 언어에 의지해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귀로 들리는 것만을 듣고, 형체 있는 것만을 쓰려는 병폐를 지적하여 "사람은 글자 있는 책만 읽을 줄 알지, 글자 없는 책은 읽을 줄 모르며, 줄 있는 거문고는 탈줄 알아도 줄없는 거문고는 탈줄을 모른다. 형체만 쓰려들고 정신을 쓸 줄을 모르니 무엇으로 거문고며 책의 참맛을 얻으랴.(人解讀有字書 不解讀無字書 知彈有絃琴 不知彈無絃..